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연애학자 홍상수 따라잡기 [2]
2006-08-23
글 : 이종도

4. 알코올의 힘

홍상수 영화에서 술자리는 연애라는 메인코스에 이르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애피타이저 코스다. 술 없이는 연애도 없다. 왜냐하면 견고한 이성의 자리를 허물어내야 누군가 스며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은 등장인물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머쓱하고 쑥스럽게 연애의 세계로 들어선 이들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강원도의 힘>
<강원도의 힘>

홍상수 영화에서 술자리엔 1인당 평균 소주 2병이 올라온다. <수정>처럼 주인공이 부자일 경우 양주와 와인이 올라올 수도 있지만 대개 주종목은 소주다. 가장 많은 소주가 올라온 술자리는 <생활>에서 명숙과 경수 그리고 성우가 함께 마신 소주 6병이다. 그 정도 알코올양이면 성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명숙이 경수에게 “우리요… 어색한 거나 깨게 뽀뽀할까요”라는 대사를 던질 수 있다. 술자리가 여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생활>에서 명숙과 경수, <극장>에서 동수와 영실, <해변>에서 중래와 문숙…. 아니, 셀 것도 없다. 100%다. 거의 유일한 실패는 <수정>인데, 그러나 수정도 일단 방 안까지는 들어간다고 봤을 때 술은 그야말로 낯선 타인을 맺어주는 사랑의 묘약이다.

바로 사랑을 맺어주진 않는다 하더라도, 알코올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필수적인 파종 과정이다. <강원도>의 경찰관은 술 취한 지숙을 초소에 와서 재우면서 이후 지숙과 연락하는 사이가 된다. <수정>에서 비교적 순진한 재훈도 술 덕분에 골목에서 과감하게 뽀뽀를 시도할 수 있었다. 물론 술은 악마의 자식이기도 해서 <해변>의 문숙과 <미래>의 헌준을 결정적인 장면에서 쓰러뜨린다. 어디 쓰러진 게 그들뿐일까.

5. 택시 뒷자리는 연인의 미래다. 3-1=2

<해변>처럼 여자 두명과 남자 한명, <미래>처럼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은 연애의 기본 패턴이다. 홍상수 영화도 마찬가지. 욕망은 어떻게 생기는가. 누군가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할 때 생긴다. 또는 누군가 뭘 원하는 걸 보고 나도 그 뭘 원하게 되었을 때 생긴다. 모든 연애영화가 삼각관계인 건 우리 인생의 연애가 잠재적 삼각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이라야 우리는 그 사람을 원하지 않는가. 그런데 홍상수는 한술 더 뜬다. 술자리에 아예 라이벌을 맞붙임으로써 긴장과 갈등을 자아낸다. 어쨌든 침대까지 가려면 한명을 제쳐야 한다. 세명이 모두 들어가 행복하게 누울 수는 없다. 한명은 꼭 탈락해야 하는 3-1=2의 게임. 누가 탈락하고, 어떻게 탈락하는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수정>에서 영수는 갑자기 재훈이 수정을 데리고 택시를 타버리는 바람에 물을 먹는다. <생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성우는 명숙이 “안 내려요?” 하며 경수를 데리고 내리는 바람에 그냥 집으로 혼자 가야 했다. 뒷좌석에 두 사람이 행복하게 택시를 타는 광경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미래>에서 문호는 자신을 ‘빨아드린’ 여학생을 챙기기는커녕 자기 살 걱정만 하는데, 여학생은 택시가 오자마자 냉큼 혼자 가버림으로써 문호를 벌준다. <미래>에서 선화는 헌준과 방에 먼저 들어갔다가 헌준이 자자 마루로 나와서는 문호와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이건 연애라기보다는 선화가 남자들에게 내리는 공평한 벌이다. 자기에게 두루 불성실했던 두 남자들 모두에 대한 징벌. 그로 인한 오랜 선후배 남자끼리의 관계 파탄.

그러나 또 유념해야 할 것들. 홍상수의 영화엔 이런 지저분하고 복잡한 관계에 증오를 표현하는 순수 마초남의 숨은 시선이 있다. <생활>에서 자기 여자친구 다리를 훔쳐봤다며 경수를 혼내던 대구 막창집 손님, <돼지>에서 민재와 보경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효섭을 죽이는 민수, <미래>에서 ‘선생님 너무 저질’이라며 여관까지 따라와 훼방놓는 삐딱이 남학생 등등. 그러니까 3-1=2가 아니라 3-1-(도덕)=2. 도덕을 넘어 연애로 건너가려 할 때 발목을 붙잡는 도덕과 비난과 상식의 매서운 눈초리들. 겁쟁이는 연애를 할 수 없다.

6. 여관의 발견: 매력과 권력 ≥ 고백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택시들. 술을 마시기 때문에 택시를 타야 한다. 대관절 택시를 타고들 어디로 가는가. 쉬러 가야 한다. 홍상수 영화는, 또는 무릇 연애란, 여관까지 가는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또는 생판 모르는 타인이 안정된 성관계를 나누는 사이까지 이르는 여정. 연애는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의 유일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로 치자면 처음 본 사람과 여관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스펙터클 또는 블록버스터다. 호텔에 더러 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펜션과 여관들. 사랑인지 아닌지 몰라서 축축해지고, 이거라도 아니면 안타까워서 촉촉해지는. 그러므로 홍상수 영화에서 또는 우리 일상에서 여관은 사막 같은 목마른 일상에 안식을 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여관은 사랑의 무게 추와 매력의 총량이 어디로 기울어지는지를 알려주는 무서운 시험대다. <수정>의 수정은 그걸 알기 때문에 여관에 가서도 감독인 영수에게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재훈에게도 줄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움으로써 권력의 우위를 계속 유지한다. <생활>에서 명숙은 술자리에서 ‘어색한 분위기 깨는 뽀뽀’로 경수를 리드해나갔다가 여관에서 일어난 다음날 바로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깨닫는다. 우위를 역전시키기 위해 경수의 선배와 여관에 들었다며 경수에게 전화를 하지만 ‘괴물’ 취급을 받고 만다. 고단수는 <극장>의 영실과 <생활>의 선영일 것이다. 잠은 잠대로 자지만 바로 자리를 뜨거나 돌아오겠다고 한 뒤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연애는 권력이 작동하는 예민한 공간이다. 상대에게 먼저 고백할수록, 자신의 속살을 먼저 보일수록 자신은 작아지고 상대는 커진다. 거꾸로 상대에 대해 모를수록 불리해진다. <생활>의 선영은 경수가 중학교 때 알았던 사이란 걸 쉽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경수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구애하게 만든다.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매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 괴로움을 겪고, 자기보다 그게 더 적은 사람을 괴롭히게 되는 게 연애의 잔인한 사정이다. <해변>에서 문숙은 휴대폰을 씹거나 끊어서 창욱을 괴롭히지만, 거꾸로 중래와 선희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 불평등을 접수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서 그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 <미래>에서 선화에게 예고도 없이 유학을 떠나 상처를 준 헌준은, 선화가 마찬가지로 예고도 없이 자기가 잠든 사이에 자기 후배랑 잠을 잠으로써 상처를 받는다. 고소하지, 메롱!

7. 오! 사랑?

연애에 생활이 들어올 자리가 있는가 없는가. 일부 남자와 여자는 이 질문을 끝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연애를 마침내 종료시킨다.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거다. 이별도 연애의 일부다. 연애영화에서, 또는 현실의 연애에서 대부분의 남자들과 일부 이기적인 여자들은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걸 깨닫고 퇴각한다. 또는 책임은 지지 않고 연애의 열매는 다 맛보려는 피터팬들이라 비난받으며 쫓겨난다. 그들의 무책임 때문에 연애가 깨진다. 연애가 깨져 입맛도 쓴데 심지어는 이별의 클로징 멘트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강원도>에서 경찰관은 “지숙씨도 학교 공부 잘하고”라고 작별을 하며, 상권은 지숙이 수술받았다는 데도 굳이 “입으로 해줘”라고 보채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오! 수정>의 재훈이 “내가 가진 모든 결점들 목숨 걸고 고칠게요”라고 말했다 해도 큰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극장>에서 동수는 선배 감독이 사경을 헤매는 병원 앞에서 한숨도 못 잤다는 영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실래요”라고 조른다. “생각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생각이란 게 조르고 보채는 데서 더 성숙한 그런 생각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철부지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우긴다. <생활>에서 경수는 선영에게 ‘사랑해요’라고 상황에도 맞지 않는데 시도 때도 없이 말하고, <극장>의 동수는 술잔을 씹더니 사랑한다고 한다. 좋게 시작한 연애는 있어도 좋게 끝나는 연애는 없다.

<오! 수정>
<오! 수정>

그래서 <강원도>에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며 헤어진 애인의 아파트 벽에 한 상권의 낙서에서 진정성과 애절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조금 더 긴 호흡을 가지면 유부남 상권의 아이와 아내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돼지>에서 효섭은 보경에게 보경 남편을 찾아가 “당신들 부부생활은 거짓이다. 뻔히 알면서도 서로의 발목을 붙드는 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그러니 모두를 위해 우리 보경일 놔줘라”라고 얘기하겠다고 말한다. 효섭이 또 다른 애인 민재에게 뜯어낸 돈 2만원은 그럼 어떤 것일까. 이럴 때 매서운 결단이 필요하다. 그나마 아름다운 끝내기라도 있어야 한다. 더 추해지기 전에. <극장>의 영실이 답한다. “사랑하긴 뭘 사랑합니까, 당신이… 자긴 재미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그러나 연애는 계속 될 것이다. 연애는 남녀의 미래이기에. 또는 오래된 과거이기에. 또는 앞으로 나가도 돌아 나오는 회전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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