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눈을 내리깔고 남자 앞에서 참하게 술 따르던 여자들은 없다. 황진이, 심청, 리심 또는 리진, 명성황후, 줄리아 등 최근 충무로 사극의 소재가 된 실존 여성들의 캐릭터가 모두 그러하다. 천출에서 왕족까지 신분은 다양하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시대를 앞서거나 거스르는 주체성을 가졌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했던 인물들이다. 역동적인 여성을 통한 역사의 재구성은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일 수밖에 없다. 여성이 주인공이 되었을 때 추가로 덧입을 수 있는 시각적 화려함도 실존 여성 캐릭터를 사극 안에 적극 부활시키게 되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절제된 도포자락이나 거친 갑옷이 아닌 오색찬란한 비단치맛폭만큼 스크린 안에서 매혹적인 것이 또 있을까. 게다가 이미 <와호장룡> <영웅> <연인> 등이 증명해 보인 것처럼 천편일률적인 할리우드 상업영화들 틈바구니에서 아시아적인 화려함을 뽐내는 것은 해외시장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다국적 프로젝트로 제작되는 <심청>의 홍수영 PD는 “할리우드만해도 아시아의 사극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높다. 우리가 참신함과 더불어 할리우드와 대비해 적은 제작비로 완성도있는 영화를 내놓기 때문이다”라면서 “<심청>도 엄밀히 말하면 한국영화라기보다 범태평양영화(pan pacific movie)에 가까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요소들이 종횡으로 결합된 여섯편의 프로젝트를 상세 소개한다.
양반님들 대신 머슴과 사랑에 빠지다
황진이가 누구냐, 라고 묻는 건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인호, 전경린, 김탁환 등의 작가들이 각각 써낸 황진이에 대한 소설 말고도 북한작가 홍석중의 <황진이>까지 있으니, 문제는 어떤 황진이인가 하는 점이다. 장윤현 감독의 신작 <황진이>는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황 진사의 서녀 출신 황진이는 머슴 놈이의 출생 폭로로 파혼당하고 기생이 되어 살아간다. 알려진 대로 황진이는 외모뿐 아니라 문장과 음율이 뛰어났고 권력이나 명예에 쉽사리 농간당하지 않는 자유롭고 당찬 여성이었다. 홍석중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가르침을 받는 한편 머슴 놈이와의 사랑을 통해 또 다른 인격적 성숙을 이뤄가는 과정이 기운찬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장윤현 감독은 영화 <황진이>에 대해 “황진이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과정은 사랑과 연결된다. 그녀가 안고 있는 정체성의 고민이 양반 김희열과 상민 놈이와 맺는 삼각관계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 사랑만을 보여주더라도 관객은 사회적 고민을 눈치챌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한 바 있다.
송혜교가 황진이 역에, 유지태가 놈이 역에 캐스팅된 영화 <황진이>는 지난 8월 말 촬영에 들어갔다. 파주와 양수리의 세트에서 시작해 한국민속촌, 철원, 서울 평창동을 거쳐 전체 분량의 40% 촬영을 마친 영화 <황진이>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 지역을 담아내는 일이다. 당시 앞서간 문화를 누린 도시 송도에서 기생으로서 화려함의 중심에 있었던 황진이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 <황진이>의 송도 풍경은 그 자체로 중요한 캐릭터다. 조선시대 초 개성의 도시적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촬영을 시작한 장윤현 감독도 “현대물은 장소를 찾거나 만들기가 쉽지만 사극은 제한돼 있다는 점이 어렵다. 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많다”며 송도의 구현을 난제로 꼽았다. 송혜교가 보여주게 될 황진이에 대해서는 “황진이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는 막연하지만 송혜교란 배우를 통해 보여지는 건 매우 구체적이다. 본인도 원했던 역할이라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호흡이 잘 맞는다”는 정도로만 설명했다.
씨즈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영화를 공동제작하는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는 <황진이>에 대해 “한국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될 것”이라며 농담을 섞은 기대를 표하기도 했다. “그 말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상을 포함한 이야기니까. 개인적 전기라기보다 그 시대에 있었던 여자의 이야기다.”(장윤현 감독) <황진이>의 제작진은 현재 전북 광한루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남원, 소쇄원 등을 거쳐 또다시 전국팔도를 밟으며 12월초까지 촬영을 계속할 예정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아트디렉터로 참여한 정구호씨가 이번 영화에서도 미술을 총괄하고 있다. 붉은색을 쓰지 않은 색감으로 화려함을 구현한다는 것이 영화 <황진이>의 미술적 야심 가운데 하나다. 원작 속에는 궁서체 폰트로 한글 풀이된 황진이의 한시를 어떻게 스크린 안에 시청각적으로 녹여낼 것인가도 중요한 고민 가운데 하나라고 감독은 밝혔다. 전체 예산은 약 60억원. 시대에 구속되지 않은 여인 황진이의 당찬 치맛자락과 그 안에서 흐르는 사랑 그리고 우리네 교과서에도 실렸던 아름다운 시구는 목련이 피는 시기보다 이른 내년 2월에 당도한다.
명성황후와 호위무사의 사랑
한국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가끔 하나의 거푸집으로 만들어낸 바비인형처럼 보인다. 제국의 칼끝에 찢기고 불태워진 시대적 아이콘으로서의 비장미는 이미연과 최명길과 강수연을 거치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이 거대한 인물이 조선왕조의 몰락을 대변하는 시대적 아이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콘의 이미지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싸이더스FNH가 준비하고 있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명성황후를 위한 새로운 거푸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와니와 준하>와 <분홍신>의 김용균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명성황후를 사랑한 무사 ‘무명’의 이야기를 다룬 야설록의 동명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전작들에서 여성 캐릭터의 감정선을 촘촘하게 직조하는 실력을 보여줬던 김용균 감독은 “원작이 무협멜로라면 영화는 멜로무협이다. 선이 굵고 남성적인 원작을 좀더 섬세하게 풀어낼 예정”이라고 말한다. 무사 ‘무명’의 활약에 초점을 맞췄던 원작과는 달리 명성황후라는 시대적 아이콘의 재해석에도 많은 신경을 기울일 것이라는 의미다. “명성황후는 익숙한 인물이다. 너무 유명하다보니 모두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뮤지컬과 드라마가 성공을 거둔 것도 부담이 된다.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명성황후의 고정된 이미지를 신선하게 돌파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김용균 감독이 새로운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드는 것은 <와호장룡>의 장쯔이다. 자아를 찾아가는 현대적인 여성상을 고대 중국의 세계 속에 접합한 리안의 접근법처럼, ‘모던한 명성황후’ 상을 창조하는 것이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관건이 될 듯하다. 싸이더스FNH의 윤상오 제작본부장 역시 “현대적인 재해석이라는 지점이 관객에게 얼마나 참신하게 느껴질 것인지가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키포인트”라고 설명한다. 현재 불꽃처럼 뜨겁고 나비처럼 섬세한 명성황후의 모습은 점점 더운 살을 붙여나가는 중이며, <봄날은 간다>와 <외출>의 이숙연 작가와 김용균 감독이 최종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대로 영화는 본격적인 프로덕션에 돌입할 예정이다.
프랑스 공사의 연인이 된 궁중 무희
리심(梨心), 혹은 리진(李眞)은 1860년대에서 1890년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이다. 고종의 궁중무희 신분이었던 그는 프랑스 초대 공사 빅토르 콜랭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렀고, 남편과 함께 19세기 말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불어와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피어난 꽃이었던 동시에, 콜랭의 부임지였던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건너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었던 탐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심의 생애는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조선으로 귀환한 리심은 또다시 고종의 궁중무희가 되었고, 결국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것은 프랑스와의 외교를 위한 수단으로 리심을 이용했던 고종의 야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리심의 자아가 스스로의 열정과 신분의 간극을 견뎌내지 못했던 탓일까. 더 큰 질문은 남는다. 도대체 이토록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근대의 조선 여인이 과연 실존했던 것일까.
역사책은 리심에 대해서 말을 아낀다. 모든 것은 2대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뎅의 저서 <한국에서>(En Coree)에 남아 있는 서너장의 기록으로부터 살을 붙여서 추정한 이야기다. 하지만 조선의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세계의 기운을 보고 느꼈던 리심의 초현실적인 삶은 그저 생애의 흔적을 따르기만 해도 격정적인 사극 한편이 뚝딱 나올 법도 하다. 영화사 싸이더스FNH와 LJ필름이 각각 리심의 생애를 영화화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LJ필름의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을 리심(梨心)이라고 부르고, 싸이더스FNH의 영화는 리진(李眞)으로 부른다. 사료의 부족은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현재 두 작품은 모두 충무로와 문학계의 협연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소설과 김탁환과 함께 영화화를 추진한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는 “리심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상상력을 먼저 투입하는 일이 필요했고, 그래서 소설로 먼저 쓰기로 결정을 했다”고 말한다. 이미 김탁환의 소설 <파리의 조선궁녀 리심>은 3권으로 구성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영화는 소설을 토대로 각색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싸이더스FHN은 <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신경숙의 소설 <푸른 눈물>을 바탕으로 영화 <리진>를 추진 중이다. 싸이더스FHN의 차승재 대표는 “신경숙의 소설은 좀더 여성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작품으로, 개화기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서사를 풀어낼 것”이라는 말로 <리진>을 설명한다. 다른 작가와 다른 감독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날 리심, 혹은 리진의 삶은, 스크린에 오르는 순간에 창조적인 해석의 교차점을 풍성하게 드러낼 것이다.
두 작품 모두 국내시장만을 바라보지 않는 다국적 합작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또 다른 주목을 요한다. 싸이더스FNH는 <리진>을 프랑스 영화사와의 합작으로 만들 계획이며, LJ필름은 미국 제작사와 함께 제작비 2500만달러를 투여해 100% 영어 대사로 이루어진 국제적 역사극으로 <리심>을 탄생시킬 예정이다. 이승재 대표는 “한국과 서구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크로스 컬처(Cross-Culture: 문화횡단) 아이템으로서 리심의 일대기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자신한다. 특히 LJ필름은 향후 한국을 배경으로 한 국제적 역사극을 지속적으로 제작할 계획이며, 현재 진행 중인 <리심>과 <줄리아> 외에도 미국인 여성 선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하나 더 기획 중이다. ‘선교사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작품은 미국인 여성에게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근대를 배경으로, 말괄량이 미국 아가씨가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승재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심각한 방식으로 선교사라는 대상을 풀어내는 <미션>식의 작품이 아니라 가벼운 로맨틱코미디풍의 작품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매춘의 오디세이아’로 다시 태어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황석영의 <심청>은 강변도로 옆으로 나는 오리 몇 마리에서 시작됐다. 오리들은 날아서 어디로 갈까 하는 상념이 넓은 바다로, 서양의 지중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로, 그리고 동양의 지중해 황해를 중심으로 벌어졌을 법한 이야기는 무엇일까로 이어졌다. 작가는 거기서 몸을 팔아 떠도는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고, 이어 맹인 홀아비를 위해 바다의 제물이 된 효녀 청이의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사회제도를 떠받치고 있던 충효에 대한 미담을 걷어내기로 했다. (중략) 묘령의 소녀를 이국 해변가에서 거액의 재물로 사간 장사치들이 어떻게 처분했을지는 예나 지금이나 이윤을 다투는 세상사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효심의 설화를 적나라한 “매춘의 오디세이아”로 다시 써낸 황석영의 <심청>에서 청이의 삶은 열다섯살, 아버지와 뺑덕어멈의 손에 은자 300냥 값어치로 강매되어 중국의 70살 노인의 첩실로 들어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녀는 렌화로 불리며, 이 이름은 일본에 건너가 렌카가 된다. 몸을 들이밀기도 했고 마음을 퍼주기도 했던 청이의 삶에는 오직 잘 먹고 살아보겠다는 의지밖에 없었다.
렌화와 청이라는 두 자아가 내면적 갈등을 빚어내는 순간들이 찰나처럼 묘사되기도 하는 이 원작에서 영화 <심청>이 품어오는 것은 작가가 언급하기도 했던 강렬한 두 단어 ‘매춘의 오디세이아’다. 항로의 개발과 함께 빠르게 서양문물이 유입됐던 격변의 19세기 동아시아를 바탕에 깔고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일본을 거쳐 다시 고국땅에 돌아오기까지 몸을 팔아 독하게 생존해온 심청의 여정을 큰 규모로 그려내겠다는 것이 보람영화사의 구체적인 목표다. 홍수영 PD는 “회사 입장에서도 개인적으로도 오래전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다. 스케일은 크고 여력이 안 돼서 마음에 담고만 있다가 <칠검> <묵공> 등 한·중 합작 프로젝트를 하면서 노하우가 쌓였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과정을 설명한다.
판권 계약은 올해 5월에 맺었고 현재 각색 초고가 나온 상태다. 영화 <심청>은 다개국 합작프로젝트가 될 전망이다. 중국과 일본이 파트너로 붙었고 미국쪽도 예산 및 프로덕션 부문에서 참여하게 될 예정. 심청을 거쳐가는 아시아 각국의 남자들은 현지 배우를 캐스팅하고 제물포, 난징, 지룽 등 원작 속 공간도 바로 그 지역에서 오픈세트를 지어 촬영하는 방향을 모색 중이다. 감독도 국내에서만 찾진 않을 거라고 홍 PD는 말한다.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아시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리안이나 장이모 등 훌륭한 감독들이 많기 때문에 리스트를 넓게 놓고 있다.” 아시아 각 나라의 풍경을 볼거리로서 풍성하게 담고 보편적 재미를 위해 멜로, 액션, 전쟁 등의 장르적 코드를 다양하게 아우른다.
3천만달러짜리 초대형 프로젝트가 될 <심청>에 대해 홍수영 PD는 <게이샤의 추억>을 비슷한 영화로 언급하면서 “서구의 시각에서 판타지화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편견없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라고 다시 구분지었다. “한 여자의 몸에 새겨진 동아시아의 역사다. 심청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서양 개화문물이 거칠게 들어오던 역사적 상황을 놓치지 않고 가는 것이 키포인트일 것 같다.” 영화 <심청>은 2008년 개봉을 목표로 내년 중에 제작에 들어간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남자를 사랑한 줄리아 멀록
조선왕조의 운명이란 잊혀진 설화와도 비슷하다. 누구도 조선왕조의 마지막 핏줄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LJ필름의 <줄리아>는 그렇게 잊혀진 설화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다.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여인 줄리아 멀록은 뉴욕의 한 건축회사에서 한국 남자 이구를 만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지만, 줄리아는 자신이 어떤 역사를 끌어안은 남자와 평생을 기약했는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이구는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고종의 3남인 영왕의 아들이었으며, 조선왕실의 비극을 핏줄속에 담은 남자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이구는 조선왕조의 후손이라는 특별한 신분에 얽매이지 않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인생이 한국 현대사에 직접적으로 얽혀드는 것은 1963년부터다. 박정희 정권은 영왕 부부와 이구 부부를 모두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이구와 줄리아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민 창덕궁 낙선재에서 20여년을 살지만 왕실 문중은 2세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결국 줄리아를 내쫓는다.
줄리아 멀록과 이구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조선왕조의 몰락에 관한 비애어린 기록이다. 줄리아 멀록은 몰락한 왕조의 남은 후손들의 삶을 증언하는 유일한 창문이며, 그래서 영화 <줄리아>는 언뜻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황제>가 이방인 감독의 시선을 통해 왕조의 내부로 들어가는 영화라면, <줄리아>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왕조의 내부를 직접 겪었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승재 대표가 오랫동안 기획해온 ‘글로벌 프로젝트’의 첫걸음으로 <줄리아>를 선택한 것도 “이방인이자 내부자로서의 줄리아 멀록의 생애가 서구권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줄리아>는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작한 포커스 피처스의 프로듀서 제임스 셰머스와 LJ필름의 공동으로 투자와 제작을 맡으며, 모든 대사는 (당연하게도) 영어로 만들어진다.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자본과 크리에이티브가 본격적인 동반자로서 만난 프로젝트인 셈이다.
이승재 대표는 포커스 픽처스와의 첫만남에서 <줄리아>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를 ‘비커밍 프린세스’(Becoming Princess)라고 설명했다. 평범한 미국 여인 줄리아 멀록은 창덕궁 낙선재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정한 왕비로 변해갔다. 이미 조선왕조는 몰락했으므로 이구와 줄리아는 사실상의 권위를 전혀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해외의 유력인사들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줄리아와 이구를 정중하게 영접했다고 전해진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왕실은 살아 있었고, 그를 통해 줄리아는 왕비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만들어갔다. 그러나 줄리아의 긍지는 정권의 교체와 왕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줄리아>는 그처럼 왕비로서의 긍지를 지켜내고 싶었던 한 이방인 여인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려내는 비극적인 역사의 비가(悲歌)처럼 들린다.
현재 LJ필름과 포커스 픽처스는 이승재 대표가 오랫동안 줄리아 멀록을 인터뷰해 만들어낸 트리트먼트를 바탕으로 1차 시나리오를 진행 중이며, 2007년 7~8월 즈음에 크랭크인을 희망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84살의 줄리아 멀록 그 자신이다. 지난 2005년 LJ필름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줄리아 멀록은 자신의 생애를 영화로 만드는 데 흔쾌히 동의했고, 3개월 동안 이승재 대표에게 자신과 이구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어놓았다. 인터뷰가 끝나가던 어느날, 일본에서 외롭게 혼자 살아가던 이구의 부음이 전해졌다. 519년 조선왕실의 초라한 최후였다. 서울에서 거행된 이구의 장례식에 이혼녀 줄리아 멀록은 정식으로 초청받을 수 없었지만, 쓸쓸하게 진행되는 장례행렬에 작별인사를 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승재 대표가 물었다. “한국은 대체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줄리아 멀록은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의 고향입니다.” 영화 <줄리아>는 바로 그 짧은 대답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