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9회 칸영화제 총결산 [3]
2006-06-09
글 : 이다혜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혁명은 부족하나 너무 화사한

5월24일에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상영은 야유와 박수소리의 불협화음으로 요란했다. 한편 5월26일자 <필름 프랑세>와 <스크린 인터내셔널>에는 그때까지 상영된 그 어떤 영화들에 주어진 것보다(게다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의 영화에 쏟아진 것보다) 많은 최고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 쏟아졌다. 평점은 최고가 아니었지만 최고점을 준 사람은 가장 많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닥난 국고, 무의미한 해외에서의 전쟁, 극심한 가난 등으로 성난 군중에게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한국에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로 알려진 바로 그 말)를 했다는 일화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사치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던 민중 봉기의 합당한 대의명분하에서 참수형을 당한 프랑스의 왕비였다. 영화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을 장식한 이 여인이 1770년,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위해 고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이 소녀는 뒤에 루이 16세가 될 루이 오귀스탱과 결혼하는데, 그녀보다 한살 많은 남편은 어쩐 일인지 이 소녀에게 도통 관심이 없다. 소녀의 고향에서는 어머니의 편지가 날아든다. 고국을 위해, 그리고 너 자신의 안녕을 위해 남편과 잠자리를 하라는 어머니의 끈질긴 충고를 따라 남편을 유혹하려는 어설픈 시도가 잇따라 불발되자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24시간 파티 피플’과 같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려한 생활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소피아 코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휩쓸린 인물을 그리는 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 즉 개인사와 역사를 번갈아 보여주며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코폴라는 또한, 허영심이 많고 공허해 보이는 인물에게 사실은 인간적 고뇌와 싶은 생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리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영화는 궁정 생활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최소한의 대사만으로 ‘전해’준다. 프랑스에서 이런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 코폴라가 무모해 보일 정도로 대담한 생략이다. 폭도가 베르사유로 들이닥치는 대목을 제외하면 지금 영화가 그리는 곳이 과연 혁명 직전의 들끓는 프랑스 수도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 유명한 목걸이 도난사건이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장면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Paris)보다 패리스(Paris) 힐튼을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티와 드레스와 구두에 열광한 한 여인의 초상일 따름이다.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 역사적 인물이 자신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지 못한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밖의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코폴라의 단호한 태도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받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비난이 애초의 연출의도가 아니었음에 방점을 찍었다. 코폴라는 재해석 아닌 재해석을 시도했다. 사치와 무지라는 단어들 속에서 평면적 인물로 그려져온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 사실 그대로, 대신 현대적인 느낌으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칸에서의 상영 뒤 역사적 (재)해석을 원하는 목소리와 있는 그대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당하게 치켜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칸영화제 반응의 불협화음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극과 극의 반응을 미리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색깔의 당의가 입혀진 케이크를 고급 제과점 창문 너머로 훔쳐보는 듯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엇보다 그 스타일로 기억될 것이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구두, 드레스, 파티, 사랑하는 남자와의 밀회, 현대에 속한 것이지만 또한 당시에도 존재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10대 소녀의 영혼도 뒤흔들었을 록음악…. TV를 통해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데 익숙한 오늘날의 소녀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너무 달착지근하고 혁명은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다. (극장에 올 때) 편견은 문 앞에 두고 와라”라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리뷰만큼 이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해줄 적합한 조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드리안 카에타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

음울한 독재시대의 숨막히는 탈출기

백열등이 켜진 작은 욕실 한구석에는 욕조가 있고, 그 옆에는 양변기가 있다. 욕조 앞에 양팔이 등 뒤로 묶인 젊은 남자가 상체를 벗은 채 서 있고, 그 주변에 옷을 다 입은 남자들이 떼지어 서 있다. 이 장면의 설명만으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을 지배하는 시대의 분위기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독재, 반정부운동, 민간인 납치, 고문, 감금…. 칠레, 아르헨티나와 같은 국가들과 한국이 현대의 군사정권 암흑기에 경험했던 민중잔혹사의 일부를, 이스라엘 아드리안 카에타노 감독은 실제 사건을 다룬 책 <프리 패스>(클라우디오 탐부리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로 그려냈다. 카에타노 감독은 제작자로부터 18살에서 20살 된 젊은이들이 발가벗은 채 밤의 거리를 달려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미지에서 출발해 영화를 만들었다. 군부독재 시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젊은 세대의 관점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1977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2부 리그 축구팀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는 클라우디오는 대낮에 납치당한다. 클라우디오는 곧 자신을 납치한 게 군부 정치 세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무죄를 호소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게다가 클라우디오는 감금된 저택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클라우디오는 자신이 누명을 썼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친구가 누군지까지 알게 되지만 결백을 인정받는 대신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댈 것을 강요당한다. 발가벗겨진 채 감금된 생활을 하던 클라우디오는 살아서 저택을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같은 방 사람들 셋과 함께 저택에서 도망가기로 마음먹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은 정치적 상황을 그린 드라마인 동시에 탈옥영화다. 칠레 군사정권의 폭압적 사회에서 납치된 한 미국 남자를 찾기 위해 그의 아내와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일을 차분한 시선과 아름다운 선율로 그린 코스타 가브라스의 <의문의 실종>이 지닌 음울함과 <빠삐용>의 스릴이 공존하는 것이다. 영화는 당시 사회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초반의 자막과 인물간의 자명한 관계를 통해 분위기를 확인시킨 뒤 탈주의 긴장감을 숨막히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일도 영화 속 탈주처럼 시간을 두고 때를 기다려야 가능했다. “2, 3년 전에는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한 행운이 영화 제작을 도왔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에서 이 주제를 자연스럽게 말하는 일은 아직도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카에타노 감독의 말은 아르헨티나 사회가 영화 속 1977년 상황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를 불렀는데 이는 단지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두 시간 동안 잡아두고서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당신들 덕분에 영화를 봤던 내 부인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시 3만8천명이 실종되었지만 아직까지 소송조차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으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감독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의 제작이 지닌 의미는 각별했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부문 시선에 먼저 초청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부문에서 상영된다는 통보를 받는 기쁨을 누렸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 출연했던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의 연기는 이야기에 사실감을 더했고, 이십세기 폭스는 이 영화의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 판권을 구입함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케팅을 책임졌다. 실화의 힘과 조마조마한 이야기 전개 덕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은 자국에서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칸에서의 반응 역시 고무적이어서 웨인스타인 컴퍼니는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의 영화 배급권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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