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의 최초 시사회가 지난 5월25일 <씨네21>과 KT&G 공동 주최로 열렸다. <시간>의 개봉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영화를 개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씨네21>은 개봉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미리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김기덕 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해외 필자들의 소중한 글을 같이 실었다. 한국영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피력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잡지 <포지티프> 기자인 아드리앙 공보의 글과 이탈리아의 영화평론가 안드레아 벨라비타의 글이 그것이다. 두 필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자국어로 김기덕 감독에 관한 책을 낸 저자들이다(유럽에서 한 한국감독에 관한 책이 두 권씩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검은 화면에 두번 연거푸 쓰인 <시간>이라는 제목이 뜬다. 마치 찌그러진 데칼코마니인 양 양편으로 비스듬히 붙어 있는 그 두개의 같은 글자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맞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자리에서 두번 쓰인 시간, 그러나 서로 어긋나게 등을 맞댄 문자의 형상. 그 기이한 예고로 시작한 김기덕의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을 지난 5월25일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427석을 가득 채운 관객이 보았다. <씨네21>과 KT&G가 독자 시사를 빌려 마련한 <시간>의 최초 시사 자리였다. 때문에 이 자리에는 아직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한 주인공 성현아, 박지연 등 배우와 주요 스탭들이 함께했다. 이 영화에 관심을 두고 기다려온 몇몇 저널리즘 종사자들과 충무로 관계자들도 동석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중요한 참석자들이라면 어떤 인연이나 의무감없이 오로지 김기덕의 신작이 보고 싶어 치열한 접수 경쟁을 뚫고 찾아온 대다수 일반 관객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나머지 관객이 지금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시간>의 개봉일 것이다.
한 수입·배급사가 <시간>의 국내 판권 협의 중
최근 <시간>의 불투명한 개봉 소식이 전해지면서 <씨네21>의 독자 중에는 “스타들을 비롯한 한국영화 관계자 분들, 문화다양성 말로만 하지 말고 서로서로 한푼 두푼 조금씩 모아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한국 관객이 극장에서 볼 수 있도록 지원 좀 하십시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감독이고,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알려지면 거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하는 것보다 열배 백배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newcross) 등의 다소 감정 섞인 호소를 표시한 이도 있었다. 김기덕 감독이 <시간>의 개봉과 관련해 관례적인 극장 개봉 절차를 밟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거대 배급 구조에 회의를 느껴, 단 한 차례의 언론 시사도 없이 단관 개봉하여 직접 관객을 만나고자 했던 전작 <활>의 시도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전국 1634명이라는 <활>의 관객 수는 독창적인 세계를 지닌 한 영화 창작자가 관객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용기있게 선택한 만남의 과정에서 큰 실망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이런 근황에 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시간>은 한국의 배급 구조가 갖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명증한 징후다. 스크린쿼터 문제만큼 프린트 제한 쿼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쿼터의 이름으로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왜 프린트 제한 쿼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일종의 질책과 대안을 내놓았다. 동시에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어떤 정책이나 일종의 준강제적 조치로 이 영화가 국내 개봉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건 왠지 부끄럽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잠재된 관객의 열망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현재화할 수 있는 영화사의 혜안과 능력을 기다린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 바람에 대한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될 수 있을까? 현재 국내의 모 수입·배급사가 <시간>의 국내 판권 계약을 놓고 김기덕 감독쪽과 긍정적으로 협의 중이다.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해외 영화사에 수출된 뒤 다시 역수입해 상영하거나, 그것마저 없이 외국영화처럼 DVD 등으로 출시되어 보게 되는 최악의 결과는 피할 공산이 크다. 깊은 우려와 달리 <시간>을 극장에서 보는 일은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성사될 가망성이 큰 셈이다. 만약 그럴 경우, 이제 남는 건 다시 관객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김기덕 작품 중 가장 섬세하고 복잡한 영화, <시간>
<시간>을 본 국내외 평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다소 긴 국내 평자의 즉각적인 두 논평이 대표적이다. 정성일은 “김기덕이 갑자기 그 자신의 영화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후 이끌리던 불투명한 침묵의 도주로부터 선회하여 감정의 구조 안으로 돌아온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의 (이번) 영화에서 인물들이 시선의 텔레파시로부터 다시 혀의 하소연으로 돌아온 것 같은 정서적 환기를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서에 대한 고통의 연민이, 말하자면 피와 육신이 다시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허문영은 “김기덕 영화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복잡하다. 시간과 공간 이미지에 대한 김기덕의 탐구가 결집해 미묘한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혹은 <나쁜 남자>에서의 선형적 시간을 대체하거나 교란하는 순환적 시간에 대한 영화적 사유와 <사마리아>와 <빈 집>에서의 현대 도시 공간의 반복성과 익명성에 대한 탐구가 결합돼 있다. 이를 통해 김기덕은 자신의 영화 생애에서 가장 비관적이며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새로워지지만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새로움이며, 자기동일성은 유령이 되어 도시 공간을 배회한다. <시간>은 근대적 시간관에 바탕한 진보의 환상에 대한 맹렬한 야유다. 그 야유를 그는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독창적 탐구로 이뤄낸다”고 평했다.
한편 이번 칸영화제 마켓에서 상영된 <시간>에 대한 리뷰에서 영미권 산업지 <스크린 데일리>는 “김기덕 영화는 언제나 최소한의 흥미를 자아내는데, 그의 신작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운을 뗀 뒤, “비록 <시간>이 스스로 제기한 몇몇 이슈들을 충분히 탐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다가오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다. 김기덕의 연출은 통제 불가능한 좌절의 발작상태로 두 여주인공을 몰아간다”며 김기덕의 연출력을 높이 샀다.
지금까지 김기덕의 영화 중 <시간>은 스스로의 영화적 중력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본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세희(박지연)라는 한 여자가 있고, 지우(하정우)라는 한 남자가 있다. 둘은 오랜 연인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지우를 만나러 오던 세희는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고 나오는 한 여자(성현아)와 부딪친다. 세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이미 운명적이다. 세희는 다른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는 지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이 지겨워졌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성형을 결심하고 사라진다. 세희가 성형을 하고 나타났을 때 이름은 새희이며, 그 새희는 세희가 영화의 초반에 병원 앞에서 부딪쳤던 바로 그 여자다. 지우는 새로운 연인 새희와 사귄다. 그러나 새희는 지우가 여전히 세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이전의 세희 얼굴을 오려낸 가면을 하고 나타난다. 그렇지만 남자의 완전한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이제, 지우는 성형외과를 찾아가 그 역시 다른 사람으로 얼굴을 바꿔 새희 앞에 나타나려고 한다. 지우를 기다리는 새희는 누가 지우인지 궁금해하며 점점 광인이 되어간다. 그러다 새희는 다시 얼굴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영화는 첫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에 담긴 비극적 반복의 순환
<시간>은 김기덕 영화 중 가장 요란하고 현란한 영화다. 그 형식에서 영화는 <빈 집>에서의 그 공간적 기능을 얼굴이라는 인체의 일부로 대체하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가장 비통한 <해안선>보다 더한 비극의 벼랑에 서 있다. 김기덕 영화에 한 가지 소명이 있다면 그건 절대적인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온몸을 투신하여 부딪치려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몸짓일 것이다. 그것이 김기덕 영화 속 인물들의 광기 혹은 같은 이름으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구도(求道)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미쳐가거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때마다 인체는 증명의 도구였다. 차라리 그건 고상한 말 인체보다는 인육에 가깝다. <시간>은 그 인육의 일부를 바꾸어서라도 사랑을 증명하고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실패를 그린 영화다. 그러나 <시간>에서 정작 불변의 법칙은 다시 시간이다. 바꾸어도 다시 제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비극적 반복의 순환이 <시간> 속에는 있다. ‘시간만큼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자 하는 욕망 또한 있을 것 아닌가.’ 이 간단하면서도 무구한 난제와 도전의 과정에 김기덕은 자신의 인물들을 세웠다. 이제 <시간>이 개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