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이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래 10년째 해온 영화 작업에 따르면 그렇다. 신작 <해변의 여인>까지 홍 감독은 줄기차게 연애를 이야기했다. 물론 홍상수만의 영화 구조와 리듬을 제치고 연애만을 이야기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렇다고 홍상수가 영화 언어를 발명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 그의 영화는 연애의 영화라기보다는 연애의 생성과 소멸의 영화이다. 그의 연애영화에는 생활이 없다. ‘생활의 발견’은 끝내 없고 애써 그 발견 이전과 이후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생활을 발견하게 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해변의 여인>까지 연애박사 홍상수의 자취를 따라가보았다. 연애라는 당신의 미래를 앞당기려면 밑줄 쫙. 지금 그 미래를 벌써 끝내버렸다고 해도 밑줄 쫙. 연애는 시작해도 끝나도 늘 현재진행형이기에.
1. 우연이 불륜에 빠진 날
모든 사랑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홍상수 영화에서도 그렇다. 방송국 아나운서가 대기업으로 시집가는 따위의 필연은 홍상수 영화에도 우리 현실에도 없다. 홍상수는 연애를 극한의 조건에 밀어넣음으로써 연애가 무엇인지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 위기와 갈등에 빠졌을 때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듯, 연애도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누설한다. <생활>에서 경수는 두 여자를 차례로 우연히 만난다. 동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거니다 우연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만난다. <해변>에서 중래는 창욱 차에 탔다가 우연히 창욱의 애인(이라는) 문숙을 만난다. 리스트는 끝이 없다.
우연히 멋진 여자(남자)를 만나서 커피 한잔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남자(여자)가 수락했다, 그래서 사귀게 되었다 따위의 황당한 일이 현실에 없듯, 이 우연에 엔진을 달아줘야 필연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엔진은 뭐가 되어야 할 것인가. 홍상수 감독 영화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우연이 꼭 불륜과 접속된다. 불륜이라는 불가능한 사랑의 조건이 사랑의 불꽃을 당긴다. 그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극단의 사례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좋아하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 마음은 더 갈망하게 되게 마련 아니던가. 우리는 그저 그 갈망이 어떻게 현실 속에 드러나는지 구경하면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 속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을지, 또는 어떻게 불륜이란 장애물을 뛰어넘을지. 홍상수 영화는 그래서 연애의 속성을 되새기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참고사항: 홍상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은 많이 닮았다. 같은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하거나, 다음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한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수정에게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고 말한다.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는 “죽어버릴까요?”라고 여자에게 말한다. 연애박사 홍상수는 연애의 심리와 행동이 모방 속에서 탄생한다고 보고한다.
2. 안 봐도 비디오傳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영화에서 또는 연극에서 봤는데, 전에 만났던 것 같은데… 따위가 좋은 구실이 된다. 이런 기시감과 착시감이 연애로 이어지는 핑계가 된다고 홍상수는 말한다. 사실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 수작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연애는 이런 뻔한 곳에서 시작해 뻔한 곳에서 끝난다. 이 뻔한 그래서 오히려 즐길 만한 기시감. 행복의 추구는 행복한 기억을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생활>에서 경수 기차 옆좌석에 앉게 된 선영은 경수를 연극에서 봤다며 반가워한다. <강원도>에서 상권은 비룡폭포 가는 길을 자신에게 물었던 여자가 술집 앞마당으로 지나가자 후배를 시켜 말을 걸게 한다. <수정>에서 재훈은 수정이가 어떻게 자기 장갑을 들고 있느냐며 놀라워한다. <극장>에서 영실은 관객인 동수가 따라붙어 한번 만나달라고 졸라대자 “영화네요, 영화”라고 말하며 조건부 승낙을 한다. 왜 유독 홍상수 영화에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독 기시감을 자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제 만나봤음직한 친근한 사람. 그들은 말 걸기 좋은 구실을 준다. 방송국이나 영화관에서 배우들을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인사를 하게 되지 않는가.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커피나 한잔 하자고 홍상수 영화 주인공들은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커피는 다음 단계다. 일단 말을 걸어야 하고, 대화를 연장시켜나가야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3분 이상 말을 걸 것인가. 연애라면 귀를 쫑긋거리는 관객의 숙제이기도 하다. 홍상수는 정답 중 하나로 ‘어디서 봤는데’를 제시한다. 또 하나는 어디 가요? 라는 질문이다. <강원도>에서 유부남 경찰관이 여대생들을 처음 부를 때, <극장>에서 동수가 영실의 뒤를 따라가며 “영실씨, 어딜 그렇게 가는 거예요”라고 물을 때 등등. 괜한 질문을 괜히 계속 던져보는 것. 그게 구애다.
3. 해변의 집요맨-성관계는 없다만
남자의 집요함이, 또는 남자로 하여금 집요하게 따라오게 하는 잔머리가 결국 연애를 끌고 간다. 여자는 낚싯바늘을 집요하게 던지고, 남자는 바늘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물론 꼭 이렇게 남녀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남자 중심으로 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권력의 비대칭으로 간다. <생활>에서 명숙은 집요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그 고백을 듣지 못하면서 상처받는다. 권력-매력이 더 적은 사람이 먼저 고백을 하고, 먼저 마음을 다친다.
남자들은 권력의 비대칭을 집요함으로 밀어붙여 평형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집요하기로는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 <수정>의 재훈이 대표선수일 것이다. 경수는 선영의 집을 세 차례나 찾아가고, 동수는 영실을 안경점 앞과 동창 술집 그리고 병원까지 세번이나 쫓아다닌다. 줄기차게 수정을 벗기려 애쓰는 재훈은 그때마다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의욕에 불탄다. 월경이라서, 첫 경험이라서, 자기 이름을 잘못 불러서 등등 수정은 온갖 이유를 대며 거절하지만 재훈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집요맨의 가장 강렬한 퍼포먼스는 <강원도>에서 이루어졌는데, 오직 여대생과 잘 목적으로 술을 깨기 위해 난간에 매달린 경찰관에게 우린 훈장을 수여해야 할 것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그게 필연이라고 우겨대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 그게 연애다. 촛불이 타오르고 재즈가 흐르는 로맨틱한 상상과, 거리를 쏘다니며 누추하고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게 구걸하는 현실은 정반대편에 있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며 수정을 골목길로 끌고 가서는 뽀뽀를 하거나 여관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를 한다. 넉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파렴치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순간 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집요맨들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수정>에서 영수처럼 “너 빤쓰까지 벗긴 거다”라고 우기며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뻔뻔한 사례가 목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