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박찬욱 감독 인터뷰
2006-12-1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존재의 목적은 그냥 밥먹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다”

평론가를 그만둔 지금까지도 전업 글쟁이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쓴 글 중에 ‘인터뷰’라는 게 있다. 그 안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가 인터뷰를 당할 때 기자들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이렇게 묻지 않고 꼭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건 세계와의 단절, 나아가 어떤 근원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죠?”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감독이 “뭐… 예”라고 하고 나면, 나중에 “기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 역할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감독: 세계와의 단절, 나아가 어떤 근원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죠”라고 기사가 나온다는 거다. 창작자로서 “유권해석”을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함께, 말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받기를 요구하는 자들이 단락을 바꿔가며 곡해까지 저지르는 것을 꼬집은 문장이다. 물론 그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말의 악순환”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다소 단순화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명쾌하고 재미있는 지적이다. 인터뷰란 관객과 창작자를 중계하는 소임이니 못난 질문이라도 안 할 수는 없고, 다만 그의 말을 새겨들어 ‘길고 상투적으로 질문한 것과 짧게 망설이며 대답한 것’의 문답까지 되도록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영화 촬영 초반 때 내 영화가 현실성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궁금한 건 현실성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도 있을 텐데, 동화적인 방법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계산이나 전략을 갖고 하는 건 아니다. 개구쟁이 같은 면모가 나한테 있는데, 그게 좀 발동되는 결과인 것 같다. 그래서 아이 같고 유치하고 좀 단순하지만 멋대로인 그런 걸 다루게 된 것 같다. 예를 들면, 영군이가 자기는 핵폭탄이고 그 존재의 목적은 세계의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아이다운 발상이다. 할머니 때문에 분하고 화가 나서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고, 세상이 박살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유치하게 화를 내는 거다. 같은 분노라고 해도 이전 영화들하고는 다른 아이 같은 면이다. 그런 것 때문에 영화가 동화적으로 보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물어보고도 싶다. 동화적이기 시작한 <친절한 금자씨>부터 눈에 띄는 면면이 있는데, 다소 어지럽게 보일지라도 극의 전개를 펼쳐서 가겠다는 뉘앙스를 받게 된다는 거다. 그게 동화 같은 면과 같이 출발했다는 것이 의미 있어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런 것처럼 시작하지만, 영화 후반에 이르러서 교실에서의 학부모 회의로 모든 것이 응축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주 단정하게 좁은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의 앙상블로 끝까지 가지 않나. 앞부분이라면 해당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다. 맞다. 단단한 구성을 추구한 영화는 아니다. 많은 조연들이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동화하고 관계가 있느냐? 글쎄, 동화라고까지는 못하겠고, 역시 아이 같은 산만함?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하는, 그런 식이 반영된 것 같다.

-영화는 다 자기 느낌대로 보기 나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뮤지컬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본 거다. 그러려고 했다. 음악도 뮤지컬처럼 해보려고 하다가 안 했는데, 자크 드미의 뮤지컬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어간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 사람 영화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영화들의 순진함, 행복감, 유치함 그런 것에서 때때로 내가 뭔가 끄집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HD 바이퍼카메라의 용도에 대해 완성 직후인 지금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나. 어떤 선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촬영감독은 아주 불평이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기계를 쓰려니 불안한 마음에. 단점 하나를 예로 들면 고속촬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총 쏘는 장면 고속촬영할 때는 필름카메라를 썼다.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감독 입장에서는 너무도 유용한 도구다. 모니터가 선명하고, 최종 결과의 근사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현장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도, 촬영기법 지식이 없는 사람도 데이비드 핀처만큼이나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 수 있다. 피사계 심도, 렌즈 밀리 수 몰라도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쪽은 더 어둡게 해주세요, 포커스는 저쪽도 맞게 해주세요, 모니터를 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최종 결과물과 비슷하니까. 그게 아주 획기적인 것 같다. 다음 영화를 또 바이퍼카메라로 할지 안 할지는 생각 중이다.

-관객이 궁금해할 만한 팩트에 대해 질문해보겠다. 가령, 영군이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간 일로 상처를 크게 받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영군이가 그 기억을 회상하는 걸 보면 영군이도 그 상태가 이미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웃음) 가족력이 있는 것으로 설정한 건데, 그 배경이 궁금했다.
=이런 환자들을 다루는 영화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외상에 무슨 미스터리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 실제 분열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건 그렇지 않다는 거다. 정신병에 대한 상업영화 접근법에 전통이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한 거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리고 모계로 내려오는 분열증 증세라는 건 벗어나기 힘든 운명적인 비극의 성격을 갖고 있다. 지금 보여지는 이야기가 밝긴 해도 어차피 이 영화는 치료되지 않는 환자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다루는 감독의 태도는 치료를 포기한 태도다. 그런 면에서, 사실 셋 중 제일 아파 보이는 사람은 엄마인데, 아이는 병원에 들어가 있고 엄마는 버젓이 바깥에서 일하고 있다. (웃음) 영군 엄마 캐릭터는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만들어낸 캐릭터 중 제일 훌륭한 캐릭터인 것 같다. 연기도 그렇고.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동감한다. 이용녀씨가 갖고 있는 말투와 표정과 배역은 정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영군 엄마 역으로 캐스팅하게 된 건가.
=<친절한 금자씨> 때 만났는데 문학소녀 같은 면이 있어서, 현장에서도 대기하는 시간에 언제나 독서하시고, 섬세하지만 감정 기복도 많고. 들떠 있을 때는 또 들떠 있고, 어떻게 보면 연약해 보인다고 할까…(웃음), 그렇다.

-또 하나 덧붙이면 유독 본인 영화에서 오달수가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김지운 감독 영화에서도 재미있었다. 오달수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섬세하고 나약한 면이 나올 때 매력을 풍기고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다. 이번에 가만히 보니까 그의 코미디는 시선 처리에서 나온다는 걸 알겠더라. 간호사가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릴 때 눈을 찔끔 감는데, 관객은 그때 웃을지 모르지만, 정작 웃긴 건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오달수가 째려보는 순간이다. 또는 “너희들이 폐 끼치는 기분을 알아, 씨발년아”, 그렇게 욕해놓고 (갑자기 실수했다는 듯) 둘러싼 사람들을 슥 쳐다본다. 그런 시선 처리에서 코미디가 나오더라. 그런 것의 달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다리 건너인 할머니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쩍어하는 시대 아닌가. 그런데 영군과 할머니의 관계를 굉장히 가깝게 묶어놨다.
=그건 영군과 엄마하고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군과 엄마의 관계가 나빠 보이지는 않던데.
=엄마 상태가 안 좋은데다, 할머니를 이모들과 함께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어도 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는 느낌을 주고 있고, 그래서 엄마 대신 외할머니와 유대를 갖는 것으로 설정 한 거다. 외할머니는 자기가 쥐라고 생각해서 그냥 조용히 무를 갉아먹을 뿐 남을 억압하진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고, 억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영군과 통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백 선생을 처단하기 위해 하는 일은 친구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진심을 준 것 같지 않아서, 그들의 마음을 훔친 모양새가 된다. 훔친다는 의미에서 일순의 캐릭터를 생각나게 한다.
=그건 생각 안 해봤다. 일순은 엄마가 떠났다는 상실에 공허해졌고, 그 빈자리 때문에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축소되고 끝내는 점이 될 것 같은 공포를 가진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 훔치려는 사람이다.

-라디오의 경우도 그런가. 라디오는 영군에게 공상을 허락하고 할머니와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크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라디오 동화극을 구연하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역시 관련성을 묻게 된다.
=그건 라디오 성우를 다시 기용함으로써 닮아 보이는 면일 거다. 그런 얘기 듣겠다는 걱정은 했다. (웃음)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성우의 목소리가 제니의 미래 목소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객관적인 줄 알았던 것에 반전이 일어난다. 그에 비하면 이번 라디오의 목소리는 기계의 신 같은 존재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냘프지만 권위적인 음성, 무섭지 않은 형태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서운 것, 이라는 점이 목소리의 요점이다. 라디오는 뭐 영군이 직접 만드는 기계장치라는 의미 정도인 거고.

-영군이 밥을 먹고 나서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약간 긴 에필로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할머니가 말했다고 영군이 생각하는 “존재의 목적은…”이라는 것에서는 이 사람들을 그냥 이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감독의 전언을 듣는 것 같았다. 그건 아까 대답 중에 말한 치료를 포기한 감독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진짜 에필로그가 하나 있었다. 각본을 만들었다가 지웠는데, 뭐 한 30∼40년 흐른 뒤에 노인이 된 남녀가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비가 오니까 자동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제야 그 집이 위치한 곳이 보이는데, 달동네 꼭대기, 제일 높은 곳이다. 그 옥상에는 언제나 준비된 텐트가 있고,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 안테나를 붙들고 번개를 기다리면서 끝나는 거다. 안 찍은 건 그렇게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였다. 이 커플은 이렇게 해서 밥을 먹게 됐으니까 됐고, 평소에는 잘살다가 비 오면 행사처럼 나가고, 비 그치면 또 평소처럼 살고, 그러면 됐지 한 거다.

-영군과 일순의 태도는 말 안 됨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 같다.
=우리가 망상이라고 깔보면서 불러도 분열증 환자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생활의 기반이다. 어쨌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니까. 내가 핵폭탄이라고 믿어야 이 여자가 잘살 수 있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터지면 너희들은 다 끝장이야라는 마음으로 살더라도, 남들에게만 해끼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다.

-착각과 착란이 대체로 박찬욱 영화에서 이끄는 지점은 어떤 이성적 판단이 고장나버리는 지점이라는 거다. 늘 영화에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판단이 멈춰지는 것이 항상 중요하게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굉장히 원초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방금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게 바로 그런 내용이다. 무지개가 떠오르고, 해도 뜨고, 둘이서 원초적인 나체로 끌어안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밖에는 생존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제스처도 들어 있다.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목적을 자각하고 나서야 존재하겠다는 희망을 갖는 그런 패러독스가 보기에 따라서는 불행하거나 뭔가 보수적인 태도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뿌리를 뽑아버릴 정도의 완벽한 희망을 포기한, 그런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존재의 목적을 거창하게 외부에서 찾는 것은 어렵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목적은 존재 그 자체이고, 뭔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밥먹고 씩씩하게 그냥 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욕먹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뭐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거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그게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그게 논쟁이 된 건 복수 삼부작이었다. 그래서 아까 원초적이라고 말했던 건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에서 판단력이 멈추는 양상을 이 영화는 그냥 알몸으로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맞다. 그것에 대해서는 뭐… 그렇다고 할밖에.

-기자 간담회장에서 어떤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한 질문에 모두가 웃었지만, 실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질문치고는 꽤 괜찮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음… 그거야 안 나오면 이상한 거지.

-방금 그 장면을 말하면서 주인공들이 벌거벗었다고 은연중에 표현을 했는데, 확실히 엉켜 있는 건 분명하다. 비가 와서 옷이 젖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고, 그러다보니 한쪽에 뜬 무지개는 이 사람들의 자세를 조금은 예쁘게 혹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의상의 도안 자체가 마치 이 순간을 살덩어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실제로 벗고 있다. 하지만, 무지개는 거대한 충전 완료를 뜻한다. 시선을 돌리려는 뜻은 없었다. 그 장면의 이미지 자체는 무지개만 빼면 네덜란드 사진작가 에드 반 데르 엘스켄의 작품을 참조한 것이다. 인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영군 침대 머리맡에도 그 사람 사진을 걸어놨는데 어떤 흑인이 기계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장면이다. 기계가 꼭 표정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사람 사진 중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초원이 있고, 멀리서 남녀가 벌거벗고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거기서 직접 따온 이미지다. 영화 속에서 그게 성행위까지 가는지 아닌지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그 컷에서만큼은 성행위는 아니다. 부모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소꿉놀이 장면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둘 다 20대 초반으로 나이가 설정되어 있고, 그 정도면 이성이 모자라도 본능적인 육감은 있을 때다. (웃음)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사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굉장히 성적인 어필을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12세 관람가를 받은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웃음) 심의위원들은 내 생각처럼 그 장면을 봐준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찍었고. 전체적으로 본다면 성적인 뉘앙스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암시하는 모습들은 많이 있다. 키스할 때 발바닥에서 분출되는 화염, 열락을 뜻하는 듯한 무지개, 와인 병에 물들어간다고 집어넣는 손가락 같은 것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렇게 생각하셔도 우리는 잘 몰라요, 하는 그들의 그런 느낌이다. (웃음)

-마지막 장면을 뭔가 탈현실화되어 있는 장면으로 끝내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다.
=강해진다기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그들이 몰랐던 사이에 찍힌 사진으로 끝나지 않나. 그걸 내가 좋아하나보다. 아옹다옹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졌던 복잡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서 탈출하는 것 말이다.

-이번 영화는 소재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아까 말한 치료를 포기하는 감독의 태도가 크게 문제될 건 없다는 생각인데, 길게 봤을 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판단력이 항상 제로 지대에 이르게 되는 매혹이 영화적으로 본인 영화에 얼마만큼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박찬욱 영화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거기서 발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볼 문제다. 하지만 당장 대답하기는 힘든 어려운 문제다. 듣고 보니 중요한 문제 같다. (웃음) 왜냐하면 그것들이 내가 중시하는 성향이고 취향이라서. 모든 비극 내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번뇌들이 다 하찮아지는, 극복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도달했을 때 멍해지는 그런 상태가 종종 내 영화의 결말로 사용되는 것 같다. 왜 그런지 한번도 정리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바람이 있는데, 박찬욱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주 잔인한 장면일 때조차 너무 신사적이고 고풍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주 더럽고 저열한 면을 한번 끌어안아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스코시즈 같은 사람의 분야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묘사하더라도 그 태도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만약에 내가 그런 것을 한다면 억지로 하는 것이 될 거다. 그래 보이고 싶어서, 스코시즈처럼 되고 싶어서 하는 짓이겠지. 본분을 알아야지. (웃음) 내 본분은 숏을 구성하거나 대사를 구성하거나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아무리 저열한 인간이라도 어떤 인간적인 기품이 있기를 바란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가 아니라(웃음), 그런 바람이 있다는 거다. 그것을 팽개치고 스코시즈나 이마무라에서 보여지는 날것 같고 바닥을 보는 듯한 그런 건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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