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호프먼과 카포티 [1]
2006-05-31
글 : 김도훈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오랜 팬이라면 <카포티>와 <미션 임파서블3>를 동시에 보며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두 작품에서 호프먼은 지난 14년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이미지와 페르소나를 격렬하게 휘두른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여기까지 온 것일까. 과거의 그는 토드 솔론즈, 폴 토머스 앤더슨과 같은 명징한 재능의 신인들의 숨은 조력자였고, 앤서니 밍겔라와 스파이크 리와 데이비드 마멧의 사랑을 받는 재간둥이였다. 하지만 호프먼은 ‘누구나 얼굴은 알지만 누구나 이름을 아는 것은 아닌’ 배우였다. 스스로를 역할 속에 철저하게 숨기는 캐릭터 배우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포티>로 호프먼은 또 다른 경지에 접어들었고, 오스카의 후광은 그를 할리우드의 반짝이는 스타의 신전에 올려놓았다. 호프먼은 어떻게 37편의 영화를 거쳐 여기에 도달했는가. 그는 어떻게 근심하는 것을 그만두고 트루먼 카포티와 사랑에 빠졌는가. 우리 시대 위대한 젊은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에 대한 소고.

“다른 배우는 고려하지 않았다. 카포티는 필립이어야 했다. 그가 거절한다면 그걸로 영화는 끝이었다. 아니, 최소한 나에게만은 <카포티>라는 영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카포티>의 베넷 밀러 감독은 배짱 좋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그는 트루먼 카포티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외양을 비교해보기나 했던 것일까. 카메라를 선병질적으로 쳐다보던 깡마른 천재 문학가의 서늘한 눈매를 본 적이나 있었던 것일까. 밀러의 말은 도통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역시 오랜 친구 감독의 제안에 적지 않게 의아해했다. 그는 “왜 베넷이 대본을 보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카포티가 어떤 인간이며 왜 유명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나 카포티라는 인간에 대해 한번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호기심을 그다지 자극하는 종류의 인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프먼은 감독의 제의를 어떻게 하면 무례하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지 궁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러니, 호프먼이 예술가적 선각을 지니고 카포티의 영혼을 불러낼 준비를 시작했다고 짐작하는 것은 섣부른 추론이 될 터이다. 그가 <카포티>에 출연을 결심한 것은 대본을 몇번이나 읽고난 뒤였다. “예술가로서, 혹은 배우로서의 나에게, 그것은 다층적으로 매력적인 각본이었다”고 여긴 호프먼은 자신과 닮은 데라고는 창백한 피부밖에 없어 보이는 문학가의 전기영화에 비로소 뛰어들었다. 호프먼이 잘 만들어진 대본의 힘을 가장 신뢰하는 성실한 영화쟁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메소드 연기로 완성한 카포티

<카포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카포티>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가져간 지금, 그가 얼마나 훌륭하게 카포티를 재현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찬탄과 찬사 사이에서 질식한 단어들의 요동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 호프먼이 ‘어떻게’ 카포티의 가죽을 뒤집어쓸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카포티>는 사실 평범한 전기영화는 아니다. 무례하게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트루먼 카포티라는 당대의 거물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명성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인간을 이용해먹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카포티는 일가족을 몰살한 두명의 살인범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생전처음 논픽션을 써보자 마음먹는다. 두명 중에서도 나약한 성격을 가진 놈을 구슬린 그는 거짓 동정과 이해를 얼굴에 두르고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듣고자 애쓴다. 일은 카포티의 의도대로 흘러가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카포티가 페리와 이상한 우애(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페리가 사형을 당해야만 카포티는 책을 완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카포티>는 전기영화가 아니다. 한 인간의 도덕적 결함과 천재성과 야비함을 모조리 속으로부터 까뒤집어 건드리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초상이다.

호프먼의 접근 방식은 완벽할 정도로 정나미 떨어지는 메소드 연기다. 그는 카포티가 살인범들을 이용했던 것이냐 아니냐는 근원적 질문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그를 ‘연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개인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 대해서 생각할 여력도, 필요도 없다. 나는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대본에 쓰여진 카포티의 눈을 통해서 보기만을 시도했다.” 그는 카포티가 책을 쓰기 위해 살인범들을 이용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금했고, “카포티의 삶을 통과하기 위해 그의 행동을 그대로 정당화”해버렸다. 그런 방식을 통해 호프먼은 스스로를 <인 콜드 블러드>를 쓰던 시절의 카포티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원한 것이 몸무게를 줄여 카포티의 나긋나긋한 디오니소스적 형체에 가까워지는 것만은 아니었음이 당연하다. 호프먼은 어떤 압도적인 힘이 카포티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를 몸으로 체감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촬영 내내 카포티로 머물렀다. “나는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기도 두려웠다. 이 영화는 마치 운동경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레이스 도중에 멈추고 다시 뛰기란 힘들다. 만약 내가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카포티로 돌아오는 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호프먼은 “나는 페리를 이용하는 동시에 그와 사랑에 빠졌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고 반문하는 영화 속 카포티처럼, 카포티를 메소드로 이용하는 동시에 카포티라는 속물과 고통스러운 사랑에 빠졌다. 무시무시한 여러 겹의 메소드 연기였다.

<카포티> 이전의 호프먼, 익명의 캐릭터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비평가와 관객에게 한결같이 사랑받아온 배우다. 그러나 <카포티> 이전의 호프먼은 <카포티> 이후의 호프먼이 아니다. <카포티> 이전의 호프먼은 이름이 없는 캐릭터들의 집합체였다. 그 시절의 인터뷰나 외신 기사들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한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결코 할리우드식 취향으로 잘생긴 배우가 아니다.” 혹은 이렇게도 시작한다. “사람들은 호프먼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기자들은 글의 결말을 호프먼의 연기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지으며 그의 익명성을 찬양한다. 호프먼은 그런 배우였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도통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 약간 과체중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붉은 머리의 조연배우였다. 그리고 그의 캐릭터들은 세상으로부터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애초에 진가라는 것이 없거나, 혹은 스스로 진가를 인정받을 길을 포기한 패배자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포르노 배우 딕 더글러에게 연정을 고백하고는 “이 병신 같은 쪼다새끼야!”라며 자학하는 <부기 나이트>(1997)의 러스티, 라라 플린 보일에게 음란전화를 걸며 벽에다 자위를 하는 <해피니스>(1998)의 알렌, <매그놀리아>(1999)의 남자 간호사, 호모포비아인 전직 경호원 로버트 드 니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플로리스>(1998)의 야단스러운 드랙퀸 러스티. 호프먼은 무력하고 창백하고 힘없는 뚱보 패배자의 역할을 위한 몸을 타고난 듯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을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부기 나이트>와 <해피니스>가 호프먼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호프먼의 정서는 상업영화의 자장 속으로 슬며시 들어오면서 조금 발전했다. 이 시절 그의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들은 도통 세상에는 관심없는 듯한 고집스럽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올모스트 훼이모스>(2000)의 전설적 록평론가 레스터 뱅스, 등장하는 순간마다 맷 데이먼과 주드 로의 광채를 앗아가는 <리플리>(1999)의 프레디, 손에 피자 기름을 칠칠치 못하게 묻히고 다니는 <폴리와 함께>(2004)의 샌디. 물론 호프먼의 캐릭터들은 여전히 ‘호프먼적’이라고 할 만한 특정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칠칠치 못하고 자유로운 당신의 평범한 친구가 지닌 종류의 아우라였다.

한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에 갇힌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캐릭터에 자신을 감추는 호프먼의 재능은, 오히려 캐릭터 배우라는 또 다른 제한에 갇혀 스스로의 비범함을 드러내기가 힘든 종류이기도 하다. 그래서 1998년의 한 인터넷 잡지기사에는 “그에게서 단 한 가지의 인상적인 역할을 골라내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결코 주연배우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는 세 단락으로 나뉜 기억하기 힘든 이름을 갖고 있다. 만약 그가 ‘필립 S. 호프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만 했더라도, 적어도 새뮤얼 L. 잭슨의 위치 정도에는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안타까운 풍자로 호프먼을 설명하려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못 알아보는 남자였다. <위대한 레보스키>(1998)의 오디션에 대한 코언 형제의 기억 또한 이를 잘 대변한다. “우리는 호프먼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부기 나이트>도 보지 않았다. 호프먼과의 오디션이 끝나고, 또 <부기 나이트>를 챙겨 보고나서, 우리는 두개의 완전히 다른 퍼포먼스가 그렇게 연이어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처럼 다를 수가 있을까. 그러다가 우리는 그를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뷔작) <하드 에잇>(1996)에서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심지어 그 배우가 호프먼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다.” 호프먼은 “세상에는 캐릭터가 뭐든지 간에 항상 배우가 보이는 위대한 배우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다른 역할들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내가 아닌 캐릭터만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간절히 말하는 남자였다.

<카포티>
<카포티>

하지만 최근 몇년간의 인터뷰에서 호프먼은 자신에게 덧입혀진 ‘보이지 않는’ 이미지에 조금 싫증을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카포티> 이전에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캐릭터 배우로서 남아 있는 것이 더 행복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캐릭터 배우와 이름있는 배우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캐릭터 배우란 그저 역할을 잘 소화해낸 배우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게 다다”라고 답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처럼 고정된 이미지가 없는 캐릭터 배우에게 주역이 주어지는 일은 잘 없지 않냐는 질문에는 목소리를 높여 항변했다. “그건 그들이 캐릭터 배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할리우드가 주사위를 던져서 배우를 주연으로 고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들일 뿐. 제발 캐스팅이나 제대로 하고 나서 좋은 영화나 잘 만들어라. 제기랄. 뭐가 문제냐.” 호프먼은 스스로의 이미지를 사랑했지만 엉클어진 패배자의 정서와 자유로운 영혼의 이름없는 결합체로만 머무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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