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집 앞 튀김가게 벽에 동네 극장의 영화 포스터가 걸렸다. 하얀 모자에 하얀 양복, 그리고 하얀 백 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고, 사나이의 백 구두 아래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로 <실록 김두한>이라고 써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나는 버스 정류장의 가판대에 진열되어 있던 ‘나는 참회한다. 주먹 천하 유지광’이나 ‘주먹 황제 시라소니’ 같은 성인 극화들을 통해 일제시대의 조선 주먹사를 어느 정도 꽤 뚫고 있었고, 외로운 늑대, 시라소니의 팬이 되어 있었던 터라 일주일간 그 포스터 앞을 오가면서도 영화를 꼭 보리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며칠이 지나자,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실록 김두한>을 보고 골목길에서 주먹질 흉내를 내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나쁜 놈들이 허장강을 죽이는데 펜치로 살을 뜯어서 죽인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펜치로 뜯어서 죽이다니! 무관심하던 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영자의 전성시대>의 염복순과 서미경이 출연한다는 말은 결정타가 되어 나의 마음을 흔들었고 결국 극장 안으로 발길을 향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박노식의 빈자리를 채우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던 서미경은 별로 나오지도 않았고, 펜치로 허장강을 뜯어 죽이는 장면도 맨살 위에 가짜 피가 드문드문 잉크로 발라놓은 것 같아서 그냥 그랬지만, 나는 용팔이 박노식 이후에 새로운 주먹 이대근을 만나게 되었다. 눈에 안대를 하고 애꾸눈 박을 흉내내고, 전라도 사투리로 ‘아이고, 내가 목포서 올라온 용팔인데 말이시’ 하며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았던 나에게는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액션영화의 남자배우는 단연코 박노식이다. 박노식 이전에 주먹없고, 그 이후에도 없다. 박노식에게는 잔인한 주먹을 숨긴 초라한 룸팬 프롤레타리아라는 다른 배우들에게는 없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눈, 끊어치는 재빠른 주먹으로 무장한 박노식은 용팔이라는 개과천선한 깡패가 비굴한 성실함으로 세상과 부딪치는 <속 팔도 사나이> <방범 대원 용팔이> 같은 왼손 잽과 항상 신체가 훼손되어 복수의 악령으로 귀환하는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인간 사표를 써라> 같은 오른손 스트레이트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방범대원 용팔이>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를 마지막으로 박노식은 여러 가지 이상한 소문만 횡행한 채 거짓말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세상은 바뀌고, 액션 황태자가 사라진 이제 젊은 누군가가 새로운 액션을 해야 했다. 이때 <실록 김두한>이란 영화로 등장한 사나이가 바로 이대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실록 김두한>의 새로운 액션배우 이대근은 내 마음속의 박노식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그냥 재미있는 액션영화였어’라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실록 김두한>의 속편 <협객 김두한>이 나오자 나는 아무 생각없이 또 보러 갔고 이대근이란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당인리의 공터 어디에서 독고성과 결투를 벌이는 이대근의 활기 가득한 액션을 보고 그가 박노식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리부리한 눈이나 덩치는 박노식쪽에 닮아 있었지만, 눈을 내리깔고 회한에 잠길 때면 장동휘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특히 검은 가죽장갑을 낀 주먹의 손등으로 상대방을 돌려칠 때나, 냉정한 얼굴로 일제에 영혼을 팔아먹은 사나이 독고성의 주먹을 망치로 내리칠 때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잔인함 같은 것은 박노식보다는 장동휘에 더 가까웠다. 김두한 시리즈를 만든 김효천 감독이 <팔도 사나이>란 영화로 처음 김두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때 김두한 역은 장동휘였고, 이대근 역시 같은 캐릭터를 같은 감독의 연출로 연기했으니,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깡패들의 쓸쓸함과 개과천선한 깡패의 비굴한 성실함을 보여주던 박노식이나 냉혹한 악종의 카리스마 장동휘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젊은 파워와 악종 같은 뻔뻔스러움은 이대근만의 매력이었다. 김두한을 연기한 <팔도 사나이>의 장동휘는 수호지의 두목 같이 아우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노회한 깡패였지만, <실록 김두한>의 이대근은 왕을 아버지로 두고,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지옥을 여행하는 젊은 테세우스 같은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김효천의 김두한 신화 만들기에 이대근이야말로 적역이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김두한과 서대문 일번지> 같은 김두한 시리즈와 <거지왕 김춘삼> <제3부두 고슴도치> <오륙도 이무기> 같은 이대근이 출연한 깡패영화들을 빠지지 않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뭐, 이대근의 열렬한 팬이 되어서라기보다는 홍콩 권격영화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의 진한 땀냄새가 나는 영화들이 70년대에 만들어진 깡패영화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 액션영화들은 이두용 감독의 태권도영화들과 한국 사람이 중국 옷을 입고 나와서 어설프게 홍콩 액션을 따라하던 짝퉁 권격영화, 왠지 속는 것 같은 느낌을 주던 한·홍 합작영화들, 그리고 의리의 협객으로 포장한 깡패영화들이 있었다. 어깨에 힘을 준 밑바닥 남자들이 의리와 정의를 입에 달고 다니며 70년대 남성들의 결핍을 드러내고, 잘 짜인 합에 의한 액션이 아니라 그냥 주먹으로 치고받는 어지러운 액션이 가난하고 척박한 70년대 깡패영화만의 매력이었다.
진정한 밑바닥 깡패의 페이소스 부활
김두한 시리즈가 5편까지 나와 시들해질 무렵, 아주 재미있게 본 이대근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제3부두 고슴도치>와 <오륙도 이무기> <삼룡이라 불러라> 등이었다. 여기서 이대근은 어깨에 힘을 주고 눈을 부라리는 그런 연기를 하지 않고 밑바닥 깡패로 나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김두한이나 김춘삼, 시라소니 같은 두목급의 깡패 역은 아무래도 품위를 유지해줘야 했지만, 이름없는 깡패 역은 그에게 자유로웠을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박노식 이후 진정한 밑바닥 깡패의 페이소스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고래사냥>을 보고 나는 이대근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대근은 자신이 주연이 아닌 영화를 보고 그의 팬이 되기로 했다고 하면 싫겠지만, 조연으로 나와서 감히 범접 못할 밑바닥 악당을 연기하는 그를 보고 바로 저거야 했다. 지금까지 그가 연기했던 어떤 멋있는 역보다도 <어둠의 자식들>에서의 포주 역할이 그에게 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년 뒤 나온 <뽕>에서의 이대근은 정말 최고였다. 힘 좋은 머슴으로 나와 끓어오르는 성욕을 어쩔 줄 몰라하며 “왜 나만 안 주는 거야!” 하며 펄펄 뛸 때 난 이대근에게 뒤집어지고 말았다. 정점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그 이후 그가 출연한 너무나 많은 싸구려 에로물들은 나로 하여금 액션 황제 이대근을 잊게 만들었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70년대 중반 LA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액션 황태자 박노식과 떠오르는 액션의 신성 이대근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한국에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출연 정지를 당하고 타국으로 이민가던 액션 황태자 박노식은 씁쓸한 기분이었겠지만, 떠오르는 액션 스타 이대근이 인사를 하자, 여러 가지 회한을 털어내던 중 “대근아 너 내 주먹에 한번 맞아다오”라고 했단다. 자기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역시 사나이 박노식답다라는 생각을 했고, 신인 때부터 한국 액션배우는 박노식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이대근 역시 약속을 지켜 박노식의 <돌아온 용팔이>에 출연하게 된다.
몇년 전에 친구와 술을 먹고 광화문 네거리에 나섰는데, 연말이라 거리의 불빛이 매우 좋았다.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우리 기분도 좋은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 한방씩 때리고 헤어지자”고 해서 한순간 술이 확 깨며 등에 식은땀이 흘렀던 기억이 있다. 애정 표현을 꼭 주먹으로 살과 살을 맞대고 싶어하는 늙은 사나이들의 세계. 나는 이대근이 그런 세계의 마지막 배우이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