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과 <시간> [3]
2006-06-14
글 :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액자를 거부하는 거리의 화가

순간적 충동의 예술관 보여주는 김기덕의 작품세계

김기덕 감독에 관한 오해가 있다. 그는 아마 최근 몇년간 상을 많이 받은 감독 중 한명일 것이다. 그런데 수상 경력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작품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으면서 일종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김기덕 감독의 어떤 작품도 본성상 완결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의 영화 전편은 손에 손을 맞잡고 추는 길들여지지 않은 춤의 하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를테면 각각의 작품은 솟구쳐 오르면서, 그 속에서 다른 작품들을 이끄는 손에 손을 잡고 맞물려 있다.

동일한 주제와 장면이 맞물려 연결되는 작품들

<활>
<섬>

주제들을 열거하고, 똑같은 장면들을 재현하고, 삭제하고, 지우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예를 들어 <해안선>은 여러 면에서 <수취인불명>의 연결선상에 있다. 이 작품들은 6·25 전쟁과 군대의 토대에 관한 반자전적인 닮음꼴 2부작을 구성한다. 무언가에 쫓기고, 미쳐버린 미군 병사와 한국군 병사는 머리가 두개인 괴물을 이룬다. 이 짝패는 <사마리아>의 두 소녀나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파리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두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보인다. <해안선>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한밤에 소리없이 배회하는 유령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부드럽고 유려한 몸짓에서 <해안선>보다 조형적으로 훨씬 더 잘 구현된, 유령 같은 잠입자 이야기인 <빈 집>을 예고한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의 두 친구는 <파란 대문>의 여대생과 창녀의 쌍둥이 자매와 다름없다. 그들 중 한명은 <활>의 배 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 치명적이고 침묵에 싸인 아름다움은 이미 <섬>의 말 못하는 여주인공의 모습 속에 그 싹을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도주 중인 살인범이 숨어든 호수에 떠 있는 작은 집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역시 피신 중인 범죄자를 맞는 절로 이어지고, 또 그것은 <활>의 잔잔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가 된다. 하지만 <활>은 이미 <수취인불명>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끝도 없이 김기덕의 영화를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예외로 하고 김기덕 감독이 작품들을 다 놀랄 만한 속도로 찍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사마리아>는 보름, <실제상황>은 심지어 두 시간 만에 찍지 않았던가!).

이것이 그의 예술 개념이다. 비록 그가 자신의 영화 속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인용했음에도(<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는 카미유 클로델을, <나쁜 남자>나 <파란 대문>에서는 에곤 실레 등), 그는 화첩을 팔에 낀 채 길에서 긴 옷자락을 늘어뜨린 거리의 예술가들, 방랑자, 수도승 혹은 빈털터리 학생과 좀더 가까운 듯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액자 안에 고정된 예술 작품보다는 그린 즉시 단돈 몇푼에 팔려나간, 찢은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려 점점 흐려지는 몇 가닥의 생생한 윤곽만 남은 초상화와 닮아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수도승 역을 하면서, 같은 영화의 어린아이를 소묘하는 김기덕을 본다. 김기덕 감독은 이런 방법으로 <사마리아>의 손님들을 한명씩 그려나간다. 그들은 단지 효과적이면서 무미 건조한 하나나 두개의 장면에서 잠시 동안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개성은 침을 묻힌 손가락이나 손짓으로 뭉긴, 검은색이 과도하게 두드러진 도화지 위의 그늘처럼 잠시 부각될 뿐이다.

예술은 순간적 충동으로 분출된다는 세계관

<해안선>

김기덕이라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감독의 주인공들은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 행동한다. <섬>의 연인들은 낚싯바늘을 삼키거나 질 속에 집어넣기를 생각하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쁜 남자>의 불량배는 예쁜 여대생을 향해 달려들 때 그의 행동을 계획하에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수취인불명>의 시골 여학생은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눈을 찌르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며, <사마리아>의 여고생도 모텔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 장단점을 생각하면서 한 것이 아닌 것이다. 살인은 연필, 깨진 유리 조각, 가위, 벽돌, 골프채 등과 같은 우발적인 도구들로 저질러진다. 살인자는- 이 예술가가 창조 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숙고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계획도 없이 살인한다. <사마리아>에서 행위는 기계적인데, 벽돌이 무겁게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치고,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피로 그림을 그릴 때처럼 진하고 붉은 피가 백지를 덮듯이 반들거리는 하얗고 깨끗한 타일을 더럽힌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 도처에 모습을 드러내는 피는 (오줌도 도처에 나오지만) 단지 꿈틀거리며 다시금 터져나온 육체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예술가를 처절하게 정의내려주는 것으로서 감춰졌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야수성의 분출이다.

그렇게 김기덕 감독은 자기 영화로, 격렬한 죽음인 예술은 순간적인 충동으로만 분출될 수 있다는 생각을 옹호한다. 그런 식으로 한국영화의 한 흐름 속에 자신의 위치를 잡는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류승완 감독과 매우 비슷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재능을 상업적인 방향으로 맞추길 거부하고서 별개의 다른 세계 속에 유배되기를 자처한 것 같다. 곧 호수 위의 절이나 낚시꾼의 작은 집, 배, ‘빈’집과 같은 것에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극단적인 만큼 본능적인 이 선택의 대가를 오늘날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번역 진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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