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유쾌하고 오싹한 장르별 영화 속 설원 여행 가이드
2006-07-25
글 : 김나형

장마도 길어라. 맑은 하늘 못 본 지도 어언 한달이다. 한여름에 보일러 틀고 눅눅한 방에 누워 있을라치면 어딘가 시원하고 탁 트인 곳이 생각나게 마련. 그런 마음으로 여행사에 맞춤형 여행을 신청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비치섬, 발리섬, 피지섬, 주옥 같은 해변을 마다하고 구태여 설원 관광을 희망한 괴짜들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이들 앞에 가이드 육대수라는 자가 나타났더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할 가이드, 육대수입니다. 우선 여러분의 왜곡된 취향에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좋은 데 다 놔두고 발 시린 설원관광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뭔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뭐, 각자 가슴속에 숨겨둔 사연이 있겠죠. 어쨌거나 확실히 해둘 것은 여름에 눈밭이 시원해 보여도 막상 발을 디디면 즉각 상황이 달라지실 거란 겁니다. 벌써부터 손끝이 얼얼해오지 않습니까? 화면으로 보기에나 시원하지 실제로 설원은 고생을 바가지로 할 게 분명할 최악의 여행지예요. 동상, 부상, 골절, 추락, 실종… 딱 골로 가기 좋은 곳입니다. 여차하면 꾹꾹 숨겨왔던 더러운 인간성까지 스스로 폭로할지 모르니 조심하시구요. 하지만 뭐, 기왕 오셨으니까 모쪼록 사진 많이 박으십시오. 여행 다녀와서 남은 건 사진뿐이더라~ 이 말이죠.

준비되셨습니까? 그럼 썰매에 올라타시죠. 우리의 여행을 8마리 개들이 도와줄 겁니다. 아, 여기 벅은 사람 안 가리고 침 세례를 하는 게 버릇이니 개를 싫어하시는 분은 주의하세요. 이놈들이 겉으론 이래 보여도 전설적인 썰매견들이에요. 남극탐험대 소속 개들인데, 당시 거대 저기압 때문에 갑자기 철수하느라 이놈들끼리만 기지에 남겨졌죠. 아, 들어보셨다구요? 그랬을 겁니다. 뉴스에도 꽤 여러 번 나왔거든요. 겨울 내내 저희들끼리 160일이 넘도록 지냈다는 거 아닙니까. 갈매기며 고래 고기며 뭐 이것저것 먹으며 살아남았던 모양이더군요.

신기한 동물 나라 - 자연 다큐멘터리의 금광

<얼음 왕국: 북극의 여름 이야기>

각설하고. 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세요. 저기 언덕 위에 뭔가 하얀 게 꾸물꾸물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제 좀더 확실히 보이실 겁니다. 이제 굴에서 완전히 나왔어요. 막 겨울잠에서 깬 북극곰입니다. 새끼를 두 마리 낳았군요. 앗, 고객님, 어디가십니까, 위험해요! 네? 콜라를 사요? 아니, 무슨 북극곰한테 콜라를 사요! 네? 거참 답답하시긴. 그 코카콜라 모델이라면 칸쿤에서 휴양하고 있을 겁니다. 출연료가 얼만데 이런 오지에서 굴 파고 새끼 낳으면서 살겠습니까? 몸매 망치게. 저 곰은 다큐 전문 곰이에요. 독립영화배우 비슷한 거죠. 북극곰이 털이 북슬북슬해서 성격 좋아 보이겠지만 저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실 겁니다. 확 뛰어와서 덥치는데 얼마나 빠르고 힘세다구요. 아, 마침 새끼 바다표범을 잡았군요! 얼굴에 피칠갑하면서 뜯어먹는 것 좀 보세요. 무섭기로는 사실 지금 먹히는 바다표범도 마찬가집니다. 곧 터질 듯한 순대처럼 생겼지만 마음만 내키면 배를 대고 확 미끄러져 오는데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빽빽이 박혀 있죠. 우리 썰매 끄는 마야도 저 바다표범한테 물려서 지금 다리를 저는 겁니다. 모쪼록 다가가지는 마시고 멀찌감치서 구경하세요. 앗! 저기 바다쪽을 보세요. 일각고래가 나타났어요. 유니콘처럼 긴 뿔을 달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빨이 돌출한 거라고 하죠. 아주 희귀한 고랩니다. 오늘 좋은 구경 하시는군요.

저 멀리 일렬로 걸어가고 있는 건 황제펭귄입니다. 각자 잘 살다가 어떤 날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거대한 무리를 짓습니다. 그리곤 저렇게 뒤뚱뒤뚱 알을 낳으러 떠나는 거죠. 변변히 먹지도 않고 몇 달씩 걸어갑니다. 오모크라는 곳까지 가는데 바다가 없는 땅이에요. 거기서 짝짓고 알을 낳은 뒤에, 아비가 알을 품는 동안 어미는 바다가 있는 곳까지 먹이를 잡으러 가는 거죠. 갔다 오는 데 또 몇 달이 걸려요. 네? 오늘은 딴죽거시는 손님들이 많군요. 하지만 정확한 지적입니다. 사실 황제펭귄과 오모크 모두 남극에 해당하는 얘기죠. 여긴 북극이고. 지금 보시는 곳은 인공으로 조성한 펭귄 사파리입니다. 개고생하면서 얼음땅에 왔는데 펭귄 안 보여주면 항의하고 난리나요.

<얼음 왕국: 북극의 여름 이야기>
<펭귄: 위대한 모험>

펭귄 무리 사이를 자세히 보시면 시커먼게 나무판 위에 엎어져서 기어다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랍니다. 제가 매년 여기 오는데 다큐 찍느라고 4년째 저러고 있어요. 이제 펭귄들도 아주 자기 식구인 줄 아는 것 같더군요. 남·북극은 자연 다큐 찍기에 참 좋은 곳이죠. 이만큼 자연 생태계가 남아 있는 곳이 지구상에 이제 별로 없습니다. 아름답고 거대한 풍광과 비일상적인 동물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혹독한 추위가 버티고 있으니 드라마 만들기엔 천혜의 조건인 셈입니다. <펭귄: 위대한 모험> 좀 보세요. 영하 45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생명을 길러내는 본능적인 부모의 행위. 그 자체가 드라마죠. 반대로 <얼음왕국: 북극의 여름 이야기>는 여러 동물 이야기를 이리저리 모아놓긴 했는데 통 졸리기만 하단 말입니다. TV에서 이미 다 본 듯한 얘기고, 그나마도 조작한 드라마 같단 말이죠. 왜 그런 얘기 아세요? <동물의 왕국>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 있잖습니까. 사자가 얼룩말을 쫓아 잡는 장면 같은. 그럴 때 먹이를 노리는 사자, 사냥하는 사자, 먹이를 먹는 사자가 알고 보면 각기 다른 놈이라는 거죠. 그걸 보면서 마누라 몰래 얼마나 콧물을 흘렸는데… 다 거짓이라니! 세상에 믿을 놈이 없습니다.

눈이 내려 더 안타까운 - 멜로드라마의 경유지

<러브 오브 시베리아>

제가 너무 환상을 분쇄했나요? 분위기도 바꾸고 언 몸도 녹일 겸, 좀더 따뜻한 곳으로 잠깐 옮겨봅시다.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를 지나 유서깊은 철로를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가시는 동안 오른편을 보시면 순록 무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모기인데요, 순록 가죽도 뚫고 무는 녀석들이라 한번 물리면 엄청 고생하실 겁니다. 짜증이 바가지로 밀려온다는 표정이시군요. 이런 데까지 와서 모기에 시달릴 줄은 상상도 못하셨을 겁니다. 아, 점점 침엽수 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 눈밭 좀 보십시오. 극지방의 얼음산과는 분위기가 또 다르죠? 아니, 고객님은 또 웬 ‘오겡키데스카’세요. 이리 돌아오세요! 홋카이도에서 오셨다구요? 네? 스토리가 넘 복잡하군요. 뭐, 알겠으니 잠깐만 분위기에 젖으세요, 5분 드리죠. 아, 기적소리가 들려요. 기차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곳 철도로 말할 것 같으면 아쉬운 이별 신 배경으로 인기높은 대표적인 헌팅 장솝니다. 시베리아 유형지와 가깝고 해서 여러모로 애용됐죠. 러시아에서의 사랑이라니 어쩐지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높은 모자를 쓰고 입에서 김을 호호 불며 안타까운 이별을 하다니요. 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면 그런 괴상한 취미를 갖고 있는 커플치고 잘된 사례 없어요. 결국 누가 죽거나 유배가는 건데 뭐가 로맨틱합니까. 실속없어. 알라스카에 가면 아시아크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빙우>라는 영화에서 그리운 사람 만날 수 있는 데로 소개하는 바람에 산악인·관광객 할 것 없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습니다. 그해 전년 대비 조난사고율이 300%를 넘었다니까요, 끌끌. 차라리 이런 데서 연애를 하실 거면 전문가가 되세요. 남극기지 연구원이라거나. 그쪽이 생존율과 연애성공률, 둘 다 차라리 높죠. 그리고 웬만하면 연애는 따뜻한 나라에 가서 하시는 게 낫죠. 브리짓 존스만 봐도 그렇잖습니까. 스키장에서 일이 꼬인 덕분에 다아시와 깨질 뻔 했죠. 반면 태국에 가서는 분위기 좋았잖슴까. 마약만 빼면.

규칙도 한계도 없이 - 액션 어드벤처의 무대

<아이스 에이지2>

자, 이제 다시 장소를 옮기죠. 다음에 갈 곳은 아틱 리조트입니다. 빙하기안 베이, 에스키모 민속촌, 익스트림 서바이벌 게임장, 나니아 포레스트 모두 네개 테마파크로 구성된 썩 괜찮은 리조트죠. 다만 에스키모 민속촌이 국제관광협회의 분쟁지로 등록돼서 갈 수가 없게 됐어요. 민속촌 내 매점 소유권을 놓고 아타나주아, 사오리, 오키 세 부족 간에 알력다툼이 일었다는데, 여하튼 뒤숭숭한 모양입니다. 자유시간을 좀 드릴 테니 빙하기안 베이와 익스트림 서바이벌 게임장 중 선택하셔서 자유시간을 좀 보내시죠. 빙하기안 베이는 빙하 시대를 테마로 한 물놀이장입니다. 123미터 길이의 세계 최장 물미끄럼틀을 비롯, 60여개의 크고 작은 풀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어머님들껜 해수 냉찜질탕을 권해드립니다. 다만 심장 조심하세요. 물이 워낙 차니까요. 수영에 관심없으신 분들은 50여종의 빙하기 생물을 관찰하십시오. 매머드, 나무늘보, 이빨 달린 호랑이 등 여러 동물이 있습니다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도토리와 사투를 벌이는 다람쥐의 조상이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동쪽 풀엔 가지 마세요. 악어 비슷하게 생긴 아구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한강에서도 발견되어 영화로 제작됐다고 하던데. 소문 못 들으셨나요? 뭐, 일단 그렇고. 모험과 액션을 즐기시는 분은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가십시다. 룰도 한계도 없습니다. 스키, 보드, 패러글라이딩… 뭐든 가리지 않고 이종격투 겨울 스포츠를 즐기세요. 빨간 모자 베이커리 할머니가 카리스마 있는 경기를 펼치기로 유명합니다. (그때 썰매 비슷한 물건을 타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털 뭉치 하나.) 아, 저건 흔히 설인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썰매를 타고 있어요! 덩치에 걸맞게 속도가 대단하군요. 몬스터 주식회사 직원들이 가끔 이곳으로 유배되는데, 지금 다시 회사로 돌아갈 문을 찾고 있는 겁니다. 저걸 보고 빅풋이라는 둥 설인이라는 둥 상상의 날개를 펴온 셈이죠. 그럼 모두 즐기시고 5시간 뒤 가로등 앞으로 집합하세요.

네 이웃을 믿지 말라! - 백색 공포의 미로

시간이 정말 훌쩍 가죠? 자고로 눈밭을 뛰노는 즐거움을 포기 못할 즐거움이죠. 가오 잡느라고 강아지나 애들한테 뒤집어씌우곤 하지만요. 땅바닥에는 넘어지기 싫어도 눈에 넘어지는 건 재밌어 보입니다. 눈가루를 휘날리며 눈 위를 질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눈이 주는 유희적이고 환상적인 느낌 때문인데요. 아, 판타지 얘기가 나왔으니 이제 다함께 나니아 포레스트를 보러 갑시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만큼 넓은 숲으로 목양신, 난쟁이, 미노타우르스 등 환상계 종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숲에서 동물을 만나면 꼭 말을 시켜보세요. 보란 듯이 대꾸해줄 겁니다. 비버를 만나거든 집에 따라가셔서 잼과 차도 얻어드세요. 물건을 강매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시구요. 천성적으로 오지랖 넓고 착한 종족이거든요. 저쪽에 보이는 강은 100년간 얼어 있답니다. 그 가운데 거대한 얼음 궁전이 보이시죠? 자, 고대하시던 기념품 가겝니다. 친구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십시오. 다만 흥정만은 삼가세요. 여주인은 독특한 매력이 있는 양반이지만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물건 값을 깎으려다간 돌로 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선물이고 나발이고 집에 가실 수가 없게 돼요. 사람이 무겁겠습니까 돌이 무겁겠습니까? 지금도 겨우 무게를 맞추고 있는데 돌이라도 되시면 개썰매 허용용량 초괍니다. 버리고 가는 수밖에요. (그때 머리에 고드름을 단 나니아의 얼음 여왕이 순록 썰매를 타고 질풍처럼 달려나온다. 놀란 개들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하는데….)

<남극일기>
<나니아 연대기>

(철푸덕!) 으으으… 여러분 모두 무사하십니까? 번호 좀 불러보세요. 옆 사람 다 있는지 챙기시구요. 근데 여기는… 헉! (목소리를 낮추며) 여러분 큰일났습니다. 말로만 듣던 나니아의 후문으로 나온 것 같군요. 옷장문이죠. 여기로 나간 자는 살아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헉! 쉬이이잇! (덩치 크고 눈빛이 심상찮은 여자가 깁스를 하고 휠체어를 탄 남자를 데리고 들어온다.) 모두들 바짝 엎드리세요. 전설의 애니를 직접 보게 되는군요. 상황은 암울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사이코 스토커의 할머니급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집에 가면 가장 자랑하실 모험담이 될 겁니다. 집에 가실 수 있을지는 의문…. (남자를 침대에 묶어놓고 망치로 그의 발을 내리치는 애니. 숨어 있던 사람들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서로 밀치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며칠을 달렸을까. 애니는 더 이상 좇아오지 않으나 밖은 끝없는 눈밭…. 지지도 않고 머리 꼭대기에 붙은 해가 광적인 느낌을 더한다. 허기와 추위, 졸음과 피곤함에 지쳐가는 사람들. 도망칠 때 다친 상처로 털썩 주저앉은 한 여행객쪽으로 가이드 육대수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가죽수첩 하나가 들려 있다.) 이상하지? 난 이 풍경이 정말이지 낯이 익어. 이 바람, 이 공기, 이 햇빛 전부 다! 우리 태어날 때부터 여기 산 것 같지 않아? 니들 안 그래? (그의 이상한 태도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 어디선가 톱까지 빼어들고 점점 다가오는 육대수.) 다리가 아프다잖아. 내가 응급처치해줄게. 아버지 말 들어. 자… 이리… 이리로… 발을 내!

MEC 9시 뉴스를 전해드립니다. 오늘 아침, 미국 미니애폴리스 인근 숲에서 관광객으로 보이는 5명의 인물이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눈밭 한가운데는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으며, 변을 당한 이들은 사각형을 이루어 반듯하게 누운 채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들은 7일 전, 영화 세트장에 난입, 말릴 틈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목격자들은 마침 내린 폭우로 길과 전화가 끊겨 이를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에게서는 16년이나 후인 2006년 날짜의 영수증이 발견되었는데, 발행처는 모란 개시장으로 돼 있어 보안관이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산장에 고립된 채 스토커와 지내게 된 소설가의 이야기를 영화 <미저리>로 만들고 있는 롭 라이너 감독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하다”고 답했고, 제작진들은 새 영화가 대박날 조짐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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