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도시 평양의 비정치적인 가족사
“창밖의 경치를 보면서도 3명의 오빠들과 조카들을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내가 결코 조국의 품에 안긴 것도 아니며 혁명의 수도를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디어 평양> 중 양영희 감독의 내레이션)
새롭게 다가온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지상낙원’으로 주입됐던 평양 역시 그러했다. “맨 처음 평양을 방문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11년 만에 오빠들을 처음 만났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계속해서 울기만 했다.” 면회 시간은 짧았고, 하루 일정은 각종 ‘혁명 박물관’ 방문들로 꽉 짜여져 있었다. 조국과 혁명과 충성의 완고한 벽이 그를 가로막았고, 오빠들과 거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는 후회는 이후에도 앙금처럼 마음속에 남아 그를 괴롭혔다. 10여년 뒤 다시 평양을 찾게 되었을 때 양영희 감독은 그간 머릿속으로 구상해왔던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일행에서 살짝 빠져나온 뒤 몰래 오빠들을 만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제 네스카페 커피와 함께하는 밤샘 수다가 이어졌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오빠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신 타이거스(오사카의 프로야구팀)의 승패를 너무나 궁금해하는 걸 보고 놀랐던 적도 있다. (웃음)” 만경봉호를 통한 그의 북한 방문은 이어졌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평양은 어느새 사랑하는 이들의 체취가 담긴 도시로 변화했다.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의 이미지를 벗어낸 평양, 이념적인 그림자를 걷어낸 평양의 모습은 <디어 평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핑크색 우산을 들고 “할아버지, 나를 보시라요~”라며 재롱을 피우는 조카 선화를 비롯해 머리를 맞대고 깔깔대며 잡채를 먹는 아이들,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조카 운신을 향해 “아이 엠 해피”를 연발하는 오빠의 모습 등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는 지구상 어느 곳과도 다르지 않은 한 가족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오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치적인 이야기를 최대한 자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평양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비정치적인 평양, 평범한 사람들의 드라마로 그려진 평양은 도식화된 이미지들로 얼룩진 도시를 향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시선을 제시한다. “평양까지 16km.”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작은 표지판에 숨을 멈춘 듯 머무르는 카메라. 그것은 지상낙원도 혁명의 수도도 아닌, 그리운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감독이 던지는 작은 애정의 표시다.
평양을 향한 애정과 존중의 손짓
딸: 아버지 제 국적이 좀 복잡해요.
아버지: 국적은 바꾸면 되지. 정말은 바꿀 필요가 없지만, 바꾸어도 할 수 없지.
딸: 아버지는 안 바꾸세요?
아버지: 안 바꿔! 절대 안 바꿔! 죽어도 안 바꿔!
딸: 그럼 딸은 바꾸어도 괜찮은 거예요?
아버지: 응, 너만 특별한 거야.
조선학교 여자아이들의 생활을 담은 <What is 치마저고리?>, 재일동포 3세 고등학생의 본명선언을 조명한 <흔들리는 마음> 등 앙영희 감독이 프리랜서 PD 시절 만들었던 중편다큐멘터리 2편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영됐다. 저널리즘이나 영상에 대한 배경이 전무했던 그가 방송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찍어온 것들이 독특하고 재밌다”는 사실이었다. 양영희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오랫동안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즐겼고, 일반적인 방송 프로그램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표정들을 잡아내곤 했다. 진득하게 응시하고, 순간을 발견하는 것. 10년간의 촬영, 120시간의 촬영분량을 토대로 탄생한 <디어 평양> 역시 그와 같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마음속 깊숙이 감추어놓았을 감정의 조각들을 포착하고, 그 안에서 개인이 짊어져온 역사의 무게를 보여주는 순간들. 카메라 앞에서 마냥 웃음부터 터뜨리던 어머니가 손자들을 위해 학용품과 비타민 등을 가득 넣은 상자를 묵묵히 포장하는 모습, 수령님에게 충성해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던 아버지가 “오빠들을 북한에 보낸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가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걸”이라며 속마음을 슬쩍 드러내는 순간은 부모가 계속해서 곱씹어왔을 회한을 작지만 강력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질문을 할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그런 대답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또 ‘시끄러워!’ 하며 얼버무리거나 자리를 피하실 줄 알았다.” 카메라를 매개로 딸과의 대화를 시작한 아버지는 견고해 보였던 맹목적 충성이 살짝 빈틈을 보인 자리에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놓는다. 10년 전 한국에 가겠다는 말 한마디에 “왜 내 삶을 부정하려 하냐”며 역성을 부리던 그가 딸에게 툭 내뱉듯 “국적을 바꾸어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감독과 아버지가 맺어온 관계의 전환점이자, <디어 평양>이 선사하는 영화 같은 반전이다. “국적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가족의 금기 중에서도 가장 큰 금기였다. 아버지가 바꿔도 좋다는 말을 하는 순간 너무 놀라서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국적 이야기가 나오고 3주 뒤, 거짓말 같은 현실이 닥쳐왔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모습을 <디어 평양>은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응시한다. “촬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달 동안을 고민했다. 카메라를 병실에 놓아뒀는데, 어머니가 그걸 보고 어떻게 이런 모습을 찍으려고 하느냐며 화를 내셨다.” 결심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제 말이 들리면 손을 잡아보세요”라는 말에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붙들었고, 감독은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찍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례한 처사 같았다. 카메라를 들었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울면서 촬영을 계속했다. <디어 평양>의 가장 눈물겨운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모습보다 더 가슴을 울리는 것은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는 딸의 목소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서 행복해요. 아버지가 부러워요. 어머니가 부러워요.” 울먹이며 토해내는 아이 같은 말들. 20여년에 걸친 갈등과 반목을 녹여내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겠다는 딸의 뜨거운 고백이다.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된 뒤, 한 언론이 ‘<디어 평양>은 아버지의 후회를 그린 영화’라 보도해서 거세게 항의했던 적이 있다. 나에게 충성을 외치는 아버지와 그렇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양쪽 모두가 진짜다. 자신의 신념을 평생 지켜온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디어 평양>은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 내 개봉 시기와 맞물려 북핵문제가 터져나오면서 가시 돋친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동포사회로부터의 비난은 가장 아쉽고도 가슴 아픈 것이었다. “심지어 지랄한다는 말도 들었다. 왜 좋지도 않은 내부의 모습을 드러내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재일동포사회가 이해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양영희 감독은 현재 평양에 살고 있는 조카를 대상으로 한 차기작 <선아 또 하나의 나>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말하기 어렵다”며 작품에 대한 말을 아끼는 그이지만, 이것이 평양을 경유한 그의 또 다른 ‘메시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Dear 평양. 양영희 감독이 끝내 번역을 거부한 Dear라는 단어에는 그의 카메라가 지향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한 이데올로기로 상징되는 도시를 넉넉히 감싸안는 단어. 그것은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을 향해 내미는 애정과 존중의 손짓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딸이 아버지에게 그러했듯이.
<디어 평양> 1년 후, 지금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아직 병원에 누워 계신다. 의식은 어느 정도 회복하셨지만,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지 못하는 상태여서 완성된 영화는 보지 못하셨다. 예전에 한국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던 자신이 주인공인데, 그런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됐다는 이야기에 정말 놀라워하셨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국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하고 물으셔서 ‘아버지 병환에 대해 걱정하던걸요’라고 대답했는데, 믿지 못한다는 표정이셨다. (웃음)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병수발에 정신이 없으시다. 영화를 본 뒤에 어떻게 느끼실지 걱정을 했었는데, ‘아버지의 인생을 이렇게 영화로 남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씀해주셨다.”
-오빠들/ “뭐, 잘 지내고 있겠지. (웃음) 영화가 완성됐다는 말은 했지만, 해외영화제에 초청되고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 입국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당분간 오빠들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힘들 것 같다. 편지로 잘 지낸다는 연락은 주고받고 있는데, 이제 겨울이 오고 날이 추워져서 걱정이다.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이 금지되면서 어머니께서 항상 부치시던 손난로를 올해는 부치지 못할 것 같다.”
-운신과 선화/ “운신이는 이제 스무살 대학생이다. 사진을 봤는데 완전히 아저씨같이 변했더라. (웃음) 대학에서도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예전에는 몸이 약한 편이어서 협주곡 등 체력이 필요한 연주를 잘해내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는데, 이제 몸이 커져서 그런 걱정은 덜었다. 선화는 중학생이 됐다. 죽도록 공부하고 있단다. (웃음) 특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