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과 <시간> [2]
2006-06-14
글 : 안드레아 벨라비타 (이탈리아 평론가)
갈등과 불협화음의 작가

벌어진 틈새 위에 존재하는 김기덕의 작품세계

“김기덕 시스템”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김기덕은 이렇게 대답한다. “시스템 같은 것은 없다. 나는 물이다… 나는 단지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김기덕 영화의 힘은 특유의 내러티브와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회화적 “물방울”에 있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이름과 얼굴은 바뀌지만, 동일한 정체성을 갖는다. ‘김기덕 워터 시스템’(김기덕이 “나는 물”이라고 말한 것에 빗대어 “물방울”과 “water system”이라는 표현을 썼다)은 테마적인, 그리고 시각적인 두개의 층으로 짜여진 조직이다. 첫 번째 층은 김기덕 영화의 이야기와 인물을 형상화하는 혼돈스러운 배경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몇개의 강력한 핵심들은 언제나 변증법적이고 상호 대립하는 두 요소들간의 관계로 쪼개어진다. 그의 영화세계는 많은 방들- 수많은 프레임들이 영화를 채우듯 각각 수많은 그림들로 가득 찬-로 구성된 하나의 회화적 집합체이다.

성적 행위와 폭력으로 나타나는 갈등

김기덕은 갈등의 작가다. 내면의, 성(性)의, 관계의 갈등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갈등. 이러한 갈등 중에서도 그의 작품 속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이며, 그 관계는 매번 에로틱한 성적 관계와 물리적 갈등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김기덕의 영화 속에서 결국 동일한 것이다. 성적인 행위와 폭력은 언제나 동시에 발생하며, “훔친” 성적 행위(성적인 폭력, 매춘)와 “처벌받는” 성적 행위(로맨틱한 결합은 그것이 자각된 순간, 폭력으로 이어진다)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 범주에는 <악어> <파란 대문> <섬> <나쁜 남자> <해안선> <수취인불명>이 해당되고, 두 번째 범주에는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 대문> <실제상황>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 집> <활>이 해당된다. 소유로서의 사랑과 상대에 대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으로서의 관계를 향하는 드라마적 경향들은 김기덕 작품세계의 마지막 시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후부터 로맨틱까지는 아니더라도 김기덕으로서는 가장 “온화하다”고 평가되는 시기- 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동물들의 짝짓기 같은 격렬한 키스, 행위자들을 쥐어짜고 탈진시키는 성적 행위들. 사랑은 육체를 통과하고, 통과하면서 육체를 찢어놓는다.

<나쁜 남자>
<수취인불명>

김기덕 세계의 두 번째 “방”은 상처의 방이다. 상처는 김기덕이 갈등과 대립의 시학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적 장치다. 그의 영화에서 컷(cut)은 육체적인 동시에 관념적인 덩어리이며, 컷을 통해 신(scene)은 분리되어 있는 두 요소- 육체와 관념-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상처는 언제나 열려 있는데, 왜냐하면 박동하는 중간 지대(육체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중간을 인간의 신체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심장에 비유했다.-역주)는 서로 만나거나 아무는 것이 불가능한 그 두개의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심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인간 육체의 상처일 수도 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속죄의 의미로 작용했던, 나무 바닥에 새겨넣은 글자일 수도 있다. 김기덕이 그의 캐릭터들의 신체를 찢고 해체하는 것에는 개념 예술가 루치오 폰타나(아르헨티나 출생의 추상화가. 단색의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뾰족한 도구로 긁어 이차원의 캔버스에 삼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는 색다른 표면 효과를 냈다.-역주)와 닮은 데가 있다(이탈리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말이다). 캐릭터의 상처를 벌리는 것은 “공간적인 관념”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큰 균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너무 깊을 때(반드시 육체의 상처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랑과 죽음을 묶는 고리는 비탄과 후회가 아니라 판타지와 복수다. 유령으로부터의 해방(<악어> <파란 대문> <나쁜 남자> <수취인불명> <사마리아> <빈 집> <활>) 혹은 유령으로서의 해방(<섬> <해안선> <빈 집>). 그렇게 된 뒤에야, 인물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은 서둘러오지도, 결코 쉽게 오지도 않지만, 언제나 얻어내야 할 구원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어떤 캐릭터는 결코 죽지 않고(<나쁜 남자>), 어떤 캐릭터는 아마 죽었지만 죽이기를 계속하며(<해안선>) 혹은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빈 집>). 몇몇은 환생하거나 물질화하며(<봄 여름 가을 겨울…> <활>), 몇몇은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실제상황> <사마리아>).

무기력하고 불안한 현대 남성의 초상

적어도 남성으로서, 김기덕의 영화는 무엇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무기력함. 이것이 그가 “빈집”을 찾아 절망적으로 배회하는 이유이다. <빈 집> 이전에, 조재현이 분한 모든 인물들은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끊임없는 불안에 사로잡힌 듯 움직였고, 그들의 은신처- <악어>의 지하도, <야생동물보호구역>의 배, <나쁜 남자>의 컨테이너, <수취인불명>의 개 도살장- 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 중에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그가 여성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남성을 구원하도록, 그의 속죄의 도구가 되길 강요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점차 유령으로 변하는 이유이다. 악어의 무거운 육체성과 “나쁜 소년”의 이미지는 <빈 집>의 태석이 상징하는 무형성으로 대체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김기덕은 리얼리티의 감독이 아니라, 추상의 감독이다. 그 자신도 “추상적 사실주의”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우리는 그 용어를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광활한 자연 풍광- <섬>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마법에 걸린 듯한 호수, <수취인불명>의 멍들고 상처입은 시골 정경, <사마리아>의 세 번째 챕터,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흐르고 있는 물- 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한 배경들이 빛의 변화를 기록하는 표현주의적인, 혹은 강렬한 색감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이고 순수한 (앙리 루소와 같은) 터치로 채색되었다면, 화가로서의 김기덕으로 하여금 그의 영화적 표현을 최대한 드러내 보이게 하는 것은 클로즈업이다. 김기덕의 “채도에 의한 숏의 구성”은 회화적인 상상력이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향하는 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회화의 이차원적이고 정적인 구성으로부터 카메라 앞에 선 육체들의 움직임이 조화를 결정하는 영화적인 구성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완벽한 조화를 부정하는 세계

김기덕 영화에서 완벽한 조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불협화음, 일탈, 벌어진 틈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김기덕 영화의 일관성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종종 틈을 드러내기에, 결코 완벽히 해결되지 않기에, 언제나 어두운 면을 내포하고 있기에, 무언가 올바르지 않은 것을 남기기에, 존재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잔여물들이 가장 더럽거나(<나쁜 남자>), 감춰져 있으며(<해안선>), 혹은 해결불가능할(<사마리아>) 때다. 김기덕 시스템의 힘은 여러 개의 조각들로 나눠어질 수 있으면서도, 결코 한 가지 조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일관성이 철저하게 지켜질 때, 영화는 오히려 생명력을 상실한다(<활>). 완벽한 조화를 거부하는 이러한 세계는 이탈리아 관객에게 언제나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관객(페스티벌에 가지 않고 수입된 DVD를 사지 않는)은 김기덕의 작품세계가 단순히 몇몇 영화들- <섬> <봄 여름 가을 겨울…> <빈 집> <사마리아> <활>- 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관객의 눈이 <섬>을 김기덕식 <감각의 제국>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섬>과 <감각의 제국>을 비교하는 것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영화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이탈리아 관객의) 시선에 있다. 육체의 찢김을 말하는 그 이야기들은 결국 거세의 이야기가 아닌, 서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영화의 종착점은 거세라는 고풍적인 전설이 이니라, <안달루시아의 개>(1929,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적인 아이콘(<안달루시아의 개>는 면도날로 눈을 가르는 충격적 이미지로 잘 알려졌다.-역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눈은 이러한 ‘눈멀게 함’에 전적으로 따르거나 그것을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서구의 관객과 평론가는 “오직” 그들의 영화가 육체를 공격하고, 상처주고, 오염시키고, 찢을 때에만 이러한 작가들을 “눈치챌” 뿐이다. 그것이 상처를 주고, 그것이 그들을 아프게 만들 때에만 말이다.

번역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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