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의상 만들기 [1]
2006-06-29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친절한 금자씨>의 물방울 원피스와 검은 선글라스가 만들어내는 복고풍의 우아함, <음란서생>의 검은 한복과 붉은 한복이 드러내는 과감함과 강렬함, <왕의 남자>의 색동 궁중 광대옷이 품고 있는 상상력. 영화의상은 종종 영화와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시각적 쾌락의 요소가 된다. 동시에 영화의상은 영화 속 인물, 더 나아가 영화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무언의 문장이며 단락이다. 이같은 역할을 지닌 영화의상은 최근 한국 영화계가 품은 영화적 비주얼에 관한 이상이 의욕적으로 실현되면서 유독 그 매력을 발휘해왔다. <올드보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달콤한 인생> <혈의 누> <친절한 금자씨> <형사 Duelist> <왕의 남자> <청연> <음란서생> 등 의상 면에서 성취가 남달랐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영화의상의 탄생과정을 따라잡아보면 어떨까. 충무로의 주요 의상스탭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정을 재구성해보았다. 이어 조상경, 정경희, 권유진, 정구호 등 의상감독이라 불릴 만한 스탭 4인의 인터뷰를 실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 조각들을 모아 ‘지식검색’ 코너로 꾸려보았다.


지난 4월의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이준익 감독의 신작 <라디오 스타>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 유재원 의상팀장은 성수동의 워싱 공장을 찾았다. 월요일 1차 피팅 때 쓸 청바지를 워싱하기 위해서였다. 지인의 소개로 단벌 워싱도 친절히 해줄 공장주인을 찾아갔다. 주인은 바로 난색을 표했다. “일반 면이면 단벌이라도 해드리겠는데 청바지는 곤란해요.” 주인보다 더 곤란한 얼굴이 된 유재원 팀장이 이유를 묻자 주인이 답한다. “법적으로 청바지 워싱 약품은 서울시내에서 사용 못하게 돼 있어요. 의정부나 부천으로 가셔야겠는데요.” 사흘 뒤인 1차 피팅 때까지 남은 일정은 워싱 말고도 수두룩했다. 제작실에서 의상 샘플을 찾아온다거나 동대문에서 원단을 구매하는 건 작은 스케줄이다. 이 와중에도 유재원 팀장은 직접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인공인 로커 최곤(박중훈)이 80년대에 입었을 만한 옷의 간지(느낌)를 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느낌의 청바지 천이 없다. 그러니 직접 워싱하는 수밖에.”

이는 사소하고 평범한 예에 불과할지 모른다. 영화 속 의상이 화려함과 새로움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할수록 그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진풍경이다. 세상의 모든 옷감, 세상의 모든 색깔, 세상의 모든 실, 세상의 모든 단추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 바로 그 영화 속 그 배우가 연기할 그 인물에 꼭 맞도록 조합해낸 것이 영화의상이다. 이 세상에 단 한벌뿐인 그 옷의 탄생 과정은 그러므로 일반화할 수도 없다. 충무로의 주요 의상 스탭들로부터 에피소드 조각들을 모아 누덕누덕, 거칠게 기워볼 따름이다.

1. 비주얼 컨셉 잡기 _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느낌을 찾아라

“<형사 Duelist> 때 만난 이명세 감독님은 대본과 함께 비주얼 컨셉에 관한 자료를 엄청 많이 주셨다. 본인의 요구사항을 담은 것들이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그리고 서울의 기억>이라는 사진집도 있었고 만화책도 있었고 축구나 럭비 장면들을 담은 사진, 선무도 사진들까지 있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각 나라의 울긋불긋한 민속복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자료였고, 만화책과 사진들은 <형사 Duelist>에서 선무도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관한 참고자료라고 했다. 감독님이 자기가 구현하고자 하는 비주얼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제시를 한 셈이다. 이런 자료들을 주면서 감독님이 한 말은, 퀼트가 좋다는 거였다. 여러 천들을 다양하게 섞은 조각보의 느낌이 너무 좋다고, <형사…>의 의상이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정경희)

정경희 의상감독은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본 사진 중 하나를 떠올렸다. 차도르를 두른 아랍인이 하얀 건물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새파란 하늘과 고동색의 땅, 하얀 벽과 아랍인의 피부빛 그리고 건물 콘크리트의 재질과 차도르의 느낌과 땅의 질감이 어우러진 이 사진은 이명세 감독이 주문한 퀼트의 이미지를 정경희 의상감독의 마음에 한번에 와닿게 한 자료가 됐다. “왜 조각보를 제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 다른 천이 모자이크로 어우러진 모양을 상상하니 내가 본 그 사진처럼 이국적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국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것을 이국적으로 보는 시각.”

영화의상의 컨셉은 이렇듯 하나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의상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의상을 떠올리기보다 시나리오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느낌 하나를 얻고자 한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올드보이>의 시나리오를 읽고 난 느낌을 ‘퍼즐’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했다. “시나리오에 ‘보라색’과 ‘격자무늬’란 단어가 가장 많았다. 감독님들은 본인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시나리오 안에 색이나 형태에 대한 묘사를 집어넣는다. 가느다란 손가락, 긴 머리카락 등 지문상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있다. <올드보이>의 시나리오에는 격자무늬란 단어가 가장 많았고 그래서 패턴을 넣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원칙이 정해지면 해당 영화의 특수성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웰컴 투 동막골>의 의상을 담당한 권유진 의상감독은 ‘따뜻함’이라는 대원칙하에 1950년대 스타일을 재현하면서 고증의 과제와 더불어 동막골의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했다. “동막골은 고립된 곳이고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물량이 풍족하지 않으니 천을 하나 만들어도 서로 나눠 가졌을 것이고, 화려하고 다양한 염색료를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막골 주민들의 컬러는 풀색이나 흙색 등 자연의 색을 따르면서 10가지 색 내외로만 작업했다.” 빠듯한 자급자족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또 다른 흔적은 저고리 소매마다 이어붙인 색색의 천이다. “몸이 자라서 옷이 작아지면 조각보를 덧대어서 계속 입었을 거라고 상상했다.” 늘 산을 타고 다닌다는 점을 떠올리면 옷자락이 늘어져서도 안 된다. 동막골 주민들의 저고리에는 옷고름 대신 매듭단추가 달려 있고 바짓단은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시대물이라 해도 시대 고증보다 앞서야 할 목표는 영화적 리얼리티다.

2. 캐릭터와 배우 분석 _ 그(그녀)에게만 허락되는 옷 탐색

“<올드보이>의 미도 역 캐스팅 오디션이 끝나고 나서 강혜정이란 배우를 만났다. 류성희 미술감독과 나의 바람은 미도라는 캐릭터가 섹시하면서도 롤리타 콤플렉스를 일으킬 만한 인물이면 좋겠다는 거였고, 강혜정은 인형처럼 예쁜 스타일의 배우는 아니었다, 미도는 굉장히 소외된 아이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졌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배우 강혜정만의 매력을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조상경)

영화의상은 영화미술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옷을 입는 주체와도 떼놓을 수 없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미도의 매력이 곧 강혜정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강혜정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고자 고심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방법이 공간 컨셉과 미도의 컨셉의 일치였다. <올드보이>의 전체 비주얼 컨셉을 지배하는 ‘패턴’의 개념을 미도의 의상에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실내 공간이 등장할 때는 벽지에 패턴을 주었다면 야외장면에서는 미도의 의상에 패턴을 주는 식이었다. 그 패턴들이 잘 보이도록 의도했다. 그래서 미도의 경우 밖에 있건 안에 있건 늘 패턴과 함께 있게 된다.” <올드보이>의 강혜정이 다른 출연작들에서보다 유난히 독특해 보인 까닭은 분명 이 패턴의 영향이 크다.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와 강혜정만이 가진 개성이 맞물려 이질감과 비현실감이 뚜렷해지고 이것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강렬하고 질긴 인상으로 남는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역을 이영애가 아닌 다른 여배우가 했을 경우 그녀의 물방울 원피스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뜻과 같다. “이영애란 배우가 갖고 있는 대사톤, 캐릭터, 이영애만이 풀 수 있는 금자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난 이영애만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영화의상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서만, 그리고 오직 그녀 혹 그에게만 허락되는 옷이다. 그걸 계산하고서 조명을 쓰고 필름을 쓰고 공간을 만드는 거다.” 비슷한 이유로 정경희 의상감독은 <혈의 누>를 작업할 당시 박용우가 맡은 인권의 의상 컬러를 여러 번 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인권은 서자 출신의 약점을 지닌 채 지방 유지의 아들 노릇을 하는 유약한 캐릭터다. 이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색의 의상을 제작했는데 막상 피팅을 해보니 배우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다. “박용우씨가 얼굴이 굉장히 희어서 밝은 색이 어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더라. 색을 더 진하게 만들어 입히니까 그제야 또렷하고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이렇게 해서 인권은 연약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주로 입는 밝은 색 옷보다도 수박색, 진한 옥색, 겨자색 등 짙은 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각 배우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감독이나 미술감독과의 소통만큼이나 중요하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영화의상을 통한 캐릭터 설명을 80% 정도만 염두에 둔다고 덧붙였다. “나머지는 배우의 몫이다. 의상이 나서서 윽박지를 것은 아니다. 배우가 연기력으로 채워줄 수 있다면 의상은 더 죽여도 된다.” 박중훈은 <라디오 스타>의 최곤 역할 때문에 본인의 취향과 상반된 역삼각형 실루엣의 복고풍 의상을 입어야 했다. “옛날에 이런 옷 입은 사람들 보면 친구도 안 했다”고 농담처럼 말하던 그는 어느 시점부터 이렇게 말을 바꿨다. “이 옷을 안 입으면 연기가 안 나온다. 너무 동화돼서 오히려 편하다.” 의상은 배우의 연기가 최상에 이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