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연애학자 홍상수 따라잡기 [1]
2006-08-23
글 : 이종도

정녕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이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래 10년째 해온 영화 작업에 따르면 그렇다. 신작 <해변의 여인>까지 홍 감독은 줄기차게 연애를 이야기했다. 물론 홍상수만의 영화 구조와 리듬을 제치고 연애만을 이야기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렇다고 홍상수가 영화 언어를 발명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 그의 영화는 연애의 영화라기보다는 연애의 생성과 소멸의 영화이다. 그의 연애영화에는 생활이 없다. ‘생활의 발견’은 끝내 없고 애써 그 발견 이전과 이후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생활을 발견하게 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해변의 여인>까지 연애박사 홍상수의 자취를 따라가보았다. 연애라는 당신의 미래를 앞당기려면 밑줄 쫙. 지금 그 미래를 벌써 끝내버렸다고 해도 밑줄 쫙. 연애는 시작해도 끝나도 늘 현재진행형이기에.

1. 우연이 불륜에 빠진 날

모든 사랑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홍상수 영화에서도 그렇다. 방송국 아나운서가 대기업으로 시집가는 따위의 필연은 홍상수 영화에도 우리 현실에도 없다. 홍상수는 연애를 극한의 조건에 밀어넣음으로써 연애가 무엇인지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 위기와 갈등에 빠졌을 때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듯, 연애도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누설한다. <생활>에서 경수는 두 여자를 차례로 우연히 만난다. 동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거니다 우연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만난다. <해변>에서 중래는 창욱 차에 탔다가 우연히 창욱의 애인(이라는) 문숙을 만난다. 리스트는 끝이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우연히 멋진 여자(남자)를 만나서 커피 한잔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남자(여자)가 수락했다, 그래서 사귀게 되었다 따위의 황당한 일이 현실에 없듯, 이 우연에 엔진을 달아줘야 필연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엔진은 뭐가 되어야 할 것인가. 홍상수 감독 영화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우연이 꼭 불륜과 접속된다. 불륜이라는 불가능한 사랑의 조건이 사랑의 불꽃을 당긴다. 그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극단의 사례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좋아하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 마음은 더 갈망하게 되게 마련 아니던가. 우리는 그저 그 갈망이 어떻게 현실 속에 드러나는지 구경하면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 속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을지, 또는 어떻게 불륜이란 장애물을 뛰어넘을지. 홍상수 영화는 그래서 연애의 속성을 되새기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참고사항: 홍상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은 많이 닮았다. 같은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하거나, 다음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한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수정에게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고 말한다.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는 “죽어버릴까요?”라고 여자에게 말한다. 연애박사 홍상수는 연애의 심리와 행동이 모방 속에서 탄생한다고 보고한다.

2. 안 봐도 비디오傳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영화에서 또는 연극에서 봤는데, 전에 만났던 것 같은데… 따위가 좋은 구실이 된다. 이런 기시감과 착시감이 연애로 이어지는 핑계가 된다고 홍상수는 말한다. 사실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 수작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연애는 이런 뻔한 곳에서 시작해 뻔한 곳에서 끝난다. 이 뻔한 그래서 오히려 즐길 만한 기시감. 행복의 추구는 행복한 기억을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생활>에서 경수 기차 옆좌석에 앉게 된 선영은 경수를 연극에서 봤다며 반가워한다. <강원도>에서 상권은 비룡폭포 가는 길을 자신에게 물었던 여자가 술집 앞마당으로 지나가자 후배를 시켜 말을 걸게 한다. <수정>에서 재훈은 수정이가 어떻게 자기 장갑을 들고 있느냐며 놀라워한다. <극장>에서 영실은 관객인 동수가 따라붙어 한번 만나달라고 졸라대자 “영화네요, 영화”라고 말하며 조건부 승낙을 한다. 왜 유독 홍상수 영화에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독 기시감을 자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제 만나봤음직한 친근한 사람. 그들은 말 걸기 좋은 구실을 준다. 방송국이나 영화관에서 배우들을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인사를 하게 되지 않는가.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극장전>
<극장전>

커피나 한잔 하자고 홍상수 영화 주인공들은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커피는 다음 단계다. 일단 말을 걸어야 하고, 대화를 연장시켜나가야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3분 이상 말을 걸 것인가. 연애라면 귀를 쫑긋거리는 관객의 숙제이기도 하다. 홍상수는 정답 중 하나로 ‘어디서 봤는데’를 제시한다. 또 하나는 어디 가요? 라는 질문이다. <강원도>에서 유부남 경찰관이 여대생들을 처음 부를 때, <극장>에서 동수가 영실의 뒤를 따라가며 “영실씨, 어딜 그렇게 가는 거예요”라고 물을 때 등등. 괜한 질문을 괜히 계속 던져보는 것. 그게 구애다.

3. 해변의 집요맨-성관계는 없다만

남자의 집요함이, 또는 남자로 하여금 집요하게 따라오게 하는 잔머리가 결국 연애를 끌고 간다. 여자는 낚싯바늘을 집요하게 던지고, 남자는 바늘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물론 꼭 이렇게 남녀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남자 중심으로 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권력의 비대칭으로 간다. <생활>에서 명숙은 집요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그 고백을 듣지 못하면서 상처받는다. 권력-매력이 더 적은 사람이 먼저 고백을 하고, 먼저 마음을 다친다.

남자들은 권력의 비대칭을 집요함으로 밀어붙여 평형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집요하기로는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 <수정>의 재훈이 대표선수일 것이다. 경수는 선영의 집을 세 차례나 찾아가고, 동수는 영실을 안경점 앞과 동창 술집 그리고 병원까지 세번이나 쫓아다닌다. 줄기차게 수정을 벗기려 애쓰는 재훈은 그때마다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의욕에 불탄다. 월경이라서, 첫 경험이라서, 자기 이름을 잘못 불러서 등등 수정은 온갖 이유를 대며 거절하지만 재훈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집요맨의 가장 강렬한 퍼포먼스는 <강원도>에서 이루어졌는데, 오직 여대생과 잘 목적으로 술을 깨기 위해 난간에 매달린 경찰관에게 우린 훈장을 수여해야 할 것이다.

<해변의 여인>
<해변의 여인>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그게 필연이라고 우겨대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 그게 연애다. 촛불이 타오르고 재즈가 흐르는 로맨틱한 상상과, 거리를 쏘다니며 누추하고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게 구걸하는 현실은 정반대편에 있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며 수정을 골목길로 끌고 가서는 뽀뽀를 하거나 여관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를 한다. 넉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파렴치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순간 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집요맨들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수정>에서 영수처럼 “너 빤쓰까지 벗긴 거다”라고 우기며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뻔뻔한 사례가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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