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7년 역사영화 열풍 [2]
2006-10-26
글 : 이종도
11년 만에 스크린 재림하는 정조시대

정조시대, 또는 백탑파(북학파)의 시대가 주목받고 있다. 각각 올 늦가을, 내년 중반기에 촬영에 들어갈 <방각본 살인사건>(감독 김태균)과 <백탑파>(감독 이준익) 등이 정조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인화의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영원한 제국> 이후 11년 만에 정조시대를 다시 조명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이자 마지막 개혁의 기회로 불리는 이 시기는 부흥의 시기이자 위기의 시기였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의 치세 24년은 왕조 중흥기이자 정약용과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을 비롯한 백탑파를 배출한 문예부흥기였지만 동시에 서학과 천주교 탄압, 거센 당쟁과 세도정치로 넘어가는 암흑 직전의 시대였다. 정조의 서거에 독살설을 비롯한 음모론의 안개가 자욱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게다가 정조 자신이 수구적 신료들의 협박과 회유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고 수차례 암살 위기에 놓여 있었으니 정조의 시대는 극화되기에 최적인 드라마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시기에 활약한 백탑파는 백탑으로 불리는 원각사지십층석탑 부근에서 자주 모여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을 논한 당대 첨단의 엘리트이자 서얼 출신(박지원은 명문 세가 출신)의 마이너리티 그룹이었다. 보수적 관료들에게 질시를 받기도 했으나 정조의 코드 인사로 발탁되어 개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흡사 노무현과 386세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시대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두 영화는 이 시대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두 시선이다. 한쪽은 최근 몇년간 정력적으로 역사소설을 써왔고 그 작품들이 잇따라 영화화되는 작가 김탁환이고 또 한쪽은 <황산벌>과 <왕의 남자>를 기획해 역사를 낯설게 뒤집어보면서 역사영화의 또 다른 지평을 연 조철현 타이거픽처스 대표이다. 정조의 시대에서 현재의 노무현 정권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의 마음을 읽어보려는 두 가지 시각은 어떻게 다를까. 두 작품 다 시나리오라는 패를 보여 주지 않아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방각본…>은 11월에 서울 근교 및 양수리 세트장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남종우 PD는 “영화는 원작의 수사물 성격보다 미스터리액션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백탑파>는 내년 6월 촬영을 시작한다.

<리심> <나, 황진이> <방각본 살인사건>의 김탁환 작가

“정조 시대에서 386 정권을 보아라”

고전문학 전공, 평론가로 등단한 뒤 소설가로 개종, 수십권의 소설을 낸 김탁환은 문단에서 보자면 백탑파처럼 서자다. 그가 쓴 소설들은 일간지 리뷰엔 나오지만 권위있는 문예 계간지에선 잘 다루지 않는다. 문단의 서자는 충무로에선 신의 손 대접을 받는다. 이미 <불멸의 이순신>과 <나, 황진이>가 TV드라마로, 그리고 글로벌 프로젝트라 부를 수 있는 <리심>을 LJ필름에서, <방각본 살인사건>을 씨즈엔터테인먼트에서, <열녀문의 비밀>을 청년필름/바른손에서, 판타지 소설 <부여현감체포기>를 노비스에서 준비 중이다. 청어람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작품은 박종원 감독의 해방 공간 러브스토리 <낙랑클럽>이다. 고전문학을 공부했지만 지금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과학도를 가르치고 있다.

김탁환이 쓴 <방각본…>은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추리물로, 김탁환의 <백탑파> 연작 가운데 첫머리이며 3년 전에 나왔다. 왓슨 박사와 셜록 홈스 짝패를 닮은 의금부 이명방과 백탑파 김진을 앞세워 방각본 소설 독자들의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친다.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가운데 조선시대판 페이퍼백이라 할 <방각본> 소설의 수용, 북학파와 당대 정세, 정치가 정조의 생존 투쟁 등을 담았다.

-마흔이 되기 전에 서른권 넘는 소설을 썼다. 한 사람이 하기엔 엄청난 작업으로 보이는데.
=20권이 넘어가면서 안 세고 있다. 처음엔 헤맸는데 자료를 모으고 소화하는 노하우가 생기면서 굉장히 쓰는 게 빨라졌다. 고전문학을 공부해서 조선시대 텍스트가 어떻게 배치돼 있고 어디를 뒤지면 나온다는 걸 아니까. 하루에 20매씩 쓰면 일년에 세권이 나온다.

-최근 역사영화가 자주 시도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통틀어 보면 교양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여러 교양이 있는데 아직은 교양을 역사에서 얻는, 그리고 역사가 교양이라 생각하는 단계다. 문화생활은 하고 싶은데 과학을 읽거나 하지는 않지 않나. 그 다음 단계는 과학 교양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예전 역사영화들이 코미디 같은 장르적 컨벤션을 택해 실제 역사보다는 배경을 이용하는 데서 멈췄다면 요즘 준비하는 충무로의 역사영화들은 실존 인물, 실제 역사에 더 근접해 들어간다.
=국학의 수준이 높아졌다. 시대연구가 축적되면서 소설을 쓰다가 당대의 일상에 관해 궁금하면 찾아볼 수 있는 수준에 오른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연구성과가 전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등 고전이 번역되어 인터넷으로 올라오고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연려실기술> 등 개괄적인 역사서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아직 개별 문집들까지 데이터화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지만.

-정조시대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방각본…>은 정조시대가 배경인데 노무현 정권과 386이 대거 유입되면서 개혁을 주도하는 정국과 정조 당시의 개혁 정국을 맞물려 볼 수 있다. 약간의 거리두기를 하면서 지금 시대와 정조시대를 은유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방각본…> <리심> 등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썼나.
=아니다. 많이들 묻는데 나는 처음부터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었다. 심리묘사도 하기는 하지만 헤밍웨이나 발자크처럼 거대 서사를 하고 싶었다. 영화는 소설과 함께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최고의 장르다. 영화는 두 시간 안에 꽉 짠 이야기로 승부를 해야 하는데 나도 꽉 짜게 쓰는 스타일이다. LJ에서 <리심>을 함께하면서 내가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고. 쓰던 대로 하라고 하더라. 오히려 영화를 한다는 의식을 하지 말라는 거다.

-<방각본…>을 추리물 장르로 만든 까닭은.
=감동적인 사람과 사건 등의 소재를 발굴하면 이야기를 끌고갈 하부 장르를 뭘로 갈까 생각한다. 장르가 독자와 대면하는 통로니까. 백탑파는 앞서가는 과학을 받아들인 이들이었고 과학이란 추리와 관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추리라는 장르가 그들의 고민과 업적을 바로 전달해줄 수 있겠다 싶었다. 탐정 노릇을 하는 이명방과 김진은 앞으로 이 시리즈를 계속 끌고가며 백탑파의 중심 인물만 바뀐다. 가령 <방각본…>에서는 박제가, <열녀문의 비밀>에서는 이덕무다.

-백탑파에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 대한 상찬과 비판을 동시에 진행하지만 영웅화 작업이 더 눈에 띈다.
=실제로 백탑파에 애정이 있다. 이 사람들은 야인으로 있다가 나중에 규장각으로 들어가고 결국 정조의 몰락과 함께 몰락하는데, 현실 참여 지식인의 삶을 보여준다. 백탑파 시리즈의 마지막은 그들의 처참한 몰락이 될 거다. 386 정권도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가진 야인들이 권력 중심에 들어왔는데 앞으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이들은 나의 친구이자 선배들이니까. 백탑파처럼 망하지는 말자 이거지. 백탑파는 서얼 집단이었다. 아무리 공부해도 안 되는, 차별이 중첩되는 인물들인데 그 차별 속에서 자신을 키워나가는 게 감동적이다. 그런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비평으로 시작해 소설을 쓰고 있다.
=계간 <상상> 편집위원을 하면서 존 그리샴, 마이클 클라이튼, 아니 에르노, 하루키 등이 좋다고 했는데 기존 문단 비평가들은 이들을 읽은 사람이 없었다. 2~3년 개기다가 이래선 답이 안 나오지, 내가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해군에서 군복무를 했다. 바다가 보이는 연구실이었는데(교관으로 근무) 1천일 동안 날치가 수백 마리 튀어올라오는 것만 보이니까 불현듯 비평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대학원에서 고전문헌 훈련 과정은 장난이 아닐 정도로 혹독해 소설 쓰는 건 엄두도 못 냈었는데.

-역사물을 쓰면 자칫 후손들이 반기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반발을 엄청 받았다. 소설 속의 문중 어른들이 찾아오는데 어쩔 수 없는 거다. 가령 이순신 휘하 장수만 150명인데 10명 정도만 소설에 나오니까 소설에 안 나오는 집안에서 항의하러 찾아왔다.

-리심과 황진이 등을 썼는데 여성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비롯되었나. 그뿐 아니라 충무로에서 여성에 대한 역사적 조망이 활발한데.
=리심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인물인데 천민 출신인데다 여성이라 억압을 훨씬 강하게 받았고, 시대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문제적 개인으로 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거다. 리심, 황진이 같은 이런 독특한 역사적 여성들은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들이고 따라서 왜곡되는 인물들이다. 왜곡된 걸 바로잡고 싶기도 하고, 마케팅적 관점에서 보자면 20~30대 여성 독자들이 주류인데 그들이 먼저 감동해야 하니까.

-90년대 초반에 나온 <상상>은 시대를 앞서기도 했지만 대중추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계간지다. 농담인데, 이인화(류철균)와 함께하면서 당신을 이인화의 아류라고 보는 오해들이 있었다.
=<상상> 편집위원들인 우리가 다 욕먹어서 결국 작가로 나가지 않았나. 이야기와 서사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비평했지만 그게 안 되어서 우리가 직접 써서 증명한 거고. 결국 우리 예언대로 대중문화시대가 된 거고, 할리우드에서 우리 얘기를 사가고 있지 않은가. 이인화가 우파라면 나는 좌파고 민노당원이다. 둘은 전혀 다르다. 그때 <상상>은 이데올로기로 모여 있던 곳이 아니다.

-문학 제도 안에서 당신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작가는 자기 독자를 가지고 가는 거지 비평가를 가지고 가는 건 아니다. 내 경쟁자는 내 또래 작가가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하루키다. 이제 맞장을 떠서 이야기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게 될 거다. 독자는 애국심이 없다.

<백탑파> 제작하는 조철현 타이거픽처스 대표

“서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조철현 대표 사무실의 화이트보드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유득공 등의 인물 캐릭터 설명, ‘독살’ 같은 플롯에 관련된 듯한 어휘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다. 더러는 지우개로 지운 줄거리를 보며 영화 내용을 짐작해보지만 더이상은 알려주지 않겠다고 한다. 당장 정진영 주연의 ‘독한’ 멜로 <매혹>을 먼저 만들 예정이기 때문이다. <황산벌>을 만들면서 일찌감치 비범한 역사적 상상력을 선보인 조 대표의 차기 역사영화인 <백탑파>는 어떤 꼴로 나올 것인가.

-어느 무렵의 얘기인가.
=정조가 1776년 스물다섯살에 즉위했는데 1762년부터 시작할 거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해고, 주인공인 연암 박지원이 스물여섯살 때다. 세상 물정 알 나이지.

-픽션적 상상력과 역사적 팩트를 결합한 역사물이 주요한 흐름이 됐다.
=나는 최근의 팩션 경향에 반감을 갖고 있다. 역사적 현실을 소재로 사용하되 견강부회하여 갖다붙이는 해석에 반감을 갖는 거다. 오히려 당대에 근접해 당대를 최대한 살려내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백탑파>는 그렇게 만들 거다. 새로운 걸 모색하던 사람들의 심리 속으로 더 파고들어가는.

-역사에 대한 소비 욕구는 분명 감지되고 있는데.
=역사는 옛날이야기로 가공할 수 있어 접근이 쉽고 읽을 거리와 볼거리로 소비될 수 있는 대중과 가장 가까운 이야깃거리다.

-역사영화에 충무로가 주목하는 이유가 뭘까.
=사극영화는 스페셜해 보인다. 앞으로 갈수록 특별하지 않으면 충무로에서 살아남기 힘들 거다. 게다가 우리의 삶과 직접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파묻힐 가능성이 있다. 사극은 소재, 세트, 의상이 스페셜하고 이미 검증된 이야기다. 드라마가 주로 다 죽고 사는 ‘센’ 이야기다. 갈등구조가 많고 더 넓은 관객층의 호응을 받기에 유리한 거다. 전에는 예민한 정치적 문제를 못 다뤘는데 소재 제한도 풀렸고 경제적인 여건도 된 거다. 그러나 우린 소박한 조선 후기의 일상, 골목길, 초가, 들판, 마당 등을 되살리며 울림이 큰 이야기를 할 거다.

-유독 정조시대가 조명을 받는다.
=정조는 개혁을 내세운 사람이다. 토지, 경제부터 신분제까지 말이다. 그 시기는 조선의 중첩된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찬스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정조가 닦은 모든 정책이 폐기되었다. 함께했던 관료들은 귀양가고. 지금은 통일부터 복지까지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21세기 초다. 이 기간에 잘해내지 못하면 잘살 수 없다는 인식이 있는데 우리 역사 속에서 뭔가 가능성이 있던 시대를 조명하고픈 열망들이 당연히 있는 거다. 정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제2의 창업을 기도했다. 그의 사후 조선은 국제경쟁력을 잃었다. 노무현 시대와 비교해보는 의미도 있다. 지금 시대는 강력한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누가 앞으로 우리를 먹여살릴지가 궁금한 거다.

-영화 내용은 어떻게 되나.
=백탑파는 그 시대를 치열하게 겪었으며 동시에 잘 ‘놀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그들이 놀았나를 줄거리로 만들려 한다. 왕과 당파간 싸움은 진부한 느낌이 있다. 첨단의 정신을 추구했던 열정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으려 한다. 물론 배경은 엄청나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신하와 신하가 서로 죽이며 피비린내가 나는데 그 위로 시대를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랄까. 우리는 백탑파의 일상과 심리에 카메라를 들이댈 거다. 독살이나 당쟁이 아니고도 거기에 충분히 드라마가 있다. 독살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당대의 감정적 진실이 중요하다.

-조철현-이준익 특유의 서얼에 대한 관심도 백탑파와 맞아떨어지는 거겠지.
=이준익 감독이 특히 관심이 많다. 서자들은 전복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한다. 그런 게 서자정신이고, 서자들이 새로운 세상 만드는 거 아닌가. 박지원만 빼고 백탑파는 ‘신분적 에이즈’에 걸린 서얼들이다. 사농공상으로도 들어갈 수 없고 할 일도 없는 거다. 어릴 적부터 눈치를 받고 자라 예민하며 정조가 말하듯이 그래서 똑똑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황산벌> <왕의 남자> 등이 마이너리티에 주목해 호응을 받았다.
=이제 사람들이 외면적 담론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과 취향을 보기 시작했다. 먼저 마이너리티의 신분적, 운명적 비장감이 드라마적 비장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IMF 이후 신분 이동의 역동성이 불가능해졌다. 젊은이들은 윗세대의 과도한 신분 상승 추구를 포기하고 영화에서 서자나 아웃사이더들의 입장에 더 공감하게 되었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