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부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삼거리극장>은 음습하고 기이한, 하지만 귀엽고 유머러스한 뮤지컬 영화다.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들이 서로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기이한 영화는, 다양한 영화와 책, 음악, 그림을 끌어들인 무규칙 이종 뮤지컬이다. 영화를 보겠다고 집을 나간 할머니를 찾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낡은 극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녀 소단의 모험담 <삼거리극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책없이 특이한 <삼거리극장>을 만든 감독과 주요스탭들을 만나 영화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ps) <삼거리극장>은 부천영화제 개막식 상영 뒤, 8월 말 개봉예정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소단이 우산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 집을 나선다. 흠뻑 젖은 피아노 소리가 소녀를 졸졸 쫓아가면 흡사 서부극에 나오는 마을처럼 너른 흙길이 그 앞을 지나가는 낡은 극장이 나온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극장, 어디에도 없는 할머니를 찾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과 유사가족처럼 어울리는 소녀, 드라큘라 같은 깃의 코트를 입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 극장은 버려진 미로처럼 복잡한 계단과 비밀스러운 방들로 이루어져 있고, 소녀가 오도카니 텅 빈 밤의 극장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면 옛 악극단 배우들 같은 과장된 모습과 행동의 혼령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단은 밤의 극장에서 활개치는 혼령들이 자신의 할머니와 60년 전에 영화를 찍은 배우들이며 극장 사장이 그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단은 할머니가 출연했다던, 최초 상영 때 불미스러운 사태로 상영이 중단되었다는 조선 최초의 괴수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 필름의 행방을 찾아 극장을 뒤진다.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참을 수 없이 따분한 21세기!
그렇습니다. 그녀는 파렴치하게도 현/대/인이었던 것입니다.” - <삼거리극장> 중
전계수 감독의 데뷔작 <삼거리극장>은 국내 최초의 뮤지컬영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판타지다. “너무 귀여워졌다”는 게 전계수 감독의 불만이기는 하지만 <삼거리극장>은 음습한 인상의 작품이다. 감독이 <삼거리극장>의 시나리오 초안을 쓸 때 정기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아트록 밴드 ‘데빌 달’(Devil Doll)의 영향 때문이다. “2002년에 <삼거리극장> 초고를 썼는데, ‘데빌 달’의 음악을 영화화하고 싶었다. ‘데빌 달’의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 미술, 이야기, 심지어 대사하는 법에까지 그대로 옮겨졌으면 했다. 짧은 곡이 20분 정도이고, 보통 40∼50분짜리 곡 하나만 수록된 데빌 달의 음악은 서사적이고 뮤지컬적인 인상이 강하다. 가사도 묵시록적이고.” 감독뿐 아니라 김동기 음악감독 역시 데빌 달의 음악을 사랑했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데빌 달을 이야기하며 시나리오를 건넨 전계수 감독 때문에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도 전에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뮤지컬 영화로 입봉한 전계수 감독과 김동기 음악감독은 대학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 다 철학을 전공했다. 전계수 감독은 연극 연출, 연기, 미술 평론 등의 경력이 있으며, 대학 졸업 뒤 취직해서 호주와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을 관두고 귀국해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한겨레 영화학교를 다니며 단편영화의 연출, 각본 작업을 하다가 영화 <싱글즈> 조감독을 거쳐 직접 시나리오를 쓴 <삼거리극장>으로 연출 데뷔를 했다. 김동기 음악감독은 <썸> <발레교습소>의 작곡에 참여했으며, <삼거리극장>이 음악감독 입봉작이다. <삼거리 극장>의 뮤지컬 곡을 쓰는 과정에서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곡을 써 온 황강록 씨 역시 힘을 보탰다.
이야기가 아닌 분위기를 위한 뮤지컬
문제는, 초고 시나리오로는 제작하겠다는 영화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사악한 분위기가 넘실대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귀여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제작사에서는 “재미있지만…”이라면서도 시나리오를 돌려보냈다. 영진위의 저예산 HDTV영화 제작 지원금 3억원을 받게 된 뒤, 한 영화사에서 유명한 스타 연기자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워 50억원쯤 되는 대규모 뮤지컬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원래 시나리오와는 맞지 않아 거절했다. 그렇다고 시나리오 수정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삼거리극장>은 9억원의 예산을 들여 상업영화로 소비될 영화였고, 그렇다면 음침하고 칙칙한 분위기를 고수할 수 없었다. 결국 <삼거리극장>은 키치적이고 팝아트적이고, 위악의 제스처가 처음 생각보다는 앙증맞게 표현된 영화로 태어났다.
인물간의 대사나 상황 전개는 처절한 순간에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좀더 적극적으로 유머가 개입했다면 키치적인 느낌이 강하게 살았으리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전계수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환상적인 장면이나 노래, 유머를 던져준다. 소의 머리, 인간의 몸을 한 영화 속 영화의 괴물 미노수가 갇힌 복잡한 지하감옥을 “미친년 팔랑머리같이 얽히고설킨 지하통로”라고 비장하게 읊는 변사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피맺힌 한은 육체를 얻어
우리 앞에 사지를 드러냈으니
극장은 화염 지옥으로 변하고
오직 나만이 살아남아
평생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았노라.” - <삼거리극장> 중 <야만의 환영>
뮤지컬영화로서의 <삼거리극장>은 노래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적극적 개입과는 거리가 있다. 전계수 감독이나 김동기 음악감독이 뮤지컬을 특별히 좋아한다기보다는 특정 시대, 특정 뮤지컬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 <헤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좋아하고, 또한 영향을 받았다는 전계수 감독은 록음악을 사용하며, 노래가 이야기보다는 극의 분위기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뮤지컬 대목을 끼워넣었다. 예산문제와 감독의 취향 때문에 실내극처럼 진행되는 뮤지컬 대목들은, 마치 객석에 앉아서 뮤지컬을 보고 있는 듯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한 안무는 일부러 피했다. 안무가 서병구에게 안무를 짜달라고 부탁할 때 “매끈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아니니까 엉성한 춤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원하는 것보다 너무 짜임새있는 안무라서 빼고, 빼고, 더 빼고, 짜임새있는 안무의 느낌을 가능한 한 덜어내 영화에 담았다.
김동기 음악감독은 전계수 감독이 쓴 <삼거리극장>의 초고 마니아였기 때문에 “<록키 호러 픽쳐 쇼>보다 난장판이고, <헤드윅>이랑 섞이는” 난장판 B급영화 냄새가 물씬 나는 뮤지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데빌 달의 고딕적 분위기가 장악한 어둡고 칙칙하며 광기에 휩싸인 음악을 뮤지컬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영화 컨셉이 바뀌면서 음악 컨셉도 바꾸었다. 극중 우기남 사장(천호진)이 부르는 <야만의 환영>이 가장 원래 컨셉과 비슷한 곡이다. 편집과정에서 1곡이 빠져 완성본에는 9곡이 들어가 있지만, 원래 만들어둔 20곡을 모두 살려 3년쯤 뒤 무대 뮤지컬로 올리고 싶은 생각도 있다.
조명의 지배를 받는 미로같은 ’삼거리극장’
노래와 춤이 등장하는 밤장면들은 미술에서도 특별한 효과를 주었다. 백경인 미술감독은 “전생에 화려했다 해도 죽고 나면 외롭고 쓸쓸할 것 같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밤의 시간에는 화려하게, 하지만 낮의 시간에는 공간에 묻혀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낮과 밤 모두 극장 안의 시간이며, 조명의 지배를 받도록 구성되었다. “판타지와 현실의 대비가 너무 강하면 영화가 하나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현실 속의 2005년이 아니라 환상 속의 2005년이라는 생각으로, 기이한 미로 같은 삼거리극장을 만들었다. 삼거리극장이 있는 마을은 마치 만화 <닥터 슬럼프>에 나오는 듯한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고, <삼거리극장> 속 가장 인상적인 뮤지컬 대목 중 하나인 혼령 에리사가 주최하는 만찬장면은 벡진스키의 그림에 나오는 기이한 의자, 인형, 버려진 것들을 살려 표현했다. 마치 목매단 것처럼 천장에 매단 와이어에 묶은 옷들이 걸려 있는 극장 지하 창고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티격태격하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공간으로 태어났다.
“마치 모든 게 꿈만 같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극장을 벗어나도 삶은 계속되지 않고
문을 열면 또 다른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야.” - <삼거리극장> 중
<삼거리극장>은 많은 영화들과 신화, 그림, 음악의 자유로운 혼성모방에서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낯선 세계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져 모험을 하는 소녀라는 주인공 소단의 설정이나, <록키 호러 픽쳐 쇼>처럼 비가 내리는 중에 찾아간 곳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존재들과의 춤과 노래, 흡혈귀영화나 좀비영화에 나올 법한 낮이면 생기를 잃는 극장 속 인물들, <프랑켄슈타인>처럼 태생적 비극을 안고 있는 괴수의 출현,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의 미궁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영화 속 영화….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알려진’ 이야기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겹겹이 쌓여 있다. 어디까지가 의도이고 어디부터가 우연의 효과인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로카르노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삼거리극장> 편집본을 보더니 영화가 너무 ‘리치(rich)’하다고 하더라. 연상시키는 텍스트가 너무 많다고, 좋은 뜻 반 나쁜 뜻 반이라고. 이야기의 층의가 너무 여러 겹으로 두꺼워서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 현실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에 발을 딛고 있는 <삼거리극장>의 이런 이야기방식은 시나리오를 쓸 때 방에서 온갖 텍스트들을 두고 혼자 상상하다 지쳐 잠드는 스타일이라는 전계수 감독의 작업방식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책없는 혼성모방이고. 기본적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예를 들면, 삼거리극장 사장 이름은 우기남이다. 그는 일제시대 끝물인 60년 전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는 많아야 40을 넘지 않은 것 같고, 드라큘라처럼 깃을 세운 코트를 입고 있으며, 사장실 문에는 ‘사장실’에서 ‘o’이 떨어져나가 ‘사자실’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우기남이라는 이름은, 감독이 평소 좋아한다는 정훈이 만화에 나오는 남기남 감독에게서 차용한 이름이고, 성이 ‘우’씨라는 사실은 그가 만든 소머리 인간에 관한 영화, 그러니까 소를 뜻하는 한자 ‘牛’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이를 먹었으나 늙지 않는다는 설정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이런 차용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특히 이름짓기에서 그렇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미궁의 이중구조
영화 속 무성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은 그리스 신화의 ‘미노스의 미궁’을 각색한 이야기다. 소의 머리, 인간의 몸을 한 미노수는 당연히 미노타우로스를 옮긴 말로, 영화 속에서 ‘쌀의 노여움을 안고 태어난 괴물’(米怒獸)이라고 풀이된다. 미노수를 만든 미친 과학자 표세동 박사는 포세이돈의 이름을, 미노수가 사랑에 빠지는 여인 아랫네는 아리아드네를 변형한 이름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삼거리극장>의 매력은 이 이야기를 차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기대하면, 여지없이 배반당한다. ‘미노스의 미궁’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가장 연민을 느꼈다는 감독의 말은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이 신화와 다른 결말, 전복적인 재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미노스의 미궁은 또한, 소단이 할머니를 찾아 헤매는 극장의 알레고리기도 하다. <삼거리극장>의 환상적인 결말 부분에서는, 미궁을 벗어나 또 다른 미궁으로 이어지는,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미궁의 이중구조가 드러난다.
재밌는 점은,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어떤 이야기를 상상해도 <삼거리극장>의 결말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삼거리극장>은 마지막에 환상적인 결말을 준비하고 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일순 엎어버릴 반전으로 해석될 여지도, 또한 모호하고 몽환적인 열린 결말로 해석될 여지도, 혹은 슬프고 애잔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충분하다. “판타지는 슬픔을 치유하는 물리력이다. 현상이 아니라 물리적인 존재 그 자체다”라는 전계수 감독이 보여주는 소녀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제10회 부천영화제 개막작으로 관객에게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