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거룩한 계보> 촬영현장 [1]
2006-06-29
글 : 문석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장진 감독의 신작 <거룩한 계보>가 촬영현장을 공개하며 실체를 드러냈다. 타고난 재담꾼이자 현실을 뒤트는 코미디의 대가인 장진 감독의 이 여섯 번째 장편영화는 여러 면에서 큰 변화를 느끼게 한다. 조직폭력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조폭영화’라는 점에서부터 거친 남성들의 세계를 굵직한 스타일로 담아낸다는 면, 10여명의 캐릭터를 동시에 두드러지게 보여준다는 사실 등 <거룩한 계보>는 기왕의 장진 영화와는 다른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다. 장진 감독과 두 주연배우 정재영, 정준호의 어깨너머로 <거룩한 계보>의 정체를 들여다봤다.

조직을 위해 큰일을 치른 남자가 감옥에 들어간다. 얼마 뒤 조직의 보스는 그를 배신하고, 분노에 떨던 남자는 복수를 위해 탈옥을 감행한다. 같은 조직원이자 절친한 친구는 남자와의 우정과 조직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마침내 보스를 찾아온 그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 단순하고 전형적인 이야기가 장진 감독의 새 영화 <거룩한 계보>의 큰 줄거리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택시강도를 당하며 온갖 수모를 겪는 남파간첩의 이야기건, 갖가지 사연을 담고 살인을 대행해주는 킬러들의 스토리건, 생중계되는 살인사건 수사현장 속 검사의 이야기이건, 장진의 영화는 엉뚱하고 기발한 캐릭터들의 황당하고 어이없는 행동을 그려왔다. 그런데 배신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막힌 사내들의 이야기라니, 장진 감독은 이제 자신의 과거를 박수칠 때 떠나서 거룩한 새 출발을 꾀하려는 것일까.

단순하고 전형적인 남자들의 이야기?

6월11일 전북 익산시 함열읍 성당면에 자리한 교도소 세트를 오전 일찍 찾아간 것은 영화가 개봉되기 전 이같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촬영장에 들어서자 묘하게 숙연한 기운이 느껴진다. 높은 벽을 따라 불쑥 솟아 있는 망루들, 나무 두 그루만 덜렁 세워진 황량한 운동장, 꽤나 오랜 세월을 버틴 듯 치장된 건물 등이 실제 교도소를 찾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운동장 한쪽에는 이날 촬영을 위해 동원된 70여명의 보조연기자들이 열과 행을 맞춘 채 서서 지시사항을 전달받고 있다. 교도소 건물 내부는 더욱 실감나게 꾸며져 있다. 두개 층에 걸쳐 빽빽하게 박혀 있는 감방들에선 죄수들이 튀어나와 시비라도 걸 것 같다.

장진 감독은 이 건물 내부 한구석에 모니터를 설치한 채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파이널컷을 이용해 직접 현장편집을 하는 그는 두대의 모니터를 설치한 채 자신이 편집해놓은 장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옆에 앉은 정재영에게 이런저런 장면을 보여주며 의견을 구하는 듯했다. 이윽고 조감독이 세팅을 끝내자 장진 감독은 ‘이제 시작해볼까’ 하는 표정으로 여유있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날의 첫 촬영장면은 교도소 건물 2층 통로에서 동치성(정재영)이 고향 친구 순탄(류승용)에게 탈옥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장진 감독은 지극히 간략한 지시만을 내린 뒤 모니터 앞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간략한 신이라 해도 너무 성의없는 연출 아닌가, 싶은데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장진 감독은 이 영화가 촬영에 돌입하기 수개월 전부터 배우들과 스탭들을 불러모은 채 꼼꼼한 리허설을 진행했다. “남산 드라마센터와 사무실에서 모든 신을 리허설했다. 대사의 호흡, 느낌뿐 아니라 동선까지 대략 잡았기 때문에 현장에 나와서 특별히 지시할 일이 없다.” 콘티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모두가 척척 움직이는 것도 꼼꼼한 사전 리허설 덕분이리라.

감독의 액션 사인이 떨어지자 정재영이 얼굴을 실룩이며 말을 꺼낸다. “성님이 날 잊었는갑다. 나가서 물어봐야 쓰겄다. 같이 가자. 너도 날 받을지 모른께.” 그의 이야기를 듣는 류승용은 아무 말도 않는데도 왠지 굳은 결의가 느껴진다. 마치 남자들의 세계에선 말로 하지 않는 쪽이 더 명쾌한 대답이라는 듯. <아는 여자>를 제외하면 항상 남자들만이 그득 출연했던 게 장진 감독의 영화라지만, 그동안 남자가 등장하되 남성성은 그닥 강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거룩한 계보>의 세계는 자못 다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폭력조직의 2인자 동치성이다. 그는 조직을 위해 마약 개발업자 최 박사(정규수)에게 중상을 입히고 순천교도소로 들어간다. 그는 감방에서 사형집행된 줄만 알았던 고향친구이자 전 조직 동료 순탄을 만나게 되고 일련의 싸움을 통해 교도소 내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선다. 그러나 마약사업을 간절히 원하는 조직보스 김영희(민지환)는 최 박사와 협상을 하면서 치성을 배신하게 된다. 분노한 치성은 감방 동료들과 탈옥을 감행하고 치성, 순탄의 고향친구이자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김주중(정준호)과 맞서게 된다.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전환하는 천생 장진의 영화

장진 감독이 이 이야기를 구상한 것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고 지내던 어르신께서 연초에 당신의 고향인 순천에 가서 신년모임을 갖자고 하셨다. 친한 후배들과 함께 가서 이틀 동안 머물면서 그분의 친구분들을 만났는데, 전라도 사나이들의 인심이나 남자다운 기질을 접했다. 그게 크게 와닿았고 그때부터 전라도 남자와 그들의 기질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 그의 애초 구상대로였다면 <거룩한 계보>는 <아는 여자>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2003년 그가 각본을 쓰고, 그가 주도하는 ‘수다’가 투자까지 했던 <화성으로 간 사나이>가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장 영화를 만들어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거룩한 계보>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미루기로 결정하고 시골에 내려가 10일 만에 <아는 여자>의 시나리오를 썼다.”

오후가 되자 대규모 기자단이 현장에 도착했다. 장진 감독이 130여명의 호기심 많은 취재진을 위해 준비한 첫 장면은 동치성이 왕관을 쓰고 교도소 복도를 행진하는, 다소 황당한 신이다. 치성이 쓰고 있는 왕관은 탈옥하기 위해 땅굴을 파던 중 출토된 것. 왕관을 쓴 치성이 왕이라도 된 듯 상상에 빠지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에도 나오지 않는 장면을 갑자기 촬영하게 된 정재영은 “기자들 온다고 그냥 만든 거 아냐? 어차피 DVD에나 나올 것 같은데”라면서도 카메라 앞에 서자 나름 진지해진다. 감독의 슛 사인이 떨어지자 왕관을 쓴 정재영과 감방 식구들이 복도를 행진하고, 1층과 2층 통로를 그득 메운 보조연기자들이 꽃가루를 뿌리며 환호해댄다. 아무리 조폭이 나오고 배신과 복수를 그린다고 해도 <거룩한 계보>는 천생 장진의 영화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아무리 심각한 장면이라 해도 장진식 코미디가 곳곳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분명 예상과는 다를 것이다. 심각한 상황이라도 어느 순간 코믹하게 전환되는 유니크함이 있을 테니까.”

이날의 마지막 신은 운동장에서 촬영됐다. 교도소의 담이 무너진 직후 치성을 비롯한 감방 식구들이 뛰어나가려는 장면으로, 전날 번개, 천둥과 함께 몰아쳤던 폭우로 젖었던 땅이 거의 마른 덕에 찍을 수 있었다. 정재영을 비롯한 감방 식구들이 달리고 또 달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햇살은 쨍쨍했다. 그런데 죄수들 사이에는 불꽃을 내뿜으며 타들어가는 전투기의 꼬리날개가 보인다. 제작진은 상세한 설명을 삼간 채 비행기의 추락과 탈옥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 암시했다. 다른 편에서는 대형 크레인이 담장을 ‘붙이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레탄폼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담벼락의 조각들을 맞추는 이유는 얼마 전 촬영한 담장 무너지는 장면이 감독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한다. 이 장면은 다음날 재촬영하게 될 예정이다.

조폭은 소재일 뿐, 보통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

<거룩한 계보>의 순제작비는 50억원. 상당 부분은 미술에 들어간다. <홀리데이>를 위해 지어진 이곳 교도소 세트도 4억원의 예산을 들여 전면 리모델링됐다. 김효신 미술감독은 “장면의 50% 정도가 교도소에서 촬영돼 신경을 많이 썼다. 장진 감독이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원해 화단과 나무를 다 없애고 바닥의 잔디도 다 제거했다. 실내의 깊이감을 주기 위해서 교도소 건물을 증축했고 담장도 150cm를 높였다”고 말한다.

촬영이 끝날 무렵, 스케줄이 없지만 기자간담회를 위해 이곳을 찾은 정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그동안 출연했던 코미디와 다르게 품위있는 코미디”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마따나 <거룩한 계보>가 그동안의 ‘장진식 코미디’와 다른 점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장진 감독도 인정한다. “이전에는 대사를 통한 코미디가 주를 이뤘는데, 이 영화에서도 대사가 재밌는 게 많지만 그게 주 무기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진중한 감정쪽이 무기일 것이다. 아마도 <거룩한 계보>는 내 영화 중 가장 많이 울리는 영화가 될 거다. 찍으면서 코미디 수위를 일부러 낮춘 것도 그 때문이다.” 촬영 도중 편집기로 그가 보여준 동치성네 감방의 방장(이문수)이 탈옥한 뒤 아내(김동주)를 만나는 2분30초짜리 장면은 그의 말이 거저 나온 게 아님을 알게 했다. 두 사람은 그저 데면데면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감정이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조폭을 다루고 있지만, 그건 소재일 뿐 결국 다른 내 영화들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다”라는 장진 감독의 이야기가 이해될 것도 같다.

결국 이 영화가 개봉되는 추석 무렵이면 명명백백해지겠지만, 여러 정황상 <거룩한 계보>는 장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분기점이 될 듯하다. 당분간 그의 영화에서 유희정신은 진지함에 자리를 더 내줄 것이고, 연극적 요소는 영화적 구성력으로 더욱 잘게 변환될 것이며, 실험성의 수위는 대중성의 흐름 안으로 포섭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