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이름이…. 우리를 응시하는 이 다섯 얼굴을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하고 낯선 인상이 이들을 묶는 유일한 키워드라 생각하면 큰 오해다. 외양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물론이고 나이도, 경력도 천차만별인 이들을 묶는 키워드는 바로 독립영화. 독립영화계로부터 끊임없이 구애를 받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사실 배우의 평범한 얼굴 속에서 비범함을 끌어내고, 친근하지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생생한 캐릭터에게 아낌없이 자리를 마련하는 데 충무로는 비교적 인색한 편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시스템 안에서 많은 돈을 들여 만들지 않는 대신 늘 새롭고 도전적일 수 있는 독립영화라면 얘기가 다르다. 맹봉학, 고서희, 양익준, 양은용, 그리고 정인기. 누군가의 아버지로, 친근하고 개성있는 감초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연으로 충무로의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수시로 얼굴을 비쳐왔던 이들은, 지난 몇년간 짧지만 강렬하고, 완벽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들 속에서 단연 돋보였던 독립영화의 친구들이다. 뭔가를 바라지 않지만, 관계를 통해 서로 성장하는 것이 진짜 친구다. 학생들의 실습작품도 좋고, 패기와 열정이 무기인 비주류영화라도 좋다는 생각으로 친구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아든 이들의 감춰진 이야기를 청해들었다.
삼순이 아버지, 영상원을 평정하다
<트라이앵글 메모리즈>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의 맹봉학
배우 맹봉학을 아십니까. 모르시겠다고요. 그럼 삼순이 아버지는 아십니까. 이쯤 돼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릎을 치게 된다. TV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하고 나서 맹봉학은 확실히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유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가 끝난 뒤 수개월간 독립영화쪽에서 출연 제의가 뜸해졌다. 이제는 모시기 힘든 주류배우가 되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 부르지 않는 것 같다고 맹봉학은 걱정했다. 그런데 그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맹봉학은 지금 독립영화의 그 손길과 공기가 진심으로 그립다.
맹봉학과 독립영화. 그 애정의 관계를 예증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행사가 2004년에 있었다. 이름하여, ‘맹봉학 특별전’. 영상원 학생들이 자신들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배우 맹봉학을 초청하고, 그의 출연작들을 상영회로 꾸민 사나흘간의 시간이었다. “올드보이, 영상원에 뜨다.” 그 행사의 포스터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최민식이 아니라 맹봉학이 이 환호의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물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이뤄낸 약소한 행사고,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하다며 웃고넘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맹봉학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다. “막상 시작하고 나서야 많이 썰렁했죠. 하지만, 과정이 중요한 거니까. 굉장히 감동했어요. 아니 글쎄, 극장 앞에까지 가는데 레드 카펫 대신 빨간 나일론 천을 깔아주더라니까요. (웃음) 누가 그렇게 해주겠어요.”
맹봉학이 처음 독립영화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영상원이 아니라 영화아카데미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아직은 장준환, 봉준호가 감독이 아니라 영화학도이던 시절이다. 1994년 맹봉학의 첫 번째 독립영화 출연작은 당시 영화아카데미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진성(<서프라이즈> <거칠마루>) 감독의 <환생>이었고, 그가 맡은 역은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나는 두명의 사형수 중 한명”이었다. 그렇게 (봉준호, 장준환이 속해 있던) 영화아카데미 11기의 눈에 띄었고, 얼마 뒤 장준환 감독의 단편 <2001 이매진>에서 자신을 존 레넌으로 착각하며 사는 주인공 아들의 아버지로도 나왔다. “봉천동인가 길음동에 사는 인물이었는데, 아들한테 잘해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무능력한 아버지였다”고 기억한다. 영상원과의 인연은 2002년 김태윤 감독의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에서 트위스트 김 선생과 같이 형사로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그해에만 영상원 영화를 7개나 했을 정도”였으니 따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 뒤로 수없이 많은 영상원 영화에 출연했고,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아는, 그래서 학교에 누굴 만나러 찾아가면 인사를 받고 친절하게 안내를 받을 정도가 됐다. 그러니 그를 위한 특별전이 의아한 일은 아니다.
사형수로 시작해서, 형사, 행려, 사장 등등 여러 역할을 두루 했지만 무엇보다 맹봉학은 아버지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독립영화 감독들은, 혹은 영화를 만드는 학생들은 영화 속에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될 때, 그 사람이 좀 허름하거나 어수룩해 보여도 진심으로 착해 보이기를 원할 때 맹봉학에게 달려왔다. 큰 역이건 작은 역이건 최근 독립영화 속 ‘아버지상’으로 맹봉학은 늘 첫손에 꼽히는 배우가 됐다. 최근 출연작 중에는 최원석 감독과 작업한 두편을 자주 말한다. 맹봉학은 <트라이앵글 메모리즈>에서 아들에게 레슬링을 전수해주고 싶어하는 왕년의 프로레슬러 ‘봉학’으로, 그리고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에서는 양아치 아들의 횡포를 피하기 위해 치매에 걸린 척하는 힘없는 아버지로 등장하여 아버지의 자리를 조금씩 비틀어보는 시도도 감행하고 있다. 여하간, 삼순이를 따듯하게 인도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맹봉학의 고민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고정되어버린 이미지다. 그는 아버지도 잘할 수 있지만, 다른 것도 하고 싶다. 그리고 할 수 있는데, 기회가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지만, 올해로 마흔넷인 그는 아직 총각이다. 서른을 갓 넘어서부터 아버지를 많이 해왔지만, 이제 좀 변하고 싶다. 그러므로 펼쳐지는 그의 주장. “나는 너무 평범한 게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그것만큼 변화하기 좋은 조건도 없지 않나요. <여고괴담> 찍으러 갔을 때는 사람들이 다 나를 진짜 선생으로 알았어요. 사람들하고 술집에라도 가면 주인이 항상 나한테만 서비스를 더 잘해준다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내가 술값 낼 사장님인 줄 아는 거예요. 하지만, 또 슈퍼마켓이나 포장마차에 잠깐이라도 있으면 손님들이 내가 주인인 줄 알고 이거 얼마냐고 물어본다고요. 또 한번은 촬영하러 병원에 갔는데 옆에 촬영팀이 있는 걸 뻔히 보고도 그 병원 수간호사가 나를 새로 부임한 의사라고 생각하고 속삭이더라니까요. 저희 병원 시설 괜찮죠, 라고. 첫인상이 항상 웃는 얼굴이라 지금까지 마음씨 좋은 아버지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니 근데, 웃는다고 다 착한가. (갑자기 의자에 척 기대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조폭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러고보니, 독립영화 속 착한 아버지 맹봉학은 이제 악인이 될 준비가 된 것 같다.
맹봉학 필모그래피
장편- <세친구> <노는 계집 창>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베사메무쵸> <하늘정원> <범죄의 재구성> <싸움의 기술> <왕의 남자> 외 다수
단편- <환생> <2001 이매진>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 <트라이앵글 메모리즈> <잘돼가? 무엇이든> <바이칼> <아버지 어금니 꽉 깨무세요>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