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강박에서 도벽까지, 마음에 병이 있는 캐릭터들 [1]
2006-12-06
글 : 김나형

박찬욱 감독의 신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그 무대는 정신병원이다. 신세계 정신병원 신입 영군(임수정)은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망상환자. 형광등에 훈계를 늘어놓고 자판기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상한 여자다. 사이보그가 밥을 먹을 수는 없는 법. 전지로 충전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영군은 밥을 먹지 않고 점점 말라간다. 한편, 자신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면을 쓰고 다니는 환자 일순(정지훈)은 영군을 사랑하게 된다. 사이보그가 망가지면 평생 A/S 해주겠다나?

영군이나 일순처럼 정신병원에 살지 않아도, 어떤 영화 주인공들은 정신병을 친구처럼 달고 산다. 몸의 병만큼이나 심각한 마음의 병. 공황장애, 몽유병, 자폐증, 도벽 등 정신병력을 지닌 캐릭터들의 사연을 여기 모아 보았다.

히이~익! 때려 죽여도 집 밖엔 못 나가!

<카피캣> 헬렌 허드슨

<카피캣>

인적 사항: 헬렌 허드슨. 여성. 30대 후반~40대 초반. 장대한 골격과 남자 같은 목소리. 범죄심리학 박사. 특히 연쇄살인범 심리의 전문가다. 역대 연쇄살인범 내역을 줄줄 꿰고 있으며, 살인현장 사진만 보고도 살인범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정확히 짚어낸다(사진에 나와 있지 않은 사항까지 줄줄이 맞힐 정도). 관련 저서 다수. 덕분에 (본의 아니게) 연쇄살인자들의 표적이자 (상상 속의) 연인이자 신인, 복잡한 존재가 되었다.

증상: 광장 공포증.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간다.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 오한, 메슥거림, 호흡곤란에 기절할 지경이다. 오랜 게이 친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신경안정제와 술을 달고 산다. 바깥과의 소통은 신문과 인터넷으로만. 배달된 신문이 문에서 손 안 닿는 거리에 떨어져 있을 경우 “초난감!”이다. 벽에 붙어 땀을 뻘뻘 흘리며 사투를 벌여야 한다.

발병 원인: 연쇄살인범인 대럴 리 칼럼에게 붙잡혀, 공중 화장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때부터 증상이 시작됐다. 자신이 뭇 연쇄살인범의 표적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욱 가중시킨 듯.

극복: 이열치열. 위험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광장공포증으로 표출됐다면, 범죄심리학 박사로서의 그녀의 본능은 일을 하고 싶다(즉 그놈들을 잡아 처넣고 싶다)는 욕구를 마음 한켠에 갖고 있었다. 역대 연쇄살인범을 한명씩 차례로 모방하는 영리한 연쇄살인범이 나타나자 고민 끝에 그를 잡는 데 동참, 재택 근무를 통해 사건 해결에 힘쓴다. 살인범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광장공포를 극복했다.

유사 사례: 비상사태로 ‘패닉 룸’이라는 좁은 방에 들어가게 된 폐쇄공포증 환자 멕(<패닉 룸>), 고소공포증 때문에 이상한 사건에 말려드는 형사 스카티 퍼거슨(<현기증>), 이외 다수.

쉭~ 쉭! 만지지 마! 더러운 병균 덩어리들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멜빈 유달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인적 사항: 멜빈 유달. 남성. 40대 중반~50대 초반. 파시스트 내지는 악당의 표본 같은 얼굴. 성공한 로맨스 소설가로 돈이 엄청 많다. 남에게 못된 소리 내뱉는 것이 습성. 옆집 사는 화가 사이먼(그는 게이다)이 자신의 강아지를 쓰레기통에 버렸음에 항의하자, “너랑 데이트한 놈이 미국 최초의 게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도, 그래서 누군가와 축배를 나누고 싶다 해도 문 두드리지마. 이 문은 절대 안 돼. 알아들었지, 이웃 사촌?”이라 대꾸하고 “여자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느냐?”는 여자 팬의 물음에 “남자에게서 이성과 책임감을 빼면 돼”라 답하는 인물. 식당에서 자신이 항상 앉는 자리에 유대인이 앉아 있자, “얼마나 더 먹어야 되지? 식욕이 너네들 코보다 더 크진 않겠지?”라고.

증상: 강박증. 문 잠글 때 오른쪽, 왼쪽으로 자물쇠 다섯번 돌리기(열 때는 잠글 때보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세번). 불 켤 때 역시 다섯번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 손 씻을 때는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물로. 한번 씻을 때 비누 두개. 한번 쓴 비누는 바로 휴지통에 버린다. 보도블롯 사이 틈은 절대 밟지 않기 때문에(그 안에 무수한 병균이 있기 때문), 발보다 작은 사이즈의 보도블록이 깔린 길이 나타나면 밟을 수 없어 돌아간다. 사람을 역병 보듯 하고, 신체 접촉을 꺼린다. 식사는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만. 식당 식기를 쓰지 않으며, 항상 일회용 스푼, 포크, 나이프를 지퍼백에 넣어 다닌다.

발병 원인: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험한 소리를 해대는 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집어넣지 않으려는 방어기작인 듯. 속을 들여다보면 따뜻하고 귀여운 면이 있다. 비닐 장갑끼고 강아지를 쓰레기통에 처넣은 사람이, 막상 그놈을 떠맡게 되자 칠면조 고기 주고, 밥 먹는 동안 피아노 쳐주고, 흐뭇한 표정으로 산책도 시킨다. 평소 사이먼에게 게이라고 폭언을 퍼붓지만, 막상 그가 구타당하고 파산하여 의기소침해 있자 한밤중에 중국 스프를 사들고 와 어설픈 얘기로 기분을 풀어주려 한다.

극복: 멋진 여자, 옆집 동성애자,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그의 마음에 들어오면서부터 그의 병증은 조금씩 나아진다. 문 잠그는 것도 깜빡하고, 자잘한 보도블록도 밟고, 병균보다 더 싫다는 약도 먹기 시작한다.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라는 멜빈의 대사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하는 중.

유사 사례: 소련의 스파이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천재 수학자 존 내쉬(<뷰티풀 마인드>). 청결함과 반복에 대한 강박증 환자, 하워드 휴스(<에비에이터>).

내 안에 10명 있다

<아이덴티티> 말콤 리버스

※<아이덴티티> 안 보신 분, 초강력 스포일러임!

<아이덴티티>

인적 사항: 말콤 리버스. 생리적으로는 남성. 표면적으로는 30대 중·후반. 네바다주 외딴 모텔에서 6명을 살해. 사형을 앞두고 있음.

증상: 다중인격. 10개(혹은 그 이상)의 인격이 교차. 인격마다 과거지사를 포함한 확실한 아이덴티티가 설정돼 있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30대 중반 남성. 바르고 강직한 성격. 전직 경찰. 한 여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뒤 가끔 정신을 잃게 됐음. 현재 리무진 운전수로 일하는 중’, ‘파리스: 20대 중반 여성. 깡다구 있는 다혈질. 콜걸 생활에서 은퇴하여 낙향해 모아둔 돈으로 오렌지 농장을 하려 함’, ‘조지: 40대 중·후반 남성. 성실하고 착한 꼰대. 강박증이 있음. 생활력 없는 편’. 이들 인격은 서로를 모르며, 자신들이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 역시 알지 못한다. 다른 인격을 통제하는 중심 인격도 없다. 심지어 서로 죽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죽는 것은 말콤의 인격이지만, 실제로 죽는 것은 말콤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이다. 그는 그렇게 6명을 살해했다.

발병 원인: 알 수 없다. 참고로 영화 속 다중인격 사례들은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극복: 극복되지 못했다.

유사 사례: 섬약한 남자와 두려움없는 남자의 인격을 오가는 무명씨(<파이트 클럽>), 착한 말더듬이에서 잔인한 살인자로 변하는 애런 스탬플러(<프라이멀 피어>), 이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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