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성욱의 현장기행]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후반작업 현장 [1]
2006-12-15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타깃_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취재기간_2006년 10월29일~11월14일
현장_남양주종합촬영소 안 블루캡(BLUECAP), EON digital films 스튜디오, HFR(할리우드 필름 레코더) 스튜디오, 모호필름 회의실, 제작보고회, M&F(Music & Film Creation) 스튜디오
취재 중에 만난 사람_임수정, 정지훈, 정정훈 촬영감독, 정서경 시나리오작가, 강현 제작실장, 이춘영 프로듀서, 조영욱 음악감독, 홍유진·홍대성 작곡가 등

PROLOGUE

두명의 월드스타 정지훈(비)과 박찬욱 중에 누가 더 귀엽냐고 묻는다면,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누가 생각해내겠냐마는)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아저씨쪽을 택하겠다. ADR(후시녹음)과 믹싱을 하게 될 블루캡에 들어서서 목격한 이들의 자세는 일단 나이를 닮았다. 사무실 한켠에 외롭게 놓인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는 정지훈, 그 옆 소파에서 양수리를 찾는 영화인들의 명물이 된 OO만두를 우물거리며 스포츠지를 뒤적거리고 있는 박찬욱. “이천수가 뭐라고 욕을 했기에 이러죠?”라고 묻던 박찬욱의 흥미를 돋운 건 기사가 아니라 광고였다. “‘반지만한 실리콘 링이 자동으로 흔들어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면서…’ 재밌지 않아요? 이게 대체 무슨 물건인지, 으허허~. 하늘이 무너진다는 건 좋지 않은 일에 쓰는 표현인데. 여기 역술 광고도 재밌네.” 점심 대용이라는 만두와 성인용품 광고 카피를 여유있게 즐기는 그의 얼굴빛이 개구쟁이 아이 같다.

정지훈이 징글맞다는 건, 물론 아니다. 500ml 우유팩을 손에 쥐고 홀로 녹음실을 드나드는 장면이나 ADR 시작 2시간쯤 뒤에 “어휴, 숨막혀”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모자를 벗어젖히고 탈출하듯 뛰쳐나오던 모습, 그리고 신문을 들추며 “(문)근영양 영화는 어떻게 나왔을까?” 하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그렇지만 “(정지훈이 들어가 있는 녹음실을 가리키며) 예전에는 저 자리에 친절한 영애씨가 있었는데…, 그때가 더 좋았어”라며 노골적으로 여배우에 대한 선호도를 감추지 않는 박찬욱의 천진난만 퍼레이드가 더 귀여워 보이는 걸 어쩌랴. 또 “OOO시상식장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 들었어요? 글쎄 그게…”라고 정의감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귀가 솔깃한 제보를 해줄 때는 (기자로서)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10.29 14:00 남양주종합촬영소 안 블루캡(BLUECAP)

왕성한 정보수집력과 놀라운 기억력으로 순간순간을 즐기듯 대처하는 박찬욱 감독에게 정적인 ADR 작업은 지루하지 않을까? 작은 모니터와 마이크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서 소리에 집중하는 그의 몸이 이따금 꼬이기는 하지만, 정지훈과 의논성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연출에 임하는 목소리가 집요하다.

자신을 사이보그라 여기는 영군(임수정)은 밥 대신 건전지로 에너지를 충전하려고 한다. 밥을 굶던 영군이 끝내 쓰러지자, 일순(정지훈)이 그를 부여잡고 “영군님, 밥을 왕곱단에게 다 주니까 기운이 하나도 없잖아. 으응, 응” 하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짤막한 대사지만 박찬욱 감독이 만족할 때까지 정지훈은 온갖 버전으로 수십번 되풀이 녹음해야 했다. 영군의 이름을 부를지 말지 결정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동시녹음을 들어보더니) 이름 부르는 걸 빼먹었네.”(박찬욱)

다시 녹음하고 모니터하더니,

“이름 부르는 건 빼는 게 좋겠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울먹일까요? 다시 해볼게요.”(정지훈)
“그래. 그리고 끝은 칭얼거리듯 하면 좋을 거 같아.”

녹음.

“앞에 있는 키스신 분위기를 생각하면 너무 외치는 느낌이야. 좀더 가라앉은 게 좋을 듯싶어.”

다시 녹음.

“대사는 잘됐고, 뒤의 ‘응’이 좀 그런데. 그것만 다시 할까, 아님 처음부터 할까?”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또 녹음.

“이번에는 ‘응’을 한번만 해보자. 지금은 꼭 ‘뭐라고?’ 하듯 들려.”
“예, 알겠습니다.”

녹음.

“‘응’만 다시 해보자. 여전히 반문하듯 들리거든. ‘으응’하고 갈게.”

녹음.

“(말을) 끄니까 안 좋네.”
“잘라 갈게요.”

녹음.

“너무 자르니까 딱딱하지?”

두 가지 버전으로 녹음.

“어떤 게 나아?”
“마지막이 좋은 거 같은데요. 감독님은요?”
“글쎄, 장단점이 있는데. 다시 한번만 더 들어보고.”

듣더니,

“난 먼저 것이 나은데…”.

ADR의 연출은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쩝~’ 소리는 들이마신 숨을 코로 내쉬는 듯 해줘” “‘영군님은 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냐’는 말은 좀더 걱정해주는 듯, 교육적으로 가르치듯, 좀더 멀리서 외치듯 해주고”….

막간의 흑심 인터뷰

2시간이 지난 뒤 “10분간 쉬자”는 감독의 말이 떨어졌다. 정지훈은 곧바로 컴퓨터로 달려가 인터넷을 다시 시작하고, 박찬욱은 분홍색 휴대폰을 꺼내더니 그 사이 밀려든 문자 메시지와 전화 응답을 숙제처럼 해치운다. 휴대폰을 닫은 박찬욱 감독에게 ‘흑심’을 품고 다가갔다.

“후반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죠?”

“개봉일을 좌우하는 두 열쇠가 CG와 음악인데, CG를 맡은 (EON digital films의) 이전형 실장과 조영욱 음악감독이 닷새 간격으로 장가가는 바람에 좀…. 그런데 (동료들에게) 숙제를 충분히 내주고 가서 별다른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베를린영화제쪽에서 보여달라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작품이 베를린 색깔과 거리가 멀어서. 알잖아요? 베를린이 선호하는 작품 성향 말에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요. 인생의 공허한 부분에 대해서, 뭔가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의 인물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후반작업 말고는 어떻게 지내세요? 다음 작품 <박쥐> 구상을 많이 하시나요?”

“차기작에 대해선 많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어제는 제작자로서 하루를 보냈어요. 봉준호 감독과 점심 먹으면서 <설국열차>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먼 미래에 만들 영화지만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을 한 거지. 추석 연휴 때는 제가 제작하는 이경미 감독(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의 장편 데뷔작 <홍당무> 시나리오를 같이 쓰기도 했고. 각본 막바지거든요. ADR 같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은 일 생각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아요.”

“영화인들하고 술약속 같은 건 없나요? 감독님의 생활을 좀더 편안히 볼 수 있는 약속 같은 거요. (뻔뻔스럽게) 아무래도 <가을로> 후반작업 기사 때랑 구성이 비슷해질 것 같아서요.”

“글쎄, 별로 없는데. 어쩌나?”

내가 뭘 원하는지 금방 눈치챘을 터이지만 속시원히 답을 주지 않는다. 당연한 반응이다. 좀더 내밀하고, 좀더 사적인 현장을 보고 싶어하는 욕심이 들끓기야 하지만 취재원으로선 모든 걸 다 내보일 수는 없다. 사실, 이 순간만 해도 특혜라면 특혜가 아닌가. 그나저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어떤 영화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시나리오는커녕 사전정보라는 게 거의 없는 상태에서 토막난 장면만 보고 있으니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항력이다. 정지훈의 일순 캐릭터가 여성의 이상형을 품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일순은 영군의 행복을 위해 무지막지하게 애를 쓴다. 대단히 귀엽고 너그러운 방식으로. 마침 일순이 자신(의 증상)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교도소에서 별짓을 다했어요. 자꾸 소멸되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 옷도 훔쳐 있고, 이빨도 열심히 닦고. 이빨은 한번 소멸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잖아요.”

정신병원의 정원을 거닐며 내레이션처럼 나오는 이 대사를 놓고 박찬욱 감독의 요구는 한 단계씩 끝도 없는 듯 높아져갔다.

“걷는 느낌으로 말해볼까.”
“이번에는 자조적으로.”
“한번 운을 맞춰볼까. 있고~, 닦고~. 이런 대목에서.”
“좋아, 이제 한숨이 섞여도 좋을 것 같아.”
“좀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해줘.”
“억양 뭐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편한 대로 해봐.”

ADR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10.30 14:00 남양주종합촬영소 안 블루캡(BLUECAP)

임수정은 약속시간인 2시에 정확히 등장했다. 해맑은 미소로 인사하며 나타난 임수정을 바라보는 박찬욱 감독의 표정은 분명 어제와 달랐다(틀림없이 나도 달랐을 것이다). 여배우를 둘러싼 분위기가 희색만면이다.

“어? 좀 피곤해 보이네.”(박찬욱)
“네, 어젯밤에 (<행복>의 지방 촬영 도중) 올라왔어요.”(임수정)
“<행복>은 세달 만에 다 찍는다며?”
“네. 미뤄지는 것도 없고, 지금 65% 정도 찍었는데 예정대로 끝날 것 같아요.”
“그럴 리가? 허진호 감독이? 음~, 영화노조 때문에 촬영이 길어지면 살아남기 힘들어질 거라던데 허 감독이 벌써부터 적응 모드인가? (웃음) <외출>을 엊그제 봤는데, 그 장면이 제일 좋더라. 여관방에 함께 있는데 갑자기 장인이 찾아와서 손예진을 화장실에 숨기는 장면. 장인이 돌아가고 나서 손예진이 먼저 ‘난, 괜찮아요’ 할 때 말이지.”
“저도 좋았어요. 근데 개봉이 12월7일로 확정됐나요?”
“응. 근데 걱정이야. <Mr. 로빈 꼬시기>하고 같은 날이거든. 대니얼 헤니의 여자 팬들이 정말 많던데.”
“부산에 있을 때는(<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촬영지는 부산이었다) 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여기는 너무 산골이라 운동도 못하고 좀 심심해요.”
“(도넛을 맛있게 먹고 있는 임수정을 보며) 벌써 두개째야. 시골에서 와서 그런가 아주 어쩔 줄 모르고 먹네.”
“정말 이런 거 먹을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근데 감독님이야말로 미식가잖아요.”

정겨운 인사말은 한없이 이어져 40분이 흐른 뒤에야 ADR이 시작됐다. 영군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이 압축, 요약되고 스탭 크레딧이 영화 속 소품들 위에 기기묘묘하게 등장하는 도입 시퀀스가 출발이었다. 기발하고 역동적이며 음산한 가운데 스타일리시한 이 시퀀스는 ‘알겠지? 이 영화의 감독이 박찬욱이라는 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여기에는 감전돼 쓰러진 영군이 숨을 헐떡이는 장면이 들어 있다.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온 걸까. 숨이 넘어갈 듯 말 듯한 호흡을 해내야 하는데 만만찮다. 음악이 깔리니 소리가 너무 작으면 안 되는데 대사도 아니고 숨소리가 아닌가. 예상치 못한 충격을 준 건 그 다음이었다. 육실헐놈~ 어쩌고 저쩌고하며 혼잣말로 자전거, 형광등 등과 대화를 나누는 임수정의 모습이 툭 뛰어나왔다. 놀라웠다. 눈썹은 밀어버린 듯 희뿌옇고, 중얼중얼거리는 입에는 할머니들이 끼는 틀니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대사라는 게 귀여운 듯 제정신이 아니니. 슬프면서 동시에 코믹한 이 장면을 맞닥뜨리고 사진기자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임수정이 녹음실 안에서 묻는다. “아니, 밖에 왜들 웃으세요?”

2시간이 흐르고 휴식시간이 됐다. 임수정이 녹음실을 나오면서 중얼거린다.

“아유 힘들어. <행복>에선 느리게 느리게 말하는데, 다시 영군처럼 수다 떨려니까 넘 힘드네.”(실제로 임수정의 대사 속도는 동시녹음 때보다 현격히 떨어졌다)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져왔다.

“보시니까 어떠세요?”
“(당황해서 우물쭈물) 그게 저~, 사전 정보가 워낙 없는데다가 어제도 오늘도 부분적으로만 보니까…. 근데 아까 막 웃은 게 도입부가 너무 재밌네요.”
“그죠? 처음이 너무 재밌어요.”
“근데 망가지는 게 싫진 않으세요?”
“망가진다기보다…. 근데 틀니 낀 거 알겠나요? …망가지는 거 넘 재밌어요.”

유쾌한 임수정의 모습은 계속 이어졌다. 휴식이 끝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 믿고 있는 영군의 믿음에 대해 알려주는 대사에서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근데 말야. 난 기계치고는 사용설명서도 없고 라벨 같은 것도 안 붙어 있고. 아직도 몰라 내 용도가 뭔지. 왜 만들어졌을까, 난?”

수차례 녹음이 끝나고 나서야 감독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어때? 난 이번 게 좋은데. 근데 한 가지 걸리는 게 ‘기계치고는’ 부분이 처음 듣는 관객에게 잘 전달될까? 중요한 말인데.”

다시 수차례 녹음이 되풀이된다.

“현장에서보다 감정이 덜 들어가는 거 같아요. 뭔가 재미가 덜해요.”(임수정)
“그렇지?”
“뭘까, 부족한 게. 아직도 몰라 난, 부족한 게 뭔지?”(웃음)

대사를 스스로 패러디하며 재밌어하던 그가 “습기가 부족한가”라며 틀니를 끼고 녹음을 재개한다. 틀니 때문에 흘러내리는 침을 연신 삼키는 질척거리는 효과음이 스튜디오 가득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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