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조영각. 독립영화에 관한 한 이 사람을 통하면 가장 신속하고 믿을 만한 정보와 해석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된 지 거의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언론 지상에서는 물론이고 집회와 세미나 등 각종 독립영화 행사에 가면 언제나 그를 볼 수 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독립영화의 마당발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당당한 판단과 행동은 그동안 몇몇 이슈를 낳았고, 더 중요하게는 그것들이 진보된 결과를 낳았다. 그가 9월29일 개봉하는 독립장편영화 <팔월의 일요일들>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것도 진보적 이슈의 조짐일까? 독립영화의 마당발이자 <팔월의 일요일들>의 프로듀서 조영각의 스토리를 풀어보았다.
“뭐야, 이번에는 ‘조영각 화보집’ 나오는 거야?” 40여분째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조영각씨를 두고 친한 지인들이 먼 발치에 서서 자기들끼리 한마디씩 농담을 주고받는다. 안 그래도 “내가 아니라 감독이 나가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며 여러 번 말한 터라 조영각씨 본인도 겸연쩍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할 순 없지 않나. 아마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독립영화계의 얼굴(?)답게 혹은 대변인답게 외모에서 내용까지 허술하게 하고 온 준비가 하나도 없다. 대구단편영화제와 제주영화제에 다녀온 직후라 피곤할 텐데도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까지 하고 온 걸 보면 선수는 선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다 빼는데 나는 좀 덜 빼니까 이상하게 얼굴마담이 돼버린 건데, 후배들에게 미안하죠.” 하지만 지금도 인터뷰 등의 이유로 찾아온 매체들 앞에 서로 나서기 싫다고 미루는 수줍은 후배들을 볼 때마다 좌불안석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그의 말. “아니, 사람들 기다리는데 뭐 하는 거야?”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덕분에 그는 이상한 지병도 하나 얻었다. 자칭 ‘유명병’. “내가 유명병에 걸릴 정도라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날 알아보고 저러는 건가 싶어요.” 아닌 게 아니라 인터뷰가 끝난 뒤 길거리에서 마주친 지인이 그에게 말을 건다. “잘 지내세요? 지면에서 종종 뵙고 있어요.” 그랬더니 그의 대답. “… 허허, 또 보게 되실 것 같은데요.” 물론 그가 나서기 좋아 그러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고 싶어 그러는 것도 아니다. 혹은 그가 아니어도 독립영화계가 당장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독립영화에 관한 그의 입과 발을 묶어두지는 못할 것 같다. 독립영화와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지평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반칙성이 아니라면 지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유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 독립영화에 대해, 자신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독립장편영화 <팔월의 일요일들>에 대해 시종일관 열성적으로 작업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 열의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연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유명병에 걸려버린 것일까. 말하자면, 그 병력이 곧 지금의 조영각이다.
# 영화광 조영각
많은 사람들이 93년, 94년경 문화학교 서울에서 그를 처음 본 것으로 기억한다. 달변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있는 목소리로 상영작 소개를 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사람. 독립영화 활동가로서 많이 알려진 그지만 사실 처음은 영화광으로서의 길을 먼저 택했던 셈이다. 영화 애호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에게는 영화를 좋아하는 부모 형제들이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 사랑하던 영화들이 있었다. 특이한 건 그것들 중 한국영화가 많았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는 텔레비전에서 한국영화를 많이 상영했는데 매일 잠 안 자고 그걸 봤어요. 배창호 감독님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도 극장에서 다 봤고요. <고래사냥>은 별로였지만 <기쁜 우리 젊은날>은 그때 나의 어떤 로망이었죠.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할리우드 키드냐, 나는 충무로 키드다 그랬을 정도니까요.”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EBS <시네마 천국>의 공동작가를 하면서 한국영화 부분을 맡은 것도, 그때 먼지 쌓인 비디오들을 뒤져서 이만희, 신상옥, 하길종 등의 작품을 소개한 것도, 그리고 <한국영화 비상구>라는 책을 공동집필하게 된 것도 다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사실 대학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을 하다 보니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어요.” 그러다 <파업전야>를 지키던 사수대 조영각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면서 지키고 있는 거잖아.” 그러고 나서 상영장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 영화를 봤고, 그게 다시 영화와 영화운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경험이 문화학교 서울과의 관계를 맺게 한 것일까. 제3세계 영화나 아시아영화 등의 기획전을 처음 문화학교 서울에서 비디오로 접했을 때 그는 마음을 굳힌다. 그때 처음 본 영화가 헥터 바벤코의 <피쇼테>였고,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는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대학생은 안 된다는 데도 우겨서 학생 자격으로 문화학교 서울 정식 직원이 되었고, 95년 졸업할 즈음에는 학교 친구들에게 “나 취직했다. 연봉(!) 30(만원)이다”라고 말해 부러움(?)을 샀다. 운영위원으로서 그가 처음 했던 영화 소개는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였는데, 비록 데이비드 린치가 꿈에 나타나 “네가 한 해석 그거 다 틀린 거다”라고 하여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열심히 영화 공부했던 시절이었고, 즐거웠던 때였다. 독립영화 활동가로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조영각과 영화(운동)의 인연은 영화 애호가의 성격과 시네마테크 운영자로서의 기질로 먼저 확인된 셈이다. “그냥 영화만 상영한 건 아니에요. 우리끼리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부르면서, 왜 우리가 영화를 상영해야 하는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 토론하는 시간도 많이 가졌으니까요.” 영화를 좋아해야 영화운동의 가능성도 보이는 것 아니었을까. 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생기면서 영화광 조영각은 자연스럽게 독립영화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접점을 찾아나간다.
# 독립영화인 조영각
“장산곶매가 없어지기 전에 문화학교 서울에 와서 영화상영도 하고 그랬어요. 봉준호 감독의 <백색인>, 조근식 감독의 <발전소> 등도 틀었고요. 그때쯤 인디포럼 준비하면서 저는 독립영화하고 관련을 맺기 시작했죠. 문화학교 서울에서 관객과의 대화 마련하면서 독립영화 감독들과 많이 만났으니까요. 류승완 감독의 <변질헤드> <패싸움>을 묶어서 처음 상영한 것도 우리였고. 그때 인맥이 많이 넓어졌어요. 보도자료 들고 언론사도 많이 찾아다녔고요. 잉마르 베리만 영화 트는 데 사진이 없으니까 사진을 오려서 가기도 했고. (웃음)” 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생기고 나서 처음 든 그의 생각은 “문화학교 서울 3일, 한독협 3일” 출근이었다. 그러다 “한독협 사무국장이 됐고, 인디포럼도 바빠졌고, 99년 2월부터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기획하느라 바빴고, 문화학교 일을 빠지게 됐죠.”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인디포럼 프로그래머,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집행위원등 ‘독립’과 ‘인디’자 들어가는 직함만 해도 여러 개를 거쳐 지금 그의 자리는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각종 사안에 대한 영화 세미나에 빠지는 법도 없다. 물론 직함의 수만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무엇보다 독립영화인 조영각은 독립영화에 관련된 어떤 이슈라도 민감하게 대응할 뿐만 아니라, 대처에 능하다. 이를테면, 최근의 일만 보더라도 부천국제영화제 파행 운영에 관련해 독립영화계의 강성 목소리를 주도해냈고,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 때는 배우들 다음 차례에 서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개그맨 ‘희한하네’팀의 일원인 동생 조영빈씨와 그의 친구들을 동원하면서까지) 1인 시위에 나섰고, KBS <독립영화관> 방송 폐지 움직임 등과 관련해서는 <팔월의 일요일들>의 시사회 전날인데도 성명서 작성에 진땀을 뺐다. 거의 언제나 맨 앞에 서서 외치는 사람 중 한명인 그는 “우리도 나름대로 영화해야 하는데 이렇게 만날 투쟁하러 다녀야 되냐?”며 푸념을 잊지 않지만, 어쨌든 사회가 더 나아지지 않는 한 그의 손과 발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푸념을 뒤로하고 바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를 독립영화계의 대변인으로 만든 건 자의 반 타의 반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슈에 동참하기 때문인데, 그러다보니 스스로 이슈 메이커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해프닝에 가깝지만 가장 유명한 조영각 일화 중 하나가 바로 ‘반쓰봉 사건’. 2000년 영화법 개정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원로 영화인이 반바지 차림으로 단상에 오른 조영각씨에게 호통을 쳤고, 그 내용이 언론을 타고 퍼지면서 쟁점이 됐던 내용이다. “사실 무대 올라가는지 몰랐어요. 그때 독립예술제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비오고 그래서 반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왜 옷차림 갖고 그러느냐 그 자리에서 세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참았어요. 나중에는 다들 잘 참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도 두고두고 사람들은 한순간이나마 의복 표현의 자유를 뺏겨버린 이 ‘반쓰봉’의 사내를 기억하게 되었다. “영진위 놀러가면 안정숙 위원장은 장난 삼아 반바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봐요. 이충직 위원장은 너도 이제 높은 사람들 만나고 그래야 하는데 반바지 좀 그만 입어라 그러죠. 그럴 때 김동원 감독님이 반바지 입고 슥 나타나는 거예요. (웃음) 그럼, 그러죠. 저거 보세요. 왜 나한테만 그래요?”
‘반쓰봉’ 사건이 해프닝이었다면 사실상 상영금지에 해당하는 <죽어도 좋아!> 제한 상영가 재심 결정에 항의하여 임정희, 박상우씨와 함께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한 것은 일종의 용단이었다. “한독협 사무국장을 그만두자마자 출근한 곳이 영등위였어요. <죽어도 좋아!>는 내가 알고 있었고. 이게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향방이 결정될 거란 생각은 했어요. 닥치니까 묵과할 수 없었죠. 사회적으로 이슈화됐고, 성명서도 빨리 나왔고, 언론 노출도 발빠르게 했고요. 그때는 하루 60통씩 전화받았어요.” 그 선택에 대해서는 선뜻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고는 말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 한 가지. “<팔월의 일요일들>에 오정세씨가 나와요. 그런데 다른 장편상업영화 출연이 겹쳐서 못 올 것 같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루만 밀려도 타격이 크잖아요. 거기에선 조연이지만 우리쪽에서는 주연인데. 내가 그쪽 제작팀에 전화를 걸었죠. 다행히 그쪽에서 스케줄 조정해서 친절하게 시간 빼주더라고요. 그게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이었어요. (웃음) 한번씩 주고받은 거죠.” 조영각씨가 <죽어도 좋아!>의 제한 상영에 반대한 것은 <둘 하나 섹스>로 이미 한번의 법적 부당함을 겪어본 유경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는 1999년 9월과 12월 영등위의 전신인 공연예술진흥협회로부터 재차 등급보류를 받았다가, 법정 투쟁을 통해 결국 2001년 8월30일 헌법재판소로부터 등급보류 위헌 결정을 끌어내 개봉이라는 결과를 얻어낸 사례였다. <둘 하나 섹스>의 프로듀서가 조영각이었으며, 그 작품은 그가 프로듀서로서 첫발을 내디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