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7년 역사영화 열풍 [1]
2006-10-26
글 : 이종도

‘역사가 노다지여’. 내년 이후면 아마 충무로는 1950년대 후반 한해에 스무편이나 사극이 쏟아지던 사극의 전성기를 재현할지도 모른다. 촬영에 들어간 <황진이>를 필두로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각본 살인사건>이 곧 촬영을 시작하며 <미실> <심청> <리심> <불꽃처럼 나비처럼> 등 파란만장한 여성의 삶이 영화화 작업을 앞두고 있다. 이 밖에 <궁녀> <백탑파> <주공행장> <윤씨부인 가출기> <조선 명탐정 정약용>(가제)을 비롯해 많은 사극과 시대물이 영화화 차비를 서두르고 있다. 충무로가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광맥을 찾아나서고 있는 것이다. 여러 사정이 충무로로 하여금 역사를 향해 뒤돌아보라고 손짓하고 있다.

서점가 대중역사서 인기몰이

“…중략… 황금산(금광) 하나를 발견한 덕으로 최**이도 일세의 명세가 되어 신문기자가 인터뷰 가며 조선일류 사업가 ***씨와도 너나드리로 농을 하게 된 것이다. 도적놈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돈 때문이요 이수탁이가 살부공판을 받는 것도 돈 때문이다. 돈 돈 황금! 얼마나 좋은 것이냐.”(채만식, <황금무용론> 일부, 1933)

<황금광시대>의 저자 전봉관에 따르면 1930년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금을 찾아 나섰다. 소설가 채만식도 1938년 금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봉관의 책은 지금 독서시장의 큰 흐름인 미시사와 일상사의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건 정사와 왕조 중심이 아니라 당대 삶과 죽음의 세목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으로, 피식민지의 압박과 설움만 있을 것 같던 1930년대의 삶을 풍요롭게 펼쳐 보인다. 예전엔 가능하지 않았던 여유이자 남다른 시각이다. 동시에 황금광 이야기를 역사 이야기에 대한 충무로 또는 출판계의 태도라는 시대적 은유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덕일, 전봉관 등 역사 방면에서 스타 작가들이 나오고 있고 역사 교양에 대한 독서 대중의 수요도 부쩍 높아졌다. 의료와 부검 및 살인사건 기록을 다룬 <무원록>, 스캔들과 살인사건을 추적한 <경성기담> 등 대중역사서가 다루는 범위는 날로 확장되고 게다가 당대의 일상과 생활에 대한 심도있는 묘사로 역사 속 삶을 재미있게 파헤치면서 많은 독자들이 지금 역사와 새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황산벌>
<혈의 누>

최근 몇년 사이에 나온 <황산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혈의 누>가 주목받았고 화제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사극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사극 바람의 이유다. 거대한 예산만 들고 망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대신 의상과 세트 등 축적된 기술을 확보한 것도 사극 바람의 배경이다. 씨네2000과 함께 <황진이>, 그리고 <방각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작하는 씨즈엔터테인먼트의 조성원 대표도 동의하는 바다. “두 사극은 작품의 재미와 이야기가 확실하고 관객에게 줄 감흥이 남다르다. 최근 사극의 성공으로 사극이 위험하지만은 않다는 인식이 생겼다. 완성도에 승부를 건다면 흥행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두 작품은 각각 순제작비만 60억~70억원이 들어간다.

<왕의 남자>가 큰 반향점

무엇보다 <왕의 남자>의 큰 반향이 있었다. <왕의 남자>는 사극이 지닐 수 있는 폭넓은 연령대의 관객층 개발 가능성뿐 아니라 <왕의 남자>에 스며든 동성애 등 마이너리티 일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지금 개발 중인 역사물에서 여성성이 가장 눈에 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 속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뜨거운 것이다. <황진이>는 기존의 황진이와 달리 엘리트 아웃사이더들 사이에서 황진이를 말하지 않고 머슴과의 관계 속에서 황진이를 조명한다. <심청> 소설 원작은 범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범한 무대다. <심청>은 10대 시절 중국에 팔려가 갑부의 첩이 된 이후 대만, 싱가포르, 일본을 돌아다는 19세기판 심청의 일대기다. 둘 다 보통 알고 있는 황진이나 심청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판 <델마와 루이스>라 할 <윤씨부인 가출기>, 조선시대 궁녀 자살사건을 추적한 여성 CSI수사대 또는 <여고괴담>의 조선판이라 할 <궁녀>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전근대적 억압 속에서 예민하게 시대에 감응하는 이러한 주체적 여성의 전형은 연인인 프랑스 공사와 파리에 다녀온 뒤 자살하는 구한말 궁중 무희의 이야기 <리심>에서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왕의 남자>
<주몽>

고증을 바탕으로 리얼리티를 살리면서도 현실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러한 노력들은 최근 TV 역사드라마처럼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대한 호소와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동북공정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나 상상적 해결이라 할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처럼 역사적 영웅을 내세우는 영화는 거의 없다. 박노자 교수가 페니스 파시즘이라 칭한 이러한 최근의 TV드라마 경향은 다행히 충무로에선 아직 발견하기 어렵다. 사회적 통합과 민족적 감정의 촉발보다는 오히려 마이너리티의 활약과 그들의 정서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게 <왕의 남자> 이후의 충무로 정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전의 사극영화와 다르다

오히려 최근 역사영화 붐은 김탁환 작가가 말하듯 관객으로 보면 교양으로서의 역사 소비, 충무로로 보면 소재 고갈을 역사에서 해결하려는 시도에 더 가깝다. 내년 봄 <궁녀>를 촬영하는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충무로에서 역사가 보물창고임을 이제 깨닫는 것이다. 현대물에 비해 사극은 미개척 영역과 재해석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의상과 건축 등에서 신선하고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사극 특유의 장점도 여기에 더할 수 있다. 예전의 사극영화와 다른 점을 여기에 병기할 수 있는데 당쟁이나 궁중혈투, 음모론에서 벗어나 당대 개인의 생애와 풍속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 시대를 배경으로 술을 좋아하는 부자 이야기를 다룬 <주공행장> 같은 작품이 좋은 예다. 이 작품의 제작자인 이글픽처스 정진완 대표는 “한국사가 다이내믹하고 파고들 게 많다. 열쇠는 중장년 관객 여부인데 이들을 움직이는 데 역사 소재만큼 보편적인 게 없다. 재미와 감동뿐 아니라 역사적 교훈까지 안긴다”고 말한다.

준비 중인 역사물이 최근 역사물과 다른 경향은 또 있다. 단순히 역사와 픽션을 결합하는 데 그치거나 판타지의 배경으로 삼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충실하려 한다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많은 작품들이 원작 소설을 갖고 있다는 것. 90년대 중반 <태백산맥>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 원작 영화화 바람이 기획영화의 바람 속에 꺾이며 잦아든 이후 다시 부는 바람이다. 이번 바람은 작품성이나 문학성보다는 서사성이 강한 소설들이 영화화되고 있다는 데서 충무로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다. <심청>(황석영), <방각본…> <열녀문의 비밀> <리심>(이상 김탁환), <미실>(김별아), <황진이>(홍석중) 등 많은 작품들이 검증받은 거장 또는 베스트셀러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확실한 오리지널 시나리오보다는 광범한 인기와 인지도를 갖춘 강력한 이야기를 더 신뢰하는 것이다. 검증받은 이야기를 존중하는 최근 충무로의 보수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동아시아 심지어 유럽까지 반경이 넓어지면서 제작비 규모도 기존 사극보다 커졌다. 중국, 일본 등과 공동제작할 <심청>은 300억원, 역시 글로벌 프로젝트라할 <리심>도 250억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들 예정이다. 원작자의 판권도 값이 뛰었다. 5천만원 안팎에서 최대 2억원까지 값이 치솟았다. 1급 시나리오 작가들보다 일부 원작자들이 더 후한 대접을 받는다.

둘째는 장르적 컨벤션에 대해 좀더 집중력을 가지려 한다는 것이다. 미스터리액션을 표방한 <방각본…>과 조선 후기의 선진적 여성이었던 이아영이 과연 열녀로 자살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추적해 들어가는 <조선 명탐정 정약용>(가제), 궁녀의 자살 속에 숨은 비밀을 파헤치는 <궁녀> 등 장르적 쾌감에 호소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풍부한 이야기에 장르의 흡입력이라는 안전장치까지 확보하려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하더라도 역사라는 블루칩에 투자하겠다는 게 채만식 시대와는 다른 충무로 황금광시대의 풍경이다.

■ 제작 중이거나 제작 예정인 사극

영화명/제작사/원작자(원작)/내용/감독/진행상황

불꽃처럼 나비처럼/싸이더스FNH/야설록/명성황후를 사랑하며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사랑/김용균/시나리오 작업 중
황진이/씨네2000, 씨즈엔터테인먼트/홍석중(황진이)/머슴 놈이와 기생 황진이와의 비극적인 사랑/장윤현/촬영 중(2007년 2월 개봉예정)
백탑파/타이거픽처스/없음/위기의 정조시대를 뚫고 나가는 백탑파의 활약과 고뇌/이준익/2007년 상반기 제작
미실/미정/김별아(미실)/신라시대 세명의 왕을 쥐락펴락한 당대의 여걸 미실의 운명/미정/미정
방각본 살인사건/씨즈엔터테인먼트/김탁환(방각본 살인사건)/정조시대 의문의 연쇄살인사건/김태균/2006년 11월 제작
리심/LJ필름/김탁환(파리의 조선궁녀 리심)/구한말 프랑스 공사와 연인이 된 궁중 무희 리심의 운명/미정/시나리오 작업중
리진/싸이더스FNH/신경숙(푸른 눈물)/프랑스 공사의 연인이 된 궁중 무희 리진의 삶/미정/원작소설 신문 연재중
쥴리아/LJ필름/없음/조선의 마지막 황세손과 결혼한 줄리아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미정/시나리오 작업중(2007년 제작)
주공행장/이글픽처스/배삼식(주공행장)/조선시대 금주령을 헤쳐나가는 양조장 부자 이야기/미정/2007년 하반기 제작
윤씨부인 가출기/노비스/없음/조선 후기판 <델마와 루이스>/조운/2007년 제작
궁녀/아침/없음/의문의 궁녀 자살사건/김미정/2007년 봄 제작
조선 명탐정 정약용(가제)/청년필름, 바른손/김탁환(열녀문의 비밀)/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여자의 의문의 자살을 추적/미정/2007년 중순
심청/보람영화사/황석영(심청)/15세때 중국상인에게 팔려간 심청의 매춘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미정/2007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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