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엑스맨> 카운슬러의 임상 노트 [1]
2006-06-13
글 : 김혜리

내 이름은 프시케. 슈퍼히어로들의 정신적 문제를 상담한다. 원래는 뉴욕에서 개업하여 일반인을 치료했지만 찜질방 드나들듯 뻔질나게 드나들던 우디 앨런이라는 환자한테 거꾸로 불안장애를 얻은 뒤 심각한 회의를 느껴 좀 더 한가하고 흥미로운 일을 궁리하게 됐다. 나는 운이 좋았다. 마침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는 심사가 뒤틀려 며칠씩 호출에 답하지 않는 슈퍼히어로들 때문에 고심 중이었고 나는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특별한 고객들에게 명함을 돌릴 수 있었다.

예상대로 1980년대는 내내 한가했다. 이따금 슈퍼맨/클라크 켄트 기자가 마감 스트레스를 호소해왔지만, 그쯤이야. 하지만 1989년 팀 버튼이라는 감독이 고객들의 클럽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계기로 내 일은 급증했다. 주인공 브루스 웨인의 다중인격장애만 해도 일이 한 보따리였는데 그의 적수인 노출광 조커(잭 니콜슨)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펭귄(대니 드 비토)에다가, 열등감과 사도마조히즘 사이를 왕복하는 캣우먼까지 대기실이 와글와글했다.

그러나 2000년 떼지어 등장한 엑스맨들은 내게 여생을 보낼 장소를 알려주었다. 손에서 검이 솟을 때마다 고통을 느끼는 울버린(휴 잭맨)을 비롯해 능력이 상처를, 상처가 능력을 낳는 그들은 차라리 걸어다니는 (혹은 날아다니는) 고뇌와 콤플렉스의 편람처럼 보였다. 엑스맨의 엑스(X)는 혹시 ‘불안’(Anxiety)의 ‘X’가 아닐까. 스파이더맨, 헐크, 블레이드, 헬보이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뉴욕 근교에 자비에 교수가 차린 돌연변이 영재학교의 상담교사로 지원했다. 내가 재직하는 동안 자비에 교수와 학생들은 많은 일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돌연변이 ‘치료제’의 개발은 크나큰 사건이었다. 돌연변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 박해받는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인가, 개성을 폐기하고 ‘다수’에 편입할 것인가. 당사자의 철학을 기준으로 ‘치료제’는 프로작도, 독약도 될 수 있었다. 다음은 영재학교에서 상담하고 관찰하며 기록한 몇몇 돌연변이에 대한 노트다.



엔젤은 알바트로스처럼 순백의 큰 날개를 지닌 눈부신 청년이다. 그가 정오의 태양처럼 내 방에 들어선 첫날 엔젤의 날개는 마구(馬具)와 같은 험악한 재갈에 물려 있었다. 엔젤의 아버지가 아들의 ‘장애’를 감추기 위해 고안한 액세서리로 추정된다. 천정화에 그려진 천사의 날개를 뭇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찬미한다. 그러나 다른 인간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그들을 소름끼치게 만든다. 제약재벌인 엔젤의 아버지 워런 워딩턴 2세도 돌연변이 아들을 천형(天刑)으로 여겼다. 그래서 돈과 힘을 동원해 돌연변이 유전자를 영구히 제거하는 ‘치료제’를 개발해, 엔젤을 비롯한 전세계 돌연변이를 교정하려고 나섰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로렌조 오일>의 부모 같은 처지로 오해한 것 같다. (※ 1) <엑스맨2>의 데스스트라이크 장군의 파일을 참조할 것. 데스스트라이크도 돌연변이 아들 제이슨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다시피 했음. 2)성적 소수자를 자녀로 둔 극우 보수파 성향 가부장의 행동양식 연구와 비교할 것)

엔젤의 날개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다. 어린 시절 주변의 혐오반응이 야기한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날개를 잘라내고자 끔찍한 자해를 저지른 듯하다. 그러나 그를 해방시킨 것은 결국 날개였다. ‘치료제’를 강제로 접종받기 직전 엔젤은 날개를 펴고 마천루에서 탈출했다. 조류와 같은 방식으로 호흡하고 속이 빈 골격구조를 타고난 엔젤은 바람의 품에 안긴 순간 지고의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이 연약해 보이는 청년의 날갯죽지가 대단히 강인하다는 점도 내겐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날개는 본인 체중의 몇배를 실어 나를 수 있다. 비밀이지만 나는 그를 처음 만난 날 재갈에 결박된 엔젤의 날개를 카메라로 찍어두었다. 언젠가 이 노트를 출판한다면, 그 사진을 표지로 쓰고 싶다.


이 아가씨는 나의 가장 난해한 케이스다. 로그 본인이 자신에게 점지된 능력은 저주에 가깝다고 믿고 있으며, 동료들도 내심 동정하는 눈치다. 그녀는 인간과 피부 접촉을 할 경우 생명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상대가 돌연변이일 경우 능력을 흡수한다.

키스를 나눈 첫사랑 인간 소년이 가사상태에 빠진 사건을 계기로 영재학교에 입학한 로그는 회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이스맨과의 사랑은 로그에게 다시 지옥을 선사했다. 입맞춤도 맨살의 포옹도 섹스도 금지된 채, 남자친구의 눈길이 다른 소녀에게 머무는 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로그가 본인의 욕망보다, 남자친구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커플 카운슬링에서 아이스맨은 “내가 불평한 적 있니?”라고 반문했지만, 로그는 “넌 남자잖아. 그 문제만 계속 생각할 거야!”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로그는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아이스맨은 문제를 그녀만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 로그에게 아이스맨과의 관계는 자기 존재의 일부지만, 남자들이 그렇듯 아이스맨에게 연애 관계와 자신은 분리돼 있다. 그는 발전하는 초능력이나 인생의 다른 재미에 쉽게 주의를 돌린다. 본인의 초능력이 실전에서 즉각적으로 무기가 되지 못하는 점도 로그의 자괴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남들은 액션 어드벤처라지만 저는 격투 한번 못해봤어요. 가진 거라곤 장갑 한쌍(동료를 보호하기 위한)뿐이라고요!” 하지만 로그의 잠재력은 미지수다. 접촉을 통해 타인의 힘을 자기 안에 조금씩 축적하고 있을 이 아가씨의 비밀스런 방 안에서 무엇이 완성되고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로그(안나 파킨)를 사이에 둔 파이로(아론 스탠퍼드)와 아이스맨(숀 애시모어)의 경쟁은, 파이로가 매그니토의 부하로 변신하기까지 캠퍼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제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이스맨과 파이로는 묘하게 붙어다녔다. 아마 상대가 자신의 보완재라는 면을 무의식적으로 알았으리라.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불씨나 수분의 크기와 방향을 조작해 무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둘의 초능력은 거울상이다. 그러나 아이스맨에게는 로그의 사랑 말고도 자산이 있다. 친밀한 가족 경험이다. 물론 <엑스맨2>에서 보듯, 그의 부모형제는 돌연변이 아들을 내쳤다. 하지만 가족애의 희미한 추억조차 없는 파이로는 아이스맨의 집을 방문한 뒤, 그가 아이스맨과 같은 무리에 속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한 듯하다. (※ 평화공존주의자 자비에와 적자생존주의자 매그니토의 과거 자료를 ‘아이스맨-파이로’ 파일과 비교할 것.)

결국 가족에게 버림받았지만 행복한 유년의 기억의 여운은 강력한 것일까? 아이스맨은 조숙한 유형은 아니지만, 잘 통합된 퍼스낼리티를 지녔다. 위기에도 쉽사리 극단적 결론을 내지 않아 싸움을 겁낸다는 빈정거림을 사기도 한다. 벽이며 담장이며 성할 날이 없는 이 학교에서 이만큼 온건한 학생도 드물다. 그는 물의 영웅답게 천천히 흐르며 발전한다. 전투력도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 와서야 자리를 잡았다. 피부 접촉이 불가능한 애인의 불안에도(☞로그의 노트 참조), 아이스맨은 사춘기의 성적 에너지를 다스리는 문제에도 느긋한 표정이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푼다. 식은 맥주를 급속냉각시켜준다거나-월드컵 시즌에 인기폭발이다-, 고향의 겨울을 그리워하는 소녀를 위해 호수를 빙판으로 바꿔준다거나(당연히 애인의 분노를 샀다). 돌연변이 치료제의 등장 소식을 들은 이 청년의 반응은 인상적이다. 그는 “이제 진짜 전쟁이군요. 무엇이 옳은지 진정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아직 미숙하지만 이 청년은 대단히 미덥다. 자비에 교수는 아이스맨이 얼음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의 한계는 순전히 본인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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