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얼음공주다.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파헤치는 여자, 상처를 아물게 하기보다는 덧나게 하는 여자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수면제를 털어넣을 정도로 시작부터 극한에 서 있는 인물. 호기심이 생겼다. 밑줄을 쳐가면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이 저며왔다. 배우로서 꼭 하고 가야 할 인물이었다. 송해성 감독님의 감성에 믿음이 갔고, 사형수 윤수가 강동원이라는 사실도 매력적이었다. 상투적이지 않았으니까.
유정의 내면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한 아픔, 엄마에 대한 원망, 윤수를 향한 안타까움. 수많은 감정들이 촘촘히 얽혀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에도 눈빛과 손짓으로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힘들었다. 때로는 촬영장이 사형장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닫혀 있던 유정의 세계가 윤수를 만나며 조금씩 열렸던 것처럼, 난 유정으로서 성장을 거듭했다. 사형제도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던 난 사형수들을 직접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분노도 욕심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얼굴들.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이 천사가 되면 죽인다는 대사가 입가에 맴돌았다. 삶과 죽음, 인간이라는 모든 것이 커다란 물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촬영이 끝났을 때, 난 웃음이 없어졌다.
송해성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진심이 없는 사람은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심. 그 단어가 정답인 것 같다. 누군가가 유정과 윤수의 감정이 남녀간의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난 대답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그 순간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나의 행복한 시간은 이 작품을 만들어가던 모든 순간이었다. 배우, 감독, 스탭 모두가 진심으로,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가 됐다. 난 현장의 공기는 어떤 식으로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확신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당신은 슬프겠지만,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