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과 진실의 경계에서 유쾌하게 방황하자
소설수업을 받는 학생들에게 나는 말한다. 소설은 갈등구조야. 갈등은 긴장을 조성해. 그 긴장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읽게 만드는 유인요소가 되지. 긴장감이 있어야 가독성(可讀性)이 높아지거든. 근데 말야. 누워서 떡먹기 식의 긴장감 조성방식이 무언지 알아? 젊은 남녀 두명을 떡하니 소설에 등장시켜 봐. 저절로 텐션이 생겨….
그런데 <해변의 여인>에서는 두 남자 사이에 한 여자를 끼워넣었다. 그러니 긴장감이 배가 될 수밖에. 문숙(고현정)은 원래 창욱(김태우)의 ‘이른바’ 애인이라는데, 배역의 중요도로 따져볼 때 아무래도 문숙은 중래(김승우)와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첫날밤부터 자버린다. 창욱이 알았다면 기분이 더러워질 수밖에. 하여튼 그렇고 그런 삼각관계.
얼마 뒤 어럽쇼, 요상한 구조가 떠오른다. 이번에는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된다. 중래를 가운데 두고 문숙과 선희(송선미)가 배치된다. 그러니까 앞구조의 문숙이 뒷구조의 중래가 되고, 앞구조의 창욱이 뒷구조의 문숙이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뒤죽박죽, 단순한 삼각관계 이상이 되려고 한다. 보자. 남편에게 배신당해(바람을 피웠겠지) 죽을 맛인 선희는 중래와 자면서 꿀맛을 느낀다. 배신한 사람은 꿀맛, 배신당한 사람은 죽을 맛, 그렇다면 배신당한 사람이 배신하면 무슨 맛? 이런 문제는 만만치 않다. 마누라가 가장 ‘친한’ 친구와 잔 사실을 안 바람에 이혼한 중래는 ‘친한’ 후배의 여자 문숙과 잔다. 그러면서도 문숙이 예전에 독일에서 깊이 사귀었다던, 알지도 못하는 독일 남자 때문에 괴로워한다. 괴로움을 주는 인간이 똑같은 괴로움을 당한다. 선희와 무엇이 다르랴. 이른바 애인인 창욱을 배신한 문숙은 과연 중래의 배신을 탓할 수 있는 건가? ‘나쁜 기억과 이미지’에 고통스레 휘둘리면서 한편으론 스스로 그와 똑같은 ‘나쁜 기억과 이미지’를 생산해 남에게 제공하지 않는가. 이쯤에 이르면 나와 남의 구분이라는 게 우습기만 하다. 내가 남이고, 그 남이 나이지 않은가. 지탄대상이 곧 자기 자신이다. 누가 누굴 욕해? 그래도 여전히 욕은 하고 집착하고 그러니 영화는 자꾸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많이 웃는다. 자기를 비웃는 것이다. 사실 영화 보러 오기 한 시간 전만 해도 관객은 그와 같은 이유들로 욕하고 집착하고 그랬지 않은가.
문숙이 외치는 진짜, 진실, 별은 어디에 있는가. 있기나 한가. 선희가 외치는 사랑해, 사랑해, 가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주 예쁜 진돗개 똘이는 주인으로부터 버림당한다. 버림을 당한다고 해서 개가 돼지가 되는 건 아니다. 새 주인에게 바다라는 이름을 새로 얻는다고 해서 역시 개가 돼지가 되는 건 아니다. 버림을 받든 안 받든, 이름이 바뀌든 안 바뀌든, 개는 개다. 이 영화에서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실재론과 명분론의 충돌이 일어난다. 젠장, 사랑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있는 거니? 이런 질문에 있다, 없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사랑이 뭔데? 라고 되묻는다면 정말 복잡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복잡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혹할 만큼의 농담과 익살이 복잡한 오랏줄을 경쾌하게 툭툭 끊어준다. 홍상수의 비범성이다.
앞에서 살짝 말했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더도 덜도 아닌 우리를 본다. ‘관/객’인 우리는 영화 속에서 우리를 ‘객/관’화한다. 자기를 보고 자기를 비웃으며 자기를 연민한다. 자기를 발견하는 한 방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토리와 인물에 이입(移入)하는 것을 바라지 않거나 방해한다. 끊임없는 이탈(離脫)적 독법을 요구한다. 자아로부터 자아를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이 영화는 ‘대체 사랑 따위가 뭐지?’라는 질문과 다소 희극적인 설정들을 통해 인식론의 한계를 슬쩍 건드린다. 문숙이 밤바다에서 별과 우주를 얘기하며 “우리가 인정해줘야 세상과 사물에 의미가 있는 거 아니냐” 등의 생뚱맞은 대사를 날리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가 더 깊어진 것 같다. 깊어지면 가라앉아 죽어버리니까 더 경쾌한 익살로 구명대를 삼은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