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의 다짐에 대한 고백부터. 나는 이 글을 배창호를 구하기 위해서 쓴다. 배창호의 새로운 영화 <길>이 개봉했다. 그렇다. 그런데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상할 정도로 대부분의 글들이 마치 이 영화를 시네마테크에 가서 본 고전영화처럼 어색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 다음 배창호와의 인터뷰는 회고전을 치르는 감독에게나 던져야 할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길>은 1976년이 아니라 2006년에 개봉한 영화다. 그리고 배창호는 올해 (개봉된 영화를 만든 감독들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자면) 조창호, 김대우, 김지운, 류승완, 홍상수, 김기덕, 봉준호, 송해성, 박찬욱과 함께 우리 시대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다. <길>은 <괴물>이 개봉된 해 가을에 개봉한 영화이다. 그에게 오마주를 바치려는 것은 이상한 태도이다. 그는 이제까지 만든 영화들보다 더 많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배창호는 고작해야 54살밖에 되지 않았다. 왜 벌써 그를 기념하려 드는가? 기념이란 망각하기 위한 예행연습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었으면 고맙겠다.
<길>과 <올드보이>, 배창호와 박찬욱
다시 처음으로. 배창호의 <길>을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두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먼저 떠오른 영화. 그중 한편은 박찬욱의 <올드보이>다. 두편의 공통점은 딸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물론 미도는 주인공 오대수의 딸이며, 신영은 태석의 원수(같은 친구) 득수의 딸이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등장인물로서의 딸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두 영화에서 딸(들)은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도구로서뿐만 아니라 둘 다 모두 주인공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끌어당기는 하나의 형식이다. 미도와 신영 모두 처음에는 여자로 나타나서 결국 딸의 자리에 간다.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타나 반대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주인공에게 질문하는 것은 같은 결과이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증오를 드러내는 척하면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고통을 가장한 즐거움이 아닌가? 그러므로 너의 이기적인 행동을 당장 중단하고 너의 의무를 다하라, 라는 (윤리적 정언) 명령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데 있다. 이우진이 계획한 복수는 오대수가 그의 딸 미도와 섹스를 한 다음 그걸 알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우진의 계획대로 최면에 걸린 오대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미도와 섹스를 한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은 마지막에 이우진을 만난 다음이다. 여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육체적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 윤리적 위반을 저지르는 쪽이 더 가혹하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질문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오대수가 복수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동안 이우진은 정말 즐거운 것일까? 오대수의 행위는 괴로운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 게임을 지겹도록 연장해야 하는 이우진의 희생 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기 위한 경비는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오대수는 이우진을 여전히 괴롭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우진이 오대수를 불러 미도가 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순간 거기서 즐거움 대신 이우진은 이 무한정 계속되어온 지루한 게임에서 비로소 구원받는 것 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일 그것이 즐거웠다면 이우진은 당연히 게임을 더 연장했을 것이다. 심지어 심장병으로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대수는 이제 복수라는 이름을 내세운 즐거운 행동을 갑자기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의 끝에서 누구도 즐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때 딸(이라는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오대수에게 아버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그 명령은 미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딸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린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배창호의 <길>에서 대장장이 태석(배창호)은 장터를 떠돌다가 우연히 (첫 번째 하필이면)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그날 밤 (두 번째 하필이면) 같은 여인숙에 머물렀고, 그녀와 같은 방에 머문 버스 운전기사가 그녀를 범하려 하자 그녀는 갑자기 간질을 일으킨다. 버스 운전기사가 도망간 그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태석은 (세 번째 하필이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이 증오하던 친구 득수의 딸 신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득수는 우정을 빙자해서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문서를 꺼내게 만든 다음 그걸로 노름을 해서 날리고, 그걸 되찾으려던 태석은 그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온다. 득수는 태석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고, (네 번째) 하필이면 그날 감옥에서 돌아와 그 현장을 목격한 태석은 집을 떠나서 십수년을 장터를 떠돌았다. 그의 삶과 가정은 득수로 인해 완전히 부서졌다. 태석은 영화 중간(보다 조금 앞서)에서 신영이 원수(같은 친구 득수)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의 딸과 섹스를 하는 것에 비하면 친구의 딸과 섹스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긴장도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석은 원수(같은 친구)의 딸을 망가뜨릴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신영을 데리고 눈 덮인 산을 넘어 득수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는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득수의 장례를 치르라고 쌈짓돈을 꺼내고, 다음날 버스를 타고 서울로 떠나는 신영의 손에 그가 한푼 두푼 모은 돈 전부를 “아버지 살아생전에 빚진 돈”이라면서 쥐어준다. 나는 여기서 더이상 참지 못하고 어쩌면 저럴 수가, 라고 중얼거린 다음 문득 <올드보이>를 보고 나서 내가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은 딸의 동반없이 돌아오지 못하는가?
나는 여기서 두 세대 사이의 차이와 동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배창호와 박찬욱이 동시대에 지금 함께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 나는 지금 둘 중 누가 더 나은지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멀리 떨어진 점. <올드보이>는 신경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의 비밀이 있는데 그게 무언지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때 비밀은 억압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억압이 역설적으로 오대수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억압의 지식을 획득한 다음 오대수는 강박증 안에서 죄의식으로 반응하는 아버지가 된다. 이걸 벗어나기 위해 무효화할 수 있는 방법은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최면술이 동원되고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무효가 된다. <길>에서 상황은 정신병에 가깝다. 무엇보다 태석은 부권적 기능을 상실한 아버지다. 그때 태석으로 하여금 부권적 기능을 포기하도록 한 것은 득수가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오해를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확신이 그로 하여금 십수년간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게 만든다. 그는 왜 한순간도 자기가 본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의심했다면 그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내 대답은 반대다. 하나의 가정을 해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만일 <올드보이>에 태석이 나오고, <길>에 오대수가 나왔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질문이 반대의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문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결과는 결국 마찬가지다. 아니, 훨씬 끔찍하다고 말해야 한다. <올드보이>에서 태석은 미도의 부모를 찾기 위해 자기의 복수를 포기한 다음 결국 동일한 자리에 가서 이우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미도의 아버지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오대수는 신영을 데리고 복수의 길을 나선 다음 결국 신영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가 하려는 것은 신영을 만났을 때 이미 이루어진 다음이다. 그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하기 위해 거기에 간다. 그것이 더 끔찍한 까닭은 (주인공의 자리를 바꾼 <올드보이>에서) 태석은 복수를 포기한 다음 할 수 있는 선을 택했는데 결국 그것이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 복수의 이름을 빌린 진실의 자리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선의는 악순환 안에서 사실은 선을 가장한 악의로 밝혀질 운명에 던져진다. 반대로 (주인공의 자리를 바꾼 <길>에서) 오대수는 딸을 앞세워 원수(같은 친구)의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둘 중 누가 더 가련한 것인가를 묻는 것은 복잡한 대차대조표를 요구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그들은 주인공의 자리를 바꾸지 않은 주인공들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때 원래의 질문이 중요해진다. 태석이 신영을 만나는 대목에 나는 괄호를 쳐서 세번의 ‘하필이면’을 지적했다. 그리고 신영은 그때마다 (다소 미루어지긴 하지만) 세번 간질을 일으킨다. 그녀의 세번의 발작은 세개의 메시지다. 첫 번째 발작은 그녀가 중절 수술하여 세상에 미처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위한 애도이다. 두 번째는 그녀 자신을 구해달라는 호소이다. 이 격렬한 호소는 버스 운전기사를 내쫓고 그 자리에 태석을 불러들인다. 세 번째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위한 위로다. 그때 이 세번 모두 예외없이 태석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그에게 보여지기 위한 광경이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를테면 신영은 태석을 처음 만났을 때, 눈 내리는 외딴집에서 그녀는 마치 홀린 듯이, 혹은 자백하듯이, 태석이 그걸 요구한 것도 아닌데, 거의 연극 무대에 올라선 것처럼, 버스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이 나이 많은 남자에게 그녀가 서울에서 겪은 끔찍한 일을 남김없이 털어놓는다. 신영은 정말 세상을 몰라서 바보처럼 아무나 믿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교활하게도 이 어수룩한 남자의 동정심을 끌어내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일까? 대답은 둘 다 아니다. 나는 그걸 반대로 대답할 때 비로소 이 드라마의 욕망이 진정 목표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태석은 아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득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마주한 것이다. 그때 그에게는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이 짧은 여행길은 태석이 신영을 데리고 득수의 시체가 누워 있는 집으로 가지만, 동시에 신영이 태석을 부추겨 득수 앞에 데리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신영이 태석의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어하는) 욕망의 덫에 걸려든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올드보이>와 <길>의 차이는 간단하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를 이끌기 위해 미도가 동원된다. 그러나 그걸 알고 난 다음 그는 자기를 무효 선언한다. 반대로 <길>에서 태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그 스스로 기만한다. 그래서 그는 신영을 내세워 그 길을 우회해서 간다. 그런 다음 더 우회할 수 없을 때 원래의 목표를 향해 찾아가지만 그 앞에서 결국 다시 그 기회를 연기한다. 나는 단지 이것이 배창호와 박찬욱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시대에 할 수 있는 두개의 선택의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선택은 결정의 연기이다. 그때 연기를 택한 쪽은 1982년에 영화를 시작한 다음 여전히 완강하게 그 시대의 영화 안에 머물면서 그걸 자꾸 우회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길>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번 <길>의 첫 장면이다. 다른 하나의 선택은 지식의 무효이다. 그때 무효를 선택한 쪽은 1992년에 영화를 시작한 다음 거기서 영화를 생각하면서 그 자신이 괴물이라 할지라도 하여튼 마주본다. 그런 다음 그 모든 것은 무효가 된다. 그러므로 <올드보이>는 그 속편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다음 양쪽 모두에게 그것이 자기의 딸이건, 친구의 딸이건, 두 딸은 임무가 끝나고 난 다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먼저 <올드보이>. 기억을 잃어버린 오대수에게 미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오대수에게 딸 미도는 무효이다. 무언가 여기에는 끝장을 내고 싶어하는 어떤 결단이 있다. 그 다음 <길>. 시외버스를 태워 떠나보낸 신영을 태석이 다시 만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태석은 집에 돌아오기 위해, 그리운 아내를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더 보기 위해, 장가 간 영식과 며느리를 한번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신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영식이 장가가는 날까지 또 다른 신영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태석은 신영을 하여튼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불러야 한다. 무한정한 연기.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다시 한번, 이라는 중얼거림이 있다. 끝장을 내는 것과 다시 한번, 이라고 중얼거리는 망설임의 공존, 같은 말의 다른 비유. 한 시대의 서로 다른 영화에 함께 존재하는 여러 명의 딸. 그녀들의 공존. 그런데 왜 그들은 딸의 동반없이 돌아오지 못하는가?
아버지 되기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
그 다음 두 영화의 가까운 점. <길>과 <올드보이>의 공통점은 아버지 되기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박찬욱 영화의 핵심은 ‘보호자 되기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중 어머니 되기의 두려움에 대해 나는 이미 <친절한 금자씨>를 빌려 질문했다. <씨네21> 제516호 “질문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여기서 그걸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길>에는 두명의 아버지가 있다. 먼저 득수. 그의 딸 신영은 아버지를 매장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다. 그러나 득수는 자신의 딸 신영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심지어 유서 한장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친구 태석을 위해서는 참회의 편지를 남겨놓았다. 그런 다음 죽은 자기 자신을 위해 수의를 만들어달라고 옷감을 남겨놓았다. 득수에게는 아버지 자격이 없다. 혹은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밖에 모르거나, 아니면 태석의 친구로서만 존재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장에서 맛있는 걸 사먹으라고 10원을 쥐어주고 낯선 여자와 도망쳐버린 다음 돌보지 않았던 딸에 대해 어떤 사과의 말도 남겨놓지 않았다(그런데 그렇게 딸도 버리고 고향을 떠난 득수는 죽어서 어떻게 고향에 돌아온 것일까?). 신영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울지 않는다.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오자 그저 입으로만 곡을 할 뿐이다. 이웃 친구가 찾아오자 달려 나가 부엌에서 금방 웃음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를 위해 애도를 나누어야 할 그 어떤 슬픈 기억도 없다. 상여가 나갈 때 신영이 우는 것은 아버지를 위해 우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이 먼 길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의 아버지를 매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낳아보지도 못하고 “때 묻은 고무장갑으로, 틀림없이 마취를 했는데도, 허리가 끊어지게 아파서 엄마, 엄마 부르면서” 받은 중절 수술로 죽어버린 자기의 아이를 묻기 위해서다. 거기서 태석은 무언가를 보았거나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가장 유치한 대답은 태석이 적어도 득수 같은 나쁜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좀더 나은 대답은 죽은 다음에 가족을 대면해서는 안 된다는 산 자의 권리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좀더 상상을 허락한다면 우리는 더 멀리 가볼 수 있다. 태석 아내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항상 태석이 아니라 득수였다. 그녀 마음에 쏙 드는 분갑을 선물한 사람은 태석이 아니라 득수이며, 태석의 아내도 그런 분갑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은 태석이 아니라 득수라는 걸 알고 있다. 고운 바느질 솜씨를 갖고 있는 태석의 아내는 대장장이 일을 하는 태석과 옷감에 염색 들이는 득수 둘 중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릴까? 내게 인상적인 대목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태석이 아내를 위해 하는 건 그저 등에 업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다. 정겨워 보이기는 하지만 방에는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태석은 자기의 아내에게 남편이 아니라 연인처럼 대한다. 두 사람은 섹스도 하지 않으며, 입을 맞추지도 않는다. 어딘가 이 부부 사이는 정신적인 사랑인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둘이 있을 때조차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때 태석의 제스처는 마치 누군가에게 부부의 사랑이 매우 고상한 것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누구에게? 그 자리에 없는 득수에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태석의 행동은 그가 문 앞에 분갑을 던져놓고 사라질 때다. 태석은 (그 자신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그 분갑을 선물했을 때 알아보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분갑은 태석 아내도 그게 태석이 아니라 득수가 선물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분갑은 태석에게 그리운 물건이 아니라 한 맺힌 물건이다. 왜냐하면 태석은 분갑이 사실은 득수가 태석 아내에게 품고 있는 연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석은 기어이 신영에게 그 분갑을 달라고 한 다음 그걸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장 바보 같은 대답은 그 모든 맥락을 모두 포기하고 태석이 돌아와 아내에게 분갑을 주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왜 태석이 다시 길을 떠나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혹은 분갑에 얽힌 득수의 사연은 갑자기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설명해도 이 이야기는 태석과 아내와 득수 사이의 삼각관계를 두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득수가 죽은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태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득수가 살아 있을 때 태석은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가? 그걸 단지 아내를 용서 못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갑자기 태석은 득수를 용서하게 되었을까? 물론 대답은 자명하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장애물이 사라진 것일까? 내 생각은 반대다. 죽었다고 해서 득수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그 자리가 비었을 뿐이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이제 이 삼각관계의 종료를 선언한 다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문이 남는다. 나는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그때 또 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 삼각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태석은 후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이 삼각관계가 유지될 때 태석은 득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득수처럼 아내에게 만족을 주고 섹스도 하(는 상상을 유지하고 싶다. 상상이라고? 그렇다. 태석은 득수가 아내와 섹스하는 상상을 한 다음 그걸 정말 했는지, 아니면 하는 척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미루고 또 미루었다. 이 말은 이렇게도 할 수 있다. 태석은 득수가 아내와 섹스하는 상상이 부정되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실제야 어찌됐건 적어도 태석의 환상 안에서 아내가 만족을 유지하는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태석이 분갑을 문 앞에 던지고 사라지는 이 행위가 여전히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남편 태석이자 (아내의 마음에 쏙 드는 분갑을 고를 줄 아는) 득수의 일인이역을 할 수 있다는 제스처라고 읽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태석은 이제 태석이자 득수이므로 아내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이 해야 하는 삼각관계. 아내가 분갑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두 남자를 볼 것이다. 물론 한명은 남편 태석이고, 다른 한명은 그 분갑을 선물한 득수일 것이다.
그러나 태석이 태석이자 동시에 득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 그래서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할 때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영식은 태석의 아들이지만 어떤 수를 써도 득수의 아들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이 사랑의 딜레마다. 그는 남편이자 애인일 수는 있지만 두명의 아버지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일 영식이 득수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면 태석은 그 사실마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또 하나의 가정을 던져볼 수 있게 만든다. 만일 신영이 태석 아내의 딸이라면 태석은 그녀를 여전히 동일한 태도로 대했을까? 그 어느 쪽이건 이 두개의 질문은 태석의 환상을 위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영과 영석은 태석 아내의 불륜의 증명이 되기 때문이며, 이 난처한 남매는 서로의 자리에서 태석의 환상을 실현시키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배창호는 여기서 뒤로 후퇴한다. 그는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정확하게 그 정도의 자리에서 멈추려고 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태석이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 데까지 갈 생각이 없다. 같은 말이지만 마찬가지로 득수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태석이 분갑과 함께 가져온 물건이 참깨 엿이긴 하지만 엿이 이 의미의 네트워크 안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분갑과 정반대다. 태석은 집에 올 때마다 참깨 엿을 사가지고 돌아온다. 엿은 무언가에 붙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메시지다. 그는 아들에게 엿을 선물함으로써 가족에 달라붙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중이다. 그가 처음 돌아왔을 때 태석은 집 앞에 있는 영식을 보고 그에게 엿을 건네준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돌아왔을 때 그 엿을 건네주고 자기의 메시지를 전달한 용기가 태석에게는 없다. 그때 여기에는 태석이 놓치고 있는 메시지가 하나 더 있다. 얼핏 보면 엿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행위는 태석이 감옥에서 돌아와 영식에게 엿을 건네던 행위의 반복처럼 보인다. 반복이 맞다. 그러나 이 반복은 그 행위의 정확한 반복이 아니다. 이 반복은 셈을 요구한다. 1956년에 감옥에 간 태석은 4년 동안 수감된 다음 돌아왔다. 그가 집에 돌아온 것은 1960년이다. 그런 다음 다시 집을 떠나서 돌아온 것은 1970년대 그 어느 겨울이다. 당연히 영식은 그 사이에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영식은 이제 참깨 엿을 기다리는 아이일 리가 없다. 태석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 태석은 여전히 참깨 엿을 사들고 돌아온다. 이 행위는 둘 중 하나이다. 그중 하나는 명백히 퇴행이다. 그래서 영식이 어른이 되지 않고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두 번째는 의미심장하다. 그가 참깨 엿을 사들고 집에 돌아올 때 그는 1960년,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 보았던 광경의 재현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이 참깨 엿이라는 그 퇴행적-반복적 선택에 담겨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태석을 기다리는 광경은 아들 영식이 어머니를 업고 그 옛날 태석이 섹스 대신 하던 어화둥둥 내 사랑아, 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영식은 여기서 이미 (아버지의 사회적 자리에서) 어머니를 차지하고 있다. 혹은 영식은 여기서 태석이다. 그러므로 집 앞에서 망설이다가 떠나갈 때 태석은 사실상 득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