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사랑을 앓고 나는 자랐노라, <봄날은 간다> 유지태
2001-09-26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나간다.’

-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비누냄새 운운하던 소설이 현실 같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70년대를 끼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가슴저릿한 아픔 따위는 감상이라고, 상처받은 영혼인 양 우수에 찬 눈빛도 거짓이라 믿었다. 적어도 그를 스크린에서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76년생, 유지태의 연기는 정직하다. 그래서 가끔 서투르고, 그래서 가끔 어색할 때도 있지만, 그래서 절대 의심하지 않게 된다. 저 눈물이 가짜일 거라고 저 웃음이 가식일 거라는 생각보다는 그만큼 아팠겠구나, 즐거웠니? 하는 ‘동감’을 품게 된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큰 키만큼이나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누추한 소파에 턱 하니 앉는 유지태, 그에게선 정말 갓 세수를 마친 사람처럼 비누냄새가 났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떠난 지 오래인데, 내가 당신을 아무리 사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이미 끝나버린 사랑의 기억을 이제는 지워야겠지요… (중략)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20년 전 당신이 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러나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우리의 사랑을 슬프게 바라봅니다. 우리의 사랑! 그 처참하게 부서져버린 영혼의 한 조각을….’

- (Veinte Anos)<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중에서

“사랑이 지나가고 세월이 흐르고… 냉정해진다기보다는 무감각해진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옛사랑을 만났는데 그 사람보고 무감각한 느낌을 받는다면 세상사는 게 얼마나 슬플까….” <봄날은 간다>는 사랑스러운 영화지만 결코 사랑의 과정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품지 않는다. 특히 허진호가 풀어놓는 이별 뒤의 풍경은 너무 사실적이라 피하고 싶을 정도다. “난 아직 어리잖아요. 난 아직 사랑에 대한 환상도 있고, 이별에 대한… 그게 많이 아플 거라는, 내 사랑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있거든요.” 유지태는 스물여섯의 자신이 품기에 스물여덟 상우의 ‘빠른 치유’는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고작 2년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난 2년 동안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돌이켜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99년 <주유소 습격사건>을 찍고 난 뒤 세상은 참 많이도 그를 요구했다. 셀 수 없는 CF를 찍었고 <가위> <리베라메> <동감> <봄날은 간다>에 이르기까지, 데뷔작 <바이준>을 치면 필모그래피에 벌써 6번째 영화를 올려놓았다. “2년 동안… 달렸죠. 얼마 전 고등학교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데 ‘너무 달리지만 마라’ 그러는데…, 갑자기 찡하더라구요. 그래서 이젠 좀 쉬엄쉬엄 가려구요.”

허진호 감독과 유지태는 정말 많이 닮았다.하나하나 이목구비가 닮았다기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닮아 두 사람은 어느 집 작은형과 막내같다. “허 감독님과의 작업은 영화를 보는 전체적인 눈을 키웠어요. 디테일 하나가 영화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영화가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는가 하는 걸요. 하지만 사랑에 대한 관점은 조금 달라요. 허 감독님, 빨리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셨으면 좋겠는데(웃음).” 유지태가 허진호를 처음 만났을 때, 감독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빈컵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채워가면 좋겠다’하셨는데 실제로 작업끝내고 나니까 조금 채우고, 조금은 성장한 느낌이예요. 감독님은 거짓을 싫어해요. 그래서 허진호의 영화에서 배우가 뭔가를 느끼고 안 느끼고의 차이는 정말 크다고 봐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는 100% 상우다. 고여 있는 잔여물이 없으니 그 안에 상우를 담았다 해도 혼합물이 아닌 터이다. 그러다보니 난처한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영화촬영중 CF를 찍을 일이 있었는데 “좀더 강하게!”하는 광고감독의 요구가 도저히 받아들여지질 않았던 것이다. “어, 난 지금 상운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아직까지 뭐가 맞는 건진 모르겠어요. 그렇게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끊임없이 역할을 객관화하는 게 좋은 건지…. 이제부터 제가 풀어야 할 숙제죠, 뭐.”

무단으로 이탈한 사이보그 ‘컴바이너’들을 제거하는 냉철한 요원 ‘R’. 유지태가 다음 작품 <내추럴 시티>에서 품어야 할 인물이다. “특별히 그 배역을 위해서 준비하는 건 안 하던 체조하고 밤에 자전거타는 정도? 그보다는 영화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아서 기초가 되는 SF영화들을 보고 있어요.” 새 영화와 함께 그에게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중앙대 대학원 동기들과의 창작작업. “1년에 한편씩은 만들어야 하거든요. 3D하는 친구들하고 공동작업하는데, 내용도 경계점도 없는 작품이에요. 3D도 되고 사진도 되고, 동영상도 되는 건데…, 요즘엔 그 작업 때문에 ‘제3의 여성’이란 책을 읽고 있어요.” 몇년 전 유지태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한 성급한 판단보다 “손가락 하나가 자라나고, 발가락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봐달라”고 했다. <봄날은 간다>와 함께 세상을 향한 화장을 지우고 비누냄새 풍기는 말간 얼굴로 선 유지태. 희미한 빛을 띠던 어린 새싹은 어느 가을날, 비로소 푸르른 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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