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6 하반기 신작 프로젝트 [1] - 청춘유감
2006-06-2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월드컵 열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신작 촬영준비에 여념이 없는 충무로 제작진들이다. 과연 그들은 월드컵 개막일이 며칠인지 알고 있을까. 한국의 예선 경기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알고 있을까. 이것만은 분명하다. 월드컵에 나선 축구선수들 못지않게 그들 또한 오랜 시간 사활을 걸고 프로젝트 진수를 위해 애써왔다는 것만은.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개봉할 한국영화 중 최근 몇년 동안 상업영화의 트렌드라고 할 만한 소재, 배경 등을 택한 10편의 영화를 꼽았다. 청춘을 되묻고, 시대를 거스르고, 가족을 내세우고, 원작을 택하고, 속편이 뒤따르는 영화로 범주를 나누고 제작이 가시화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2편씩 선정했다. 그 다음 과거 비슷한 트렌드의 영화들의 장점을 어떻게 극대화하고 단점들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를 물었다. 올해 하반기부터 쏟아져 나올 한국영화 기상도의 일부분을 미리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담아.

두편의 청춘영화 <뚝방전설>과 <폭력써클>은 기묘한 공통점이 있다. <뚝방전설>의 친구들은 ‘노타치’라는 주먹패를 결성해 활동한다. <폭력써클>의 친구들은 축구 클럽 ‘타이거’를 만들었는데 주먹패라고 오해받는다. 결국 둘 모두 싸움판 가까이에서 살게 된다. 두명의 연출자는 인터뷰 도중 각자의 영화에 대해 “남자 이야기”라고 맞춘 듯이 말했다. 폭력의 다리를 건너온 남자들의 청춘을 이 두 영화는 지금 그릴 예정이다.

모두의 행복을 꿈꾸는 성장담, <뚝방전설>

시놉시스/ 정권(박건형), 성현(이천희), 경로(MC몽)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무료하고 시큰둥한 고등학교 학창 시절 그들이 이루고 싶은 것은 동네 어귀 뚝방을 자신들만의 진지로 삼는 것이다. 어느 날 ‘노타치’파를 선언한 뒤 주먹으로 뚝방을 점령한 세 친구. 그러나 우두머리 격인 정권이 더 큰 세상으로 가겠다며 동네를 떠나고, 세월이 흘러 20대 중반을 넘어선 성현과 경로는 각각 방사선과 의료진, 아마추어 노래교실 선생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즈음 동네에는 지독한 외지 깡패 치수 일행이 들어와 폭력을 일삼고 다닌다. 교도소를 출소한 정권이 마을로 돌아오자, 예전의 노타치파는 다시 뭉쳐 학창 시절 그들의 무대였던 뚝방의 추억을 되찾고자 외지 깡패들과 결투를 벌인다.

“전설 아닌 청춘이 어디 있겠는가. 사는 게 그렇다. 가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을, 결과가 뻔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우리는 아마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전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추억 하나 없이 서른 언저리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린 너무 불쌍하다. 밀리면 끝장이다.” 조범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번째 상업영화 데뷔작인 <뚝방전설>의 청춘들은 최후의 뚝방 결전을 벌일 때 그렇게 생각한다.

같은 청춘 혹은 성장의 이야기라는 범주로 묶는 것이 가능하지만, <뚝방전설>은 전작 <양아치어조>와 좀 다르다. “우선 액션이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닥에 깔고 최대한 이야기들을 경쾌하고 재미있게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70%의 촬영을 마친 조범구 감독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 중랑천 근처에서 자란 조범구 감독에게는 뚝방에 대한 일상적인 기억과 풍문들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을 대전의 대전천을 배경삼아 영화 속 뚝방으로 옮겨냈다. “사실 근거에 너무 매달리면 상상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지만, 캐릭터 구성에서는 단짝 친구인 박수진 작가와 함께 그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을 하나둘씩 불러왔다. 주인공인 정권, 성현, 경로는 모두 친구들의 실제 이름이고, 거기에 상상과 일화를 덧붙여 구체화했다. 예를 들어 정권은 고등학교 때 벌교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온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삶에 대한 드라마 그리고 인생유전”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성장담에도 관심이 많다. 출발은 했지만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의 정반대에 가 있는 사람들, 그들의 과정이 바로 인생유전일 것”이라고 조범구 감독은 말한다. 그건 <뚝방전설>의 청춘들에 대한 정의이기도 할 것이다. 특별히 다른 청춘영화 혹은 성장영화들과의 차별점을 염두에 두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물별 해피엔딩이 많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 모두 나이에 상관없이 성장을 한다. 처음에는 좀 느닷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 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성장담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청춘영화는 드물다. 그점에서 <뚝방전설>은 특이한 영화일 것 같다.

캐릭터를 배우에 맞춰라

<뚝방전설>의 친구들 정권, 성현, 경로 역을 맡은 세 배우는 박건형, 이천희, MC몽이다. 조범구 감독이 캐릭터와 배우를 어울리게 하는 방식은 이런 거다. “사람이 쉽게 바뀌겠나. 그러니 캐릭터를 사람에게 맞춰야지.” 정권 역의 박건형은 “운동을 워낙 많이 해서 그런지 성격 자체도 남성적이다. 그런 면에서 정권 캐릭터하고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에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성현 역을 가장 좋아했던 이천희는 “실제로도 유한 편이고 세밀한 감정들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그렇다면 감초 같은 친구 경로 역의 MC몽은? “몽이는 그냥 두면 많이 나가는 편이라 내가 오히려 절제해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제안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놔둔 게 오케이나는 경우가 더 많다.” 감독이 말하는 뚝방의 세 배우. 이 정도면 캐릭터와 특별히 구분할 이유도 없겠다.

영웅이 되지 못한 10대들의 전쟁, <폭력써클>

시놉시스/ 중학교 친구인 상호(정경호)와 재구(이태성)는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축구클럽 타이거를 만든다. 어른들은 주먹이 센 상호와 재구가 폭력서클을 만들었다고 오해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운동장을 달리는 것이 좋을 뿐이다. 그러나 상호가 여고 짱인 수희(장희진)를 만나면서 열일곱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의 삶은 비극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공고 짱이었고 지금은 진짜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는 수희의 예전 남자친구가 그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인인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서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상호는 친구들이 싸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면서 직접 끝을 보기로 결심한다.

<여고괴담> <아카시아>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박기형 감독은 “그저 남자 이야기가 해보고 싶어서” <폭력써클>을 생각하게 됐다.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한없이 작은 일에 집착하는 그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그 자신도 때로는 마초성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는 박기형 감독은 물음의 끝에서 폭력을 발견했고, 가식이 없기에 그 폭력성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십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싸우지 않고 살면 좋을 텐데. 육체적인 폭력은 폭력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지만, 결국 그것이 자라나 정신적인 폭력이 되고 끝내는 전쟁이 되지 않나 싶다.” 그러므로 <폭력써클>은 제목이 주는 단호한 느낌과는 다르게 폭력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바라보는 영화이다. 멀게만 보이는 미래보다는 당장 곁에 있는 친구가 중요했던 아이들. 그들은 의리와 주먹으로 이루어진 남성적인 가치를 위해 몸을 내던지지만, 죽어서도 영웅이 되는 액션영화의 낭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폭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탓에 <폭력써클>은 액션의 쾌감을 담으면서도 그것을 찬미할 수는 없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박기형 감독은 그런 고민을 드라마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아이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당구장 패싸움은 다른 영화보다 피를 많이 썼을 뿐 스타일에 폭력을 향한 경고를 담지는 않는다. 다만 “앞에서 구축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멋있는 액션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장면은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영웅이 완성되는 허무한 순간이 아닌, 순진하게도 술과 여자를 멀리하여 군인이 되어야지, 생각했던 아이의 미래가 어둠에 묻히는 순간인 탓이다. 그렇더라도 “1991년의 아이들은 PC방에 앉아 있는 요즘과 다르게 움직이는 세대여서” 속도감을 실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박기형 감독의 액션은 관심을 갖게 한다. 그가 이전에 감정이 한없이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시간을 실험했던 감독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기형 감독은 “남자들끼리 모여 서로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면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유치하고 웃기기도 하여” <폭력써클>은 유머도 있는 영화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엉망으로 휩쓸려가는 <폭력써클>의 아이들은 분명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나는 밝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비극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고, 사람이란 슬픈 존재라고 믿는다.” <여고괴담> <비밀> <아카시아>에서 한결같이 상처받고 분노하여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그려냈던 박기형 감독. 그가 만난 상호와 재구와 타이거클럽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또 한번 연민과 슬픔을 던져주지 않을까 싶다.

캐릭터와 배우 사이

<폭력써클>의 정경호와 이태성, 김혜성, 장희진 등은 영화를 찍은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배우들이다. 그 때문에 박기형 감독은 “숙련된 연기를 기대하기보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인성에 의존해” 배우를 캐스팅했다. 정경호는 상호처럼 반듯하고 모범적인 느낌이 강했고, 재구 역의 이태성은 운동을 했던 아이가 가지고 있는 열기가 느껴진 경우였다. “배우와 캐릭터가 겹치는 면을 틈이라고 부른다면, 영화를 찍어갈수록 그 틈이 커지는 거였다. 연기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배우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다.” 덕분에 박기형 감독은 아이들이 영화와 더불어 자라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내성적이고 어두워 보였던 이태성이 영화가 끝날 무렵 성격이 불같은 재구가 되어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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