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다채로운 영화체험, 스위스영화의 발견, 스위스 영화제
2006-06-1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알랭 태너·다니엘 슈미트·장 뤽 고다르 등 스위스영화 20편 상영회
<백색도시>

신인감독들의 작품을 시상하는 로카르노영화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도 스위스와 영화를 결합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시네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난감한 사항이다. 로카르노영화제를 제외하고 스위스가 영화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경우란, 고다르가 80년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비디오 매체를 통해 영화적 실험을 진행했던 시기를 ‘스위스 시절’이라 약칭할 때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실제로 스위스영화는 영화 연구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꽤 꼼꼼한 기술을 자랑하는 영화사 저서에서도 스위스영화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필름 포럼’과 ‘시네마테크 서울’이 공동 주최하는 ‘미지의 영화대국 스위스’는 한국의 시네필들에게 영화 보기의 시야를 넓혀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6월15일(목)부터 23일(금)까지 열리는 ‘미지의 영화대국 스위스’는 1960년대 후반의 ‘뉴 스위스 시네마’의 영화에서부터 2000년대 발표된 영화까지 총 20편(장편 19편, 단편 1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서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은 브레히트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1960년대 ‘뉴 스위스 시네마’를 이끌었고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알랭 태너(Alain Tanner)와 다니엘 슈미트(Daniel Schmid)와의 만남이다.

1950년대 중·후반 영국에 머물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주장했던 린제이 앤더슨 등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던 알랭 태너는 당시 영국 영화계의 새로운 물결이었던 ‘프리 시네마’의 영향을 받는다. 영국 프리 시네마의 공식적인 상영은 카렐 라이즈의 <램버스의 소년들>(We are the Lambeth Boys, 1958)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스위스로 돌아온 태너는 1959년 단편영화 <나이스 타임>(Nice time)을 시작으로 다큐멘터리 작업 속에서 프리 시네마와 스위스영화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태너는 자신의 첫 단편영화에서부터 함께 작업했던 클로드 고레타 등과 함께 독립영화그룹인 ‘그룹 5’를 1968년에 결성하고, 다음해 자신의 첫 장편 극영화인 <샤를을 찾아라>(Charles dead or alive, 1969)를 발표한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 작품은 ‘뉴 스위스 시네마’의 기수로서 알랭 태너의 입지를 다져주었고, 이후 태너는 소설가이자 문예비평가인 존 버거와 공동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살램매드르>(Salamandre, 1971)와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Jonah Who Will Be 25 in the Year 2000), 1976) 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태너의 작품은 <샤를을 찾아라>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 그리고 그의 영화적 세계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백색도시>(In the White City, 1983) 세편이다.

알랭 태너와 함께 주목할 수 있는 스위스 감독인 다니엘 슈미트의 작품 역시 세편이 상영된다. 알랭 태너가 영국의 프리 시네마 속에서 영화적 자양분을 얻었다면, 다니엘 슈미트는 독일 베를린의 필름텔레비전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과 교류하며 자신의 영화적 미래를 준비한 감독이다. 데뷔작으로 파스빈더의 영향이 묻어나는 실험적인 작품이었던 <오늘밤>(Tonight or Never, 1972)을 발표한 이후 한층 더 양식화된 스타일을 선보인 <라 팔로마>(La Paloma, 1974)를 내놓으며 자신의 영화적 실험을 한층 가속화시킨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다니엘 슈미트의 두 번째 작품인 <라 팔로마>와 함께, <헤카테>(Hecate, 1982), <쓰여진 얼굴>(The written face, 1995)이 상영된다.

알랭 태너와 다니엘 슈미트의 영화가 여타의 유럽 국가의 영화적 운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나간 스위스영화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영화 이미지의 잠재력을 극단까지 실험하려 하는 고다르의 스위스 시절 작품인 <오른쪽에 주의하라>(Soigne ta droite, 1987) 역시 이번 영화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고다르가 연출과 각본, 편집뿐만 아니라 직접 주연을 맡기까지 한 이 작품은 미국의 코미디언인 제리 루이스를 향한 오마주이다. 물론 고다르의 스위스 시절 작품이 <오른쪽에 주의하라>와 단편영화인 <프레디 부아슈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Freddy Buache, 1981)에 그치는 것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뉴 스위스 시네마의 선언문과도 같은 작품으로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스위스 사회의 안일한 가치들을 비판하며 스위스 영화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던 미셸 슈터(Michel Soutter)의 <이빨을 가진 달>(The Moon with Teeth, 1966) 등의 작품은 충분히 다채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주요 상영작 소개

<샤를르을 찾아라>
Charles mort ou vif?/ 알랭 태너/ 1969년
영화의 정치적 관심을 강조했던 알랭 태너의 장편 데뷔작으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미셸 슈터로부터 촉발된 ‘뉴 스위스 시네마’를 진일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끝없이 숨통을 조여오는 부르주아적인 삶을 거부하고 보헤미안적인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흑백의 거친 질감 속에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는 <샤를르를 찾아라>에서, 그 제목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주인공 샤를르를 찾는 영화의 내용이 표면적인 첫 번째 의미라면, 그 이면에는 부르주아적 삶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샤를르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나간다는 의미가 놓여 있는 것이다.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
Jonas-qui aura 25ans en Pan 2000/ 알랭 태너/ 1976년
알랭 태너의 대표작인 이 영화는 스위스 제네바를 배경으로 이상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어떠한 선택을 강요받는 다양한 인물군상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열렬한 노조 운동원이었지만 농장에서 채소를 키워야 하고, 좌파 운동권이었던 저널리스트는 신문사에서 교정일에 지쳐가고,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수업 방식으로 여러 학교를 전전해야만 한다. 이상과 신념을 가로막는 현실의 빨간불 앞에서 멈추어서야만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기록해가는 이 작품에서, 알랭 태너는 작가적 논평이 엿보이는 다양한 판타지와 다큐멘터리 장면을 삽입하고, 숏과 리버스숏의 부르주아적 봉합을 거부하는 연출 방식을 통해 정치적 모더니즘영화의 계보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헤카테>
Hecate/ 다니엘 슈미트/ 1982년
다니엘 슈미트의 80년대 영화적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헤카테>는 이국적 풍경의 모호함만큼이나 수수께끼로 가득한 에로스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작품이다. 주인공 줄리언은 프랑스 장교인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클로틸드라는 한 여성을 만나지만, 그녀의 욕망은 너무도 모호하기만 하다. 클로틸드에게 점차 중독되어버린 줄리언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묻지만, 클로틸드는 질문에 대한 답은 주지 않은 채 그저 열정적 광기의 막다른 골목까지 줄리언을 안내할 뿐이다. 타나토스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는 에로스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줄리언의 모습을 통해 욕망과 열정의 불가해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쓰여진 얼굴>
The Written Face/ 다니엘 슈미트/ 1995년
일본 가부키극의 유명 스타인 반도 다마사부로에 대한 ‘허구적 다큐멘터리’이다. 마치 남성이 여성을 흉내내어 연기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여성의 본질을 뽑아내는 가부키극의 연기처럼, 이 허구적 다큐멘터리의 극적 요소는 다큐멘터리를 흉내냄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진실을 형상화한다. 영화는 네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본의 민담에서 유래한 취한 뱀 ‘오로치’의 춤이며, 두 번째는 반도 다마사부로의 연기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인터뷰와 그의 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세 번째는 ‘황혼의 게이샤’라는 게이샤 테마에 대한 ‘다큐멘터리 속 극영화’이다. 네 번째는 눈오는 겨울밤에 한 젊은 여인의 환생과 변신을 이야기하는 가부키극이다. 네개의 장 모두가 무척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했던 여배우인 스기무라 하루코가 그의 우상으로 인터뷰하는 모습은 영화 보기의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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