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어느 조총련계 재일동포 가족 이야기, <디어 평양> [1]
2006-11-27
글 : 최하나
사진 : 오계옥

아버지는 조총련의 간부였다. 세 오빠는 철이 들기도 전에 모두 북한에 보내졌다. 김정일 수령님, 김일성 장군님에 대한 충성은 집안의 불문율이었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딸은 아버지의 사상을 거부했고, 아버지는 딸의 선택을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디어 평양>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화해의 과정이 담긴 드라마다. 재일동포 2세인 양영희 감독은 캠코더 2대로 10년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고, 일견 홈비디오처럼 투박해 보이는 화면 안에 빛나는 진심을 담아냈다. 일본과 북한을 오가며 펼쳐지는 <디어 평양>은 평양의 인간적인 얼굴을 조명하는 동시에, 재일동포들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뷔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과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양영희 감독은 “맥주를 너무 좋아한다”며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신도 모르는 새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는 특별한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작품을 탄생시킨 두 고집스러운 부녀의 더욱 특별한 이야기를 전한다.

평양의 눈물을 만나다

까만 스크린 위로 하얀 글자들이 떠오른다. 한일합방, 해방 그리고 분단. 북한과 남한으로 등을 돌린 한반도의 정세는 재일동포사회 역시 조총련과 민단이라는 두개의 단체로 갈라놓았다. 조총련에 의해 1959년부터 84년까지 추진된 북송사업. 9만여명의 재일동포들이 ‘조국을 향한다’는 명목 아래 북한 땅으로 송환된다. 밭은 호흡을 뱉어내듯 쉴새없이 쏟아지는 글자들과 삽화처럼 등장하는 흑백 사진들. <디어 평양>의 오프닝은 역사책의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듯 진행된다. 글자들은 고요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한참이나 반복하고, 흑백의 책장이 하나둘 넘어갈 때마다 행간에 압축된 역사의 무게는 가슴을 묵직하게 누른다.

그러나 화면이 밝아지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정월을 맞이한 한 가족의 식탁 풍경이다. “한잔만 더~.”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떼를 쓰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아휴, 이제 더이상은 없어요”라며 장난스레 손사래를 친다. 술잔을 비추던 카메라는 곧이어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누비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르고, 이윽고 방 안에서 옷을 개키는 어머니와 내복 바람으로 <섬마을 선생님>을 불러젖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른할 정도로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일상의 공기. 역사책의 뒷면에 등장하는 홈비디오.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 속에 <디어 평양>은 자리하고 있다. 재일동포 2세 양영희 감독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일본과 북한을 오가며 흩어진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 어머니, 오빠, 조카의 일상을 좇는 이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재일동포사회의 질곡 많은 역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두개의 세계, 오사카와 평양을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딸의 노래다. <디어 평양>은 무엇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두 사람, 카메라를 통해 비로소 상대방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평양과 오사카, 아버지와 딸을 오가는 이야기

어머니: 우리 조국이 언젠가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여러 방면으로 비약할 것을 믿는다.
딸: 믿은 지 너무 오래된 거 아닌가요?
아버지: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을 절대 존경하고 끝끝내 충성을 다할 거다. 김정일 장군님을 잘 모시고 끝끝내 믿고 나간다 이거야. 내 자식들, 손자들 전부 다 수령님, 장군님께 충성을 다해야 된다.

조국, 충성, 혁명. 양영희 감독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 세 단어를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이던 소녀였다.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간 다음, 해방 뒤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된 그의 아버지는 오사카 지역 조총련 간부로 평생을 일해왔다. 활동가로서의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그는 81년 북송 사업의 일환으로 세 아들을 모두 북한으로 떠나보냈다. 당시 양영희 감독의 나이는 6살. ‘조국’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던 때였다. “오빠들이 왜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헤어지는 게 싫어 발돋움을 한 채 계속 울었다. 어머니는 배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부두 끝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다.”

줄곧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양영희 감독에게는 언제나 두개의 상반된 세계가 존재했다. 수령님에 대한 충성으로 구축된 학교 안의 세계와 비틀스의 음악이 존재하는 학교 밖의 세계. 한편으로는 답안지에 정답을 꼼꼼히 채워넣는 모범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와 음악을 즐기며 일본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하던 그는 그러나, 곧 벼락같은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다. “진로 상담을 하는데, 선생님이 내게 ‘너에게는 선택이 없다. 부모님의 뒤를 따라서 조총련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얼음물을 끼얹는 것 같던 진로 상담을 계기로, 그는 배웠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곧 조국과 충성과 혁명의 세계는 빛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것”에 충성을 바치는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부녀간의 충돌은 사소한 말다툼부터 시작됐다. TV에서 북한의 매스게임이 비쳐질 때면 아버지는 “역시 훌륭하다”며 찬사를 보냈고, 그때마다 그는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저 짓이 뭐람”이라며 대드는 식이었다. 조총련계 대학에 진학했지만, 시험 때면 백지를 제출했고 수업 대신 연극과 영화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했지만, 결국 3년 만에 학교를 뛰쳐나와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자연히 아버지와의 갈등도 깊어졌다. “어떻게 조총련 간부의 딸이 연극쟁이를 하냐며 화를 내셨다. 20대 후반에는 갈등이 극에 달해서 서로 말을 하기는커녕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웨이트리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극배우, 라디오 DJ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프리랜서 PD로 일하며 뉴스에 들어갈 리포트를 직접 만들게 됐고, 점차 논픽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다만 하루하루 소비되고 사라지는 뉴스 대신 오래 남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우연히 찾은 야마가타다큐멘터리영화제는 운명처럼 나아갈 길을 제시해줬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다큐멘터리를 봤다. 한번은 작품 상영이 끝난 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그 풍경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 이거 하고 싶다. 정말 너무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곧 평범치 않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했다. 나이 서른에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아버지가 미친 것 아니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대체 무엇을 배우냐고 소리를 지르시더라.”

6년 동안 이어진 유학 생활. 떠날 때만 해도 영어 한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양영희 감독은 코피를 흘리며 밤을 새우면서도, 틈틈이 미국과 일본, 북한을 오가며 촬영을 계속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가족을 찍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무엇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일단 찍고 보자고 생각했다. (웃음)” 일단 찍고 보는 것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카메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감독이 카메라를 들 것 같은 낌새를 보이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딸이 계속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것이 한편으론 흐뭇하게 생각되셨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마음의 문을 여신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그가 결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발견들로 이어졌다. 내복 차림으로 뒹굴거리고, 프러포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아버지. “카메라를 부숴버리겠어~” 하며 달려들다가도 어느새 “바보”를 외치며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아버지. 사랑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모습들은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난 뒤에야 담길 수 있었다. “내가 싫어했던 아버지는 훈장을 달고 충성을 외치는 교조적인 사람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분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조금씩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는 막연한 생각으로만 존재하던 다큐멘터리를 아버지에 관한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5년 만이었다.

장소협찬 프레이저 스위츠, 인사동-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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