[스페셜1]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우수상
2006-05-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피의 비, 근대가 스스로 빚어낸 파국

<혈의 누> 이창우 작품비평 전문

이 영화가 스릴러인 이유는 예고된 살인과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객주와 그의 가족이 처형당한 방식 그대로 객주를 밀고한 자들이 죽어간다. 객주는 중인 계급으로 한지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부르주아다. 그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사대부 귀족 계급과의 갈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지절단으로 객주가 죽어가는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나, 영화의 절정에서 공장 시설인 도르래를 사용하여 사지절단시키려고 하는 장면은 중심적인 볼거리다. 이야기상으로는 하나의 잔인한 처형 방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단연 관객을 가장 몰입시키고 무섭지만 매혹시키며 반복이 주는 강박의 지점이다.

<혈의 누>
<혈의 누>

신체의 파편화는 근대의 속성을 잘 함축한다. 이성적 합리주의는 모든 것을 구획하고 이산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진보를 자랑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통합되고 유기적인 것이 해체되는 아픔과 상실감을 의미하며 결국에는 일종의 도착적인 강박의 형태로 그것을 메우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것이 괴물이 된 채 귀환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근대의 상징인 객주의 사지가 ‘파편화’하고 김인권이, 수사관들의 기대를 엎고 과학적인 공장 시설을 이용하여 두호를 사지절단하려는 것은 이러한 근대화의 속성과 일치한다. 이 형벌에서 야기되는 피는, 매혹적인 고통으로 관객을 빨아들임과 동시에 영화적 허구의 단절로 인한 황당함을 경험케 한다. 허구의 단절이란, 그토록 근대적인 매혹의 표상들이 주술적이고 환상적인 파국으로 점핑하기 때문이다. 객주의 영혼은 섬의 물에 비린내가 나게 한다든가, 피의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주민들이 살육을 자행하도록 광란으로 내몬다. 이것은 실제 세계에서 근대가 가지고 있는 그 이면, 불가능과 상실의 측면을 이성 밖의 세계 곧, 환상의 형식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밀고자인 두호의 특권적 위치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엔 멜로와 계급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범인과 예정된 마지막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은 수사의 관건이자 이 영화의 반전이다. 사대부의 아들인 김인권이 오히려 부르주아인 객주를 대신해 복수하는 범인이었으며 객주가 “아들처럼 키웠다”는 한지공장 노동자 두호가 객주를 밀고한 마지막 살인 표적이었다. 이런 역전은 잠시 관객을 착란시키지만 그 이면에는 남녀간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자유연애라는 근대적 행동을 통해 김인권은 객주의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두호가 객주를 배반하게 된 계기는 객주의 딸을 겁탈하려 한 것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객주가 두호를 아들처럼 키우고 가르쳤다는 것은 노사간 가족적 관계의 집약이다. 겁탈 오인 사건으로 두호는 객주로부터 린치를 당함으로써 자신이 객주의 ‘아들’이 아닌 피고용인임을 알았다. 하지만 봉건적 지배자와는 달리 근대적 경영자인 객주는 노동자를 무차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자본가는 노동자와 함께 직접 생산에 참여하여 생산 체계 안에서 분업의 일익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객주가 그를 감금한 것에 사과를 하고 이어서 두호가 벙어리가 된 것은 이러한 현실, 말하자면 근대 내부의 계급 관계에 대한 자각을 상징한다.

5명의 밀고자 중 4명은 전근대적인 사대부의 끄나풀이었고 객주 영혼은 김인권을 통해서 이들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순번이었던 두호를 살해하는 데 실패한 사건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근대가 자기 내부에 만들어낸 ‘아들’에 의해서 공격당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근대의 전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과거의 지배 계급이 아니라 근대 자체가 속성상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자기 무덤이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린 피의 비 즉, 혈의 누가 무엇인가가 좀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주술적인 축제로서 비를 맞는 섬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체에 내리꽂히는 객주의 응시를 믿게 만드는 힘이다. 외견상 대단히 마술적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현대적인 전체주의 체계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전제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부재한 신으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시선을 느낀다. 존재하지 않는 억압에 반응하는 피해망상 히스테리, 그것은 결국 객주에 반항한 두호를 죽인다. 객주의 노동자들에 다름 아닌 섬 주민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처벌함으로써 또 다른 히스테리의 원인을 만든다.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에서 비롯된 광란적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그림엽서의 아름다움에 깃든 폐쇄적 숙명론

감독론 요지- 세계를 말의 체계로 고체화하는 장이모식 형상화의 함정

장이모 영화 화면의 깔끔한 선과 면은 우리에게 그림엽서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잘 정돈된 기하학은 “비동등성의 비율을 가르치기 때문에 권력 관계에 알맞다”(푸코). 그의 작품들에서 모든 ‘보이는 것’ 즉, 빛, 에너지, 물질의 세계는 ‘말’의 전통에 의해서 선과 면으로, 다시 말해 폐쇄적인 숙명, 비율의 체계로 고체화한다.

<영웅>
<귀주 이야기>

<붉은 수수밭>에서 권력의 문제는 빛의 공간과 언어의 공간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화학반응 같다. 시선의 분배가 평등한 수수밭은 빛으로 충만한 무한 평면이며 비수수밭은 봉건주의와 일본제국의 언어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권력을 균열없는 공간 사이의 외접이 아니라 편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국두>부터다. 여기서 장이모는 말의 측면에서 ‘종법’이, 이것과 전혀 기원을 달리하는 물질적 상황인 공장 및 침실의 전통과 어떤 식으로 마주치는지를 묻는다. 남녀주인공은 종법이 지배하는 외부 세계와 대치하지만 정작 권력은 내부 한가운데서 말의 기운으로 (그들의 아들로) 발화한다. <홍등>에서 진 대감의 보이지 않는 얼굴은 옥상 처형대의 비가시적인 암흑이자, ‘가풍’이라는 말의 전통을 조직하는 삭제된 중심이다. 빈 중심과 동어반복을 원리로 한 가풍은, 홍등과 처형대를 두 초점으로 하는 빛의 타원와 포개져 있다. 조명받아야 살아남는 이 암흑의 감옥에서 부인들은 현실과 가상을 오가고,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의 체계로서 타원의 여백을 채운다. <귀주 이야기>에서 말의 전통은 도시의 법률기관으로, 노동과 성의 흐름은 촌락 공동체로 치환된다. 영화의 결론부에서 도시와 농촌을 잇는 그 난삽한 길들의 망은 뫼비우스 띠라는 세련된 폐곡선임이 판명난다. 길의 안팎 즉, 자본주의적 풍경화로서 물리적 길과 귀주를 도와줄 ‘군주’를 향한 법률적 길은 교묘하게 뒤집혀 있기 때문에 촌락 문화의 추동력은 자기 자신에 대한 법률적 제단으로 소외된다. 말과 물질의 한판 대결을 최대의 스펙터클로 펼쳐낸 <영웅>에서 장이모는 전자에 민족국가를, 후자에 심오하고 광대한 우주를 대응시킨다. 이 두 계열은 호응하여 ‘삶의 비인격성’이라는 주제를 생성한다. 가령 세 가지로 변주되며 스스로 만들어지는 이야기 자동기계와 종복들의 코러스 같은 ‘익명의 웅얼거림’, 화살, 검 같은 군사적 도구로 전치되는 말과 우주의 표상들이 그 예이다.

이런 설득의 함정은 장이모가 오직 말과 상황의 투쟁을 오묘하게 형상화하는 데만 집착할 뿐, 말의 체계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변이에 대해서는 선험적으로 은폐한다는 데 있다. 닫힌 체계 안에서 말의 우위, 즉 비인격적 우주의 섭리를 강변하는 것은 끔찍한 운명론과 그 이면에서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데올로기로 귀결된다.

“디테일하고 정교한 분석을 하고 싶다”

우수상 수상자 이창우 인터뷰

우수상 수상자 이창우(41)씨는 스스로를 ‘음란서생’에 비유한다. 정치와 미학의 두 길 사이에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빗댄 표현이다. 64년생, 서울대 기계공학과 82학번, 전통의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일원이었다. 지인들의 명부를 봐도 문화예술계에서 웬만큼 알 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오랜 시간 노동운동 활동가로 살아왔고, 최근 몇년 사이 수유연구실을 거쳐 지금은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 3학기째에 다니고 있다. 특별히, 이창우씨는 이번 응모를 격려한 <아트 인 컬쳐>의 이은우 기자 외 원고를 읽어준 친구들에게, 그리고 학문적 조언을 아끼지 않은 영상이론과의 심광현, 박병원, 김소영, 최민 선생에게 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인터뷰 전에 잠깐 말을 들어보니 많은 경험을 한 것 같다.
=딱딱한 학생운동 시기 속에서 내 적성에 맞는 걸 찾다가 3, 4학년 때 영화동아리 얄랴셩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다.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얄라셩 동기들과 함께 시각매체를 통한 노동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93년까지 본격적으로 현장 및 언론을 통해 노동운동을 했고, 93년부터는 생업을 위해 학원 강사를 했다. 97년까지 하다가, 98년부터 2002년까지는 인터넷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벤처회사에서 일했다. 2002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진 작업을 해왔다. 전시회도 두번 열었다. 그 뒤로 다시 이론적인 욕심이 생겨 영상원에 들어갔다.

-장이모의 영화에 관한 이론비평을 제출했다.
=장이모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도식적이고, 좋게 말하면 이해하기 쉽다. <연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실망했지만, 장이모 영화가 가진 단순하면서도 압도적인 스펙터클이 현대영화를 일반화할 수 있는 모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갖고 있는 비평적 화두가 있다면.
=영화를 사회·역사적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보다는 작품 안에 숨어 있는 미학적 방식을 찾아내서 디테일하고 정교한 분석을 하고 싶다. 좀 모호한 말이지만, 이미지 자체의 연합과 충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효과에 관심이 있다. 결국은 영화를 내러티브나 미장센이나 유사영화에 대한 관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실존하는 작동이라고 본다. 그것들의 정치학이 따로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요즘 본 한국영화들 중에서는 어떤 것들이 흥미있었나.
=<시실리 2km>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또 <오로라 공주>에서 주인공이 딸 이름을 부를 때는 정말 많이 슬펐다. <달콤한 인생>이나 <복수는 나의 것> 등도 흥미롭다. 그러나 최근에 가장 흥미있었던 건 <음란서생>이다. 거기에서 나를 본 것 같다고나 할까? 정치적으로 패배한 비겁한 지식인이 그것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답시고 선택한 것이 야설이었는데, 그걸 열심히 하다보니 다시 권력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멋진 조언 같았다. 그 영화적 회로가 나를 감정이입시켰다.

사진 <매거진T> 이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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