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찬욱의 불편한 퇴행
2006-12-19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원인과 행위 사이의 관계가 부재한 이미지 로맨스

엉뚱한 질문 하나. 사이보그지만 ‘무엇이, 왜’ 괜찮은 걸까? 영화를 보기 전, ‘사이보그’와 ‘괜찮아’ 사이의 괄호를 어떻게 채우는지에 따라 영화의 성패가 결정될 거라는 예측을 해보았다. 결과는 실망스럽다. 굳이 따져보면, 영화는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지만 괜찮아, 혹은 사이보그지만 (사랑해도) 괜찮아, 정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도대체 ‘왜’ 괜찮은 걸까? 괜찮으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에서 이 ‘왜’에 대한 설득력있는 사유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군은 왜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일순은 왜 영군에게 사랑을 느끼는가, 혹은 영화는 왜 정신병원을 무대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지 같은 기본적인 의문들. 박찬욱은 망상과 상처를 공유하고 인정하는 사랑의 힘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 밝혔다. 이러한 선언에는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읽지 말라’는 일종의 요구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위와 같은 질문은 애초 불가능한 것일까?

복수 3부작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라는 행위와 그 원인에 대한 사유였다. 감독은 행위의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서 과연 그러한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원인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 적어도 끊임없이 묻게 만들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이 물음이 제거된 영화다. 이 영화가 몰두하는 것은 이유나 과정이 아니라, 행위, 배경, 개념, 이미지 그 자체를 전시하고 나열하는 것이다. 영화는 정신병원과 정신질환자들의 증상, 사이보그, 거식증, ‘존재의 목적’ 등과 같은 거대한 담론들을 모두 끌어안고서도 이들 모두를 영화적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이미지 조각들로만 취급하고 있다. 위의 소재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불편한 이야기들은 모두 제거되거나 유머로 환원되거나 인공적 세트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영화 속 인물들의 존재와 행위의 맥락도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상상력은 피상적이고 이미지, 보이스 오버, 개념의 남용은 영화적 긴장을 흩뜨린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지금, 과잉의 이미지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역설, 혹은 포스트모던 시대, 불편함이 삭제된 자극적 소재들은 한갓 재미로 소비될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이다. 정신병원이라는 특수한 세계 속 인물들의 망상, 환상을 보여주는 것과 그들을 단순히 유아적으로 그리는 것은 무척이나 다른 문제다. 이 영화는 관객의 연령대를 낮춘다는 미명하에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영화를 정신병원으로 대변되는 근대 국가 권력이나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보그의 정체성 혹은 영화가 그토록 강조하는 ‘존재의 목적’에 대한 고민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하얀 맨들에 대한 영군의 분노는 그저 모호한 환상과 자기 나르시시즘에 갇혀 있고, 왜 그녀가 사이보그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단 한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영군이 집착하는 ‘존재의 목적’마저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운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이 과도한 해석들을 지우고 나서 남는 것은 감독이 강조하는 ‘로맨스’다. 그는 복수 3부작에서 복수의 동기이자 금기인 동정심, 슬픔, 설렘, 죄책감 등(사이보그의 칠거지악)을 이 작품을 통해 철저하게 회복하려고 한다. 복수 3부작에서 끝까지 갔던 영혼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손에 묻은 피를 씻으며 사랑의 윤리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더러운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세계로 복귀한 다음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은, 이 사랑은 후퇴이다. 그 공간이 정신병원이라서가 아니라, 영화가 정신분열증자들의 사랑을 다루는 태도 때문에 그렇다. 무엇보다 문제는 영군과 일순이 사랑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가 비약적이고 허술하다는 점인데, 이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이유가 이야기의 불안정성을 변명해줄 수는 없다. 상대의 병을 치료하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고 그 병에 공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박찬욱답지 않다. 현실과의 대면을 미루면서 거짓으로 서로의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과연 사랑의 윤리일까. 끝까지 몽상(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음으로써(그럴 때만) 상대의 결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영화 속 사랑의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토록 냉혹했던 복수의 집행자가 한순간 순진한 사랑의 기적에 빠질 수 있다는 건, 그의 전작들에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만드는 달갑지 않은 이면이다.

놀랍게도 많은 평자들은 이 영화가 복수 3부작과는 별개의 형식과 내용에 기대고 있다고 단언하며 애써 박찬욱의 인장을 지운다. 혹은 논의의 중심을 온통 임수정과 정지훈(비)의 연기력에 대한 상찬으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박찬욱의 인장이 없다는 것도, 강도가 약하다는 것도 아니라, 퇴행적 상상력의 과잉된 나열을 창조적인 이야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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