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불완전한 기억을 다룬 영화들 [2]
2006-10-17
글 : 장미

사례25: 레이첼 칼슨

레이첼 칼슨은 잘나가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녀의 삶은 외동아들이 익사한 뒤 완전히 틀어진다. 레이첼은 과도한 충격과 스트레스, 자기 비하로 인한 일종의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 그녀가 간간이 아들의 귀신과 목도한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신경증적 증상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자신의 무관심과 방기로 아들이 죽게 됐다는 죄책감은 환상 내지는 망상을 보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약까지 복용했지만 증상이 워낙 심각했던 터라 쉽게 차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첼이 신경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남자와의 연애다. 탄탄한 몸매 그리고 훌륭한 패션 감각을 뽐내는 레이첼은 척 봐도 남자에게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기억의심클럽 회원인 그녀는 동호회 남자 절반 이상에게 한번 이상 고백을 받은 신기록의 소유자다). 외딴 해안 마을에서 만난 앵거스는 로맨틱한 바다 사나이로 (연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레이첼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앵거스의 품에 안겨 위로받곤 했다. 하지만 나탈리와 헤어진 나(사례1)처럼 레이첼의 연애운은 좋지 않았다. 가장 친하다 믿었던 친구와 전남편은 비밀스러운 내연관계에 있었고 앵거스 역시 그들에게 고용됐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레이첼은 한동안 더욱 지독한 신경증에 시달려야 했다.

※ 레이첼은 친구와 전남편이 그녀의 병력을 무기 삼아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증상이 주변의 악당들에게 이용될 수 있음에 주의하라.

<하프 라이트>는 어떤 영화?

미스터리스릴러를 주로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 레이첼(데미 무어).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들을 잃은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작은 해안 마을을 찾는다. 죄책감이 컸던 탓일까. 글쓰기에 몰두하려는 계획에도 일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고 아들의 유령까지 보는 지경에 이른다. 우연히 등대지기 앵거스를 만난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몇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자신을 찾으러 온 친구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레이첼은 누군가가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례51: 수진

수진은 예쁘고 젊었다. 그런 그녀가 알츠하이머병 환자라니 믿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건망증이라 여겼으리라. 수진은 남편의 도시락을 싸며 반찬은 빼고 밥만 두개 넣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기도 했다. 흔히 치매라고 부르는 이 퇴행성 뇌질환은 이처럼 사소한 데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름이나 날짜, 장소 같은 것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것이 발전하면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의 일상적 일도 잊는다. 알츠하이머병의 무서움은 원인이 분명치 않다는 데 있다. 병의 진행 속도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 이윽고 죽음을 맞게 된다.

나는 수진을 편의점에서 만났다. 거스름돈을 대신 받아준 인연으로 집에 초대받아 차도 한잔 얻어마셨다. 수진은 남편과의 추억을 잊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남편인 철수는 건축사 지망생으로 다정한 남자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단받은 이 악몽 같은 병 앞에서 수진은 울고 또 울었다. 루시 휘트모어(사례13)와 헨리 로스가 사랑의 장애물 앞에서 더욱 불타올랐다면 수진과 철수는 똑같은 운명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고만 불운한 연인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철수가 집에 돌아와 우리의 관계를 캐묻는 웃지 못할 해프닝 끝에 나는 쫓기듯 그곳을 떠나야 했다(그들을 만난 뒤 생겨난 의문 하나. 사랑의 힘은 망각의 벽을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 이 밖에도 사랑을 미화할 만한 병을 앓았던 다른 여성들, 민희재(<국화꽃향기>, 사례10), 혜원(<연리지>, 사례40), 이아리(<도마뱀>, 사례71)를 참고할 것. 하나같이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지닌 이들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어떤 영화?

철수(정우성)와 수진(손예진), 그들은 이름만큼 잘 어울리는 완벽한 한쌍이었다. 수진의 건망증을 계기로 만난 잘생기고 예쁜 그들은 영화 같은 연애를 하다 결혼에까지 골인했다.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수진의 증상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기 전까지 세상 누구 부러울 것 없었던 그들이었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대.” 병원을 찾은 그녀는 철수에게 말한다. 병은 점차 악화되고 수진의 머릿속 지우개는 마침내 철수의 존재를 지우는 지경에 이른다.

사례69: 에반

에반은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우연히 그 병원의 의사와 친해진 나는 에반을 만나보는 것이 내 증상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에반은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망상을 보는가 하면 있지도 않은 과거를 만들어내곤 했다. 의사는 이 같은 증상이 과거에 발생한 일들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에반의 부드러운 무의식은 그 기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에반의 뇌는 급격하게 손상되고 있었다. 에반은 오랫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고 그의 청춘은 병원에서 피어나 병원에서 사라질 찰나였다.

에반은 첫사랑 켈리와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일기장을 되찾아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가끔씩은 애처로울 정도로 흐느끼기도 했지만 이런 환자들은 병적인 거짓말쟁이이므로 그들의 말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의사가 말했다.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한 외모를 갖춘 에반은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반나절 정도를 보낸 나는 다소 의아해졌다. 에반의 관심사는 자신의 안전이나 미래 혹은 그곳에서 빠져나갈 탈출구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한결같이 켈리나 어머니의 행복을 입에 올렸고 그때마다 간곡한 진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에반의 말이 진실은 아닐까. 불운한 에반에게 어떤 최후가 닥칠는지 자못 궁금하다.

※ 에반을 제이슨 본(사례83)에게 소개해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잠시나마 일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에반은 너무 긴 기간 정신병원에서 소일했다. 에반의 어머니에게 한번 조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커피 전문점에서 일한 바 있는 샘 도슨(<아이 엠 샘>, 사례 75)을 참고할 것.

<나비효과>는 어떤 영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미국에 폭풍이 올 수도 있다는 혼돈이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릴 때 발생한 사건으로 고통받던 에반은 일기장을 통해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과거만이 아니다. 과거의 변화는 현재의 변화까지 불러오고 달라진 현실 속에서 에반은 교도소에 갇히거나 두팔을 잃는 상황에 처한다. 처음보다 더 불행해진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일기장을 펼쳐든다.

사례83: 제이슨 본

제이슨 본은 해변가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우연찮게 그의 카페에 들른 나는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는 사이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됐다. 제이슨은 기억상실증으로 한동안 과거를 잊고 지냈다. 총에 맞은 채 바닷속으로 떨어진 그는 어부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이전 일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기 때문이다. 수진(사례33)에게 큰 슬픔이었던 과거의 상실은 오히려 제이슨 본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좋은 기회가 됐다. 한동안 정체 모를 이들에게 쫓기던 제이슨은 곧 옛일을 청산한 채 인생의 제2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기억상실증이 불행함을 선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사례라고 할까. 더군다나 그의 증상은 나(사례1)처럼 심각하지 않았기에 제이슨은 쉽게 과거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이슨 본은 키는 작지만 체구만큼은 단단한 남자다. 군살 한점 없는 완벽한 근육질 몸매는 한때 유능한 스파이로 이름을 떨쳤다는 거짓 같은 그의 고백을 사실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제이슨은 여자친구 마리 크루츠와 함께였다. 바짝 잘라 올린 숏커트의 마리는 언뜻 소년처럼 보이는 중성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제이슨이 스파이로서의 삶을 그리워할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제이슨은 꿈에서라도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기억의심클럽의 홈페이지를 알려주며 루시 휘트모어(사례13)를 비롯한 그곳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지금쯤 제이슨의 카페는 기억의심클럽 회원들의 아지트가 됐으리라.

※ 기억상실증을 계기로 폭력적인 직업의 소유자에서 얌전한 주부로 바뀐 여자들도 있다. 사만다 케인(<롱 키스 굿나잇>, 사례37), 차은진(<조폭 마누라2-돌아온 전설>, 사례99)을 참고할 것.

<본 아이덴티티>는 어떤 영화?

로버트 루들럼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첩보영화.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러머시> <본 얼티메이텀> 3부작 중 처음 두편이 영화화됐고 마지막 작품 역시 2편을 연출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다.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었다. 유일한 정보인 스위스 계좌번호를 끈으로 스위스를 찾은 제이슨은 알 수 없는 이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돈을 빌미로 동행하게 된 마리 크루츠(프랭카 포텐데)와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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