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다세포소녀> 촬영현장을 가다 [1]
2006-08-08
글 : 이다혜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다세포소녀>는 특이한 영화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치고는 난데없이 ‘막 나가는’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원조교제, 복장도착자와 같은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학교와 학생에 관해 갖고 있던 그리움이나 환상에 대항하는 동시에, 학교에 관한 발칙한 상상력이 극한에 이른 영화. 어느 대목은 순정만화 같고, 어느 대목은 발랄한 뮤지컬 같다. 원작 만화의 전복적인 아이디어를 살리면서도 만화와 다른 영화적인 요소들이 십분 살아난 영화 <다세포소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네번에 걸친 촬영현장 방문과 추후 취재를 통해 개봉을 앞둔 <다세포소녀>를 들여다보았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저도 오늘 원조교제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담임선생님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놀라지도 않고 대답한다. “그래. 늦진 않았니? 얼른 가봐라.” 인터넷 만화를 원작으로 한 <다세포소녀>는 엉뚱한 상상력이 반짝거리는 영화다. 주황색 미니스커트 교복을 입은 소녀들과 보라색 바지 교복에 천차만별 제각각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는 남학생들이 세상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쾌락의 명문 ‘무쓸모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삶을 경험하는 동시에, 갑자기 모범생이 되어가는 친구들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20 연극반 동아리방

-학교는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이 공존하는 공간

신인배우가 유독 많은 <다세포소녀> 촬영현장에는 1인 다역으로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사람이 두명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름이 이재용이다. 담임선생님을 포함해 각 과목의 선생님을 분장만으로 모두 소화한 배우 이재용과, 배우들에게 일일히 대사톤을 시범으로 보여주는 ‘이감독’ 이재용. 무쓸모 고등학교 연극반의 오디션을 찍는 이 장면은, 각 배우가 거의 한두 마디씩의 대사만 하면 되지만 각자 자신의 성격을 극명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그 ‘한마디’가 OK 사인을 받기란 쉽지 않다. 상황은 ‘콩쥐가 쌀독에 쌀이 떨어진 것을 보다’.

구슬처럼 동그란 눈의 앙증맞은 도라지 소녀는 “쌀이 떨어져또! 오또케! 오또케! 쌀똑 미워할꼬야∼.” 바싹 추켜올라간 눈매에 긴 파마 머리를 한 부회장 소녀는 “염병할. 쌀이 떨어졌잖아. 이런 개떡 같은 일이.” 비슷한 톤의 대사를 서로 논의하고 참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린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두 재용’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신에서 연극선생으로 나오는 배우 이재용은 “이 연기 때문에 안 보이는 데서 선생한테 채찍으로 맞을 수도 있겠다는 표정이라고!”라며 연기의 이해를 돕고, 이감독은 “눈물 날 듯이!”라는 주문과 함께 소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실연해 보였다. 소녀 배우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틈을 타 열심히 흉내를 내며 연습한다. 하지만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어쩐지 처음 연기로 돌아가버린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한창 장난 칠 나이의 배우들끼리 모여 노느라 정신이 없다. “어, 왔네, 백설공주.” “사과 먹고 체했어. 도무지 기다려도 왕자가 안 와.”라는 엉뚱한 대화가 들려온다.

환상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교실 세트에 들어간 책상과 의자들은 모두 직접 만든 것이다. 학교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대신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발랄함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외관은 현실, 교실 내부는 비현실, 교장실(에서 이어지는 기이한 공간)은 초현실. 이형주 미술감독은 실제 학교가 정서적으로 밝고 모범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은 어른들이 학생들의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세포소녀> 속 학생들은 에로틱의 외양 아래 각자 정체성과 자아, 그리고 생활고 등 심난한 고민들을 갖고 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온통 반짝거리는 현란한 교실 내부 사이에 강렬한 대비가 생겨난다. 사실 문화적, 경제적 편차가 큰 아이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학교 자체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고 있기도 하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알록달록한 교실에서 쉽게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촬영하는 상황에서 목격한 가장 특이한 점은 간식의 종류였다. 흔히 나오는 달짝지근한 과자가 아닌, 오이와 당근이 등장한 것. 세트장 구석에 있는 호빵 기계에서는 잘 익은 호빵과 감자가 늦게까지 촬영하느라 지친 스태프의 허기를 달랜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하던 스태프도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해 커다란 통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32 카페 안

-가치 전복적인 원작의 세계관은 그대로

<캔디 캔디> 속 안소니가 실존인물이었다면 아마 <다세포소녀>의 안소니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외모로 봤을 때에 한해서지만. 무쓸모 고교에 다니는 잘살고 잘생긴 소년 3인방, 안소니와 테리, 그리고 우스가 카페에 모여서 ‘노가리를 까는’ 이 장면은 다른 장면들보다 많은 대사량 때문에 촬영이 유독 까다로웠다. 게다가 레스토랑을 빌려 찍어야 하니 0시께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쉴 틈이 없다. 안소니가 두눈박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 운명적 사랑을 느끼지만 두눈박이가 남자임을 알고 좌절하는 대목. 말투부터 동선까지 이감독이 꼼꼼하게 배우들에게 일러주지만 안소니 역의 박진우는 “구슬꿰기”라는 대사에서 자꾸 버벅거려서 “꿰기, 꿰기, 꿰기”라며 몇 번이고 연습을 거듭했다. 콘티가 없이 촬영하는 상황, 대사도 조금씩 현장에서 수정되었다.

<다세포소녀>에는 성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를 필두로 사춘기에 고민할 만한 여러 이야기가 녹아 있다. “성 정체성은 사실 자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소니만 해도, 정신은 두눈박이를 향해 있는데 머리는 안 된다고 하는 거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한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덕에 객관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이야기를 그려낸 것 같다.” 원작 <다세포소녀>를 그린 채정택 작가는 이런 소재들을 만화로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영화화되는 <다세포소녀>가 원작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지 문제로 고민하지 않은 것도, 원작의 가치 전복적인 세계관이 살아 있는 한 다른 요소들이 추가되고 변형되는 건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학교에서는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쉽지 않다. 각오를 단단히 해라. 돈은 더럽지 않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많은 것이 사실 그렇지 않다. 이런 거 말이다. 학교 벗어나면 고통이다. 그 고통을 피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맞서 싸워 적응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고통과 친해지는 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다세포소녀>에 깔려 있는 거다.”

극빈층에 속하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와 1%의 부유층에 속하는 안소니는 각자 설정에 맞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학교는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공간들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산동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안소니의 방은 최고급 모델하우스를 빌려 찍었다. “안소니 방으로 나온 모델하우스는 평당 3천만원 정도 하는 곳이었는데 일주일 만에 분양이 끝났다고 하더라. 모델하우스의 호화로움이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달동네만큼이나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공간이 되는 이유다.” 이형주 미술감독의 말이다.

#105 무쓸모 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리는 강당

-뮤지컬 장면은 귀엽고 엉뚱하며, 섹시하게

졸업식 장면을 찍기 위해 배우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 ‘왕칼 언니’로 등장, 영화 속 출연분 대부분을 여고생 차림으로 소화했던 이원종도 이번 신에서는 외투를 입은 아저씨 차림새다. 교장선생님 역의 박용식은 정정훈 촬영감독이 아역배우로 활동할 때 함께 연기한 적도 있는지라 서로 어색하지 않은 눈치다. 여러 종교반 학생들도 함께 나오는 졸업식이다보니 카메라가 잠시 쉰다 싶으면 강당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다. 확성기를 동원해도 쉽게 조용해지지 않았다. 테스트 촬영 한번 하고 나면 10분 단위로 시간이 뭉텅뭉텅 흘러갔다.

학생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장면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시나리오에서는 간략하게 표현된 이 부분을 찍는 데 사흘이 우습게 지나갔다. ‘왕칼 언니’의 부하로 몇 장면 출연하는 바람에 이날 특이한 분장을 하고 뛰어다녀야 했던 임지우 PD는 가장 정신없었던 촬영 중 한번이 이날이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를 찍는 동안 드라마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이 있어서, 누가 먼저 찍고 다른 촬영장으로 가야 하는지 계속 확인했다. 그런데 이 장면 찍고 나니 배우들이 정말 졸업식한 것 같다고, 촬영 끝난 것 같다고 즐거워하는 걸 보니까 결국 분위기가 좋아지더라.”

뮤지컬 대목이 나올 때마다 배우들이나 스태프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는 영화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무쓸모 고등학교 교가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렇다고 할리우드 뮤지컬처럼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한 안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다세포소녀>는 버라이어티한 쇼를 보여주는 뮤지컬영화가 아니다. 즉흥적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뮤지컬 대목들은 만화에서 생각을 담는 말풍선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뮤지컬 대목이 영화를 화려하게 돋보이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하다기보다 뻔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더 하지 못해서 아쉬운 점도 있고”라며 뮤지컬 장면 촬영 당시를 설명했다.

장영규 음악감독이 뮤지컬 장면에 가지고 있는 생각도 비슷하다. 음악을 만들 때 생각했던 가장 큰 원칙은 “장면·인물·상황에 따라 만들되 상식에 구애받지 말고 작업하자”였다. “상식 파괴적이거나 키치적인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다세포소녀>에는 어떤 음악이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뽕짝이 나왔다 클래식이 나왔다 해도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곡을 상황이나 인물에 맞추어 쓰긴 했지만, 교가는 영화를 대표하는 곡이어야 하기 때문에 발랄하고 유쾌하게 만들었다.”

조직적인 안무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신 귀엽고 엉뚱하며 때로 섹시한 느낌의 춤 장면이 태어난 뒤에는 무용가 안은미와 음악감독 장영규가 있었다. 뮤지컬 장면들의 안무를 맡은 무용가 안은미는 에로틱 렐름교 장면에 직접 등장하기도 했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출연 배우들은 물론 보조 출연자들까지 휘어잡으며 현장 분위기를 주도했다. 미술감독이 ‘초현실적인 공간’이라고 표현한 에로틱 렐름교 장면을 찍으면서 “곰팡이처럼 음습하게” “성적 에너지가 충만한 찰진 궁합을 보여주세요”라는 주문을 던진 사람도 안은미였다. 보조 출연자들이 뻣뻣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유리창 닦냐”는 핀잔으로 웃음을 이끌어낸 뒤, 안은미는 이재용 감독을 무대로 끌어내 시연(?)을 보였으나 이재용 감독은 쑥쓰러워하다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가버리기도 했다.

외눈박이의 외눈이 슬프게, 때로 애처롭게 꿈벅거리는 모습,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업힌 가난이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비롯해 영화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괴물 등 CG가 들어가는 대목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하는 <다세포소녀>는 6개월이 넘는 후반작업 기간을 거쳤다. <다세포소녀>는 2005년 12월23일 크랭크업했고, 8월10일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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