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래요?” 막 떠나려는 그를 붙들며 여자는 가슴이 가만히 뛰었던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자고 갈래요?” 하고 다시 한번 말을 거는, 부스럭 생라면을 씹기 시작하는 그녀의 입가에 어쩔 수 없이 웃음기가 번진다. 사랑의 가장 떨리는 한 순간을 라면과 함께 하는 그녀. 누군가 집안으로 들일 참이면 후루루루 물건들을 치우고, 그렇게 마음속 굴러다니는 기억들도 치워버리는, 라면은 잘 끓이지만 김치는 못 담그는 그녀. 살며 사랑하며, 누구나 사는 그런 삶을 사는 그 여자 은수를 보고 많은 여자들은 말한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정작 이영애는 달랐다. “한은수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하고 불쑥 손을 내밀긴 했지만, 이영애가 은수를 알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보는 이를 가슴저리게 하는 영화 <봄날은 간다>는 힘든 수학문제” 같은 영화였다. “은수가 왜 헤어지자고 했냐고요? 일단은 이혼녀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혼녀란 걸 떠나, 어딘가 얽매여 있기 싫어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근데 사실 은수는 어딘가에 얽매여 있고 싶어하기도 해요.” 모순같이 들리는 이 말 속에 이영애가 <봄날은 간다>를 찍으며 골몰했던 여러 생각들이 들어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매력있는 역할이긴 하지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막막했던 이영애가 독후감을 쓰듯 읽고 또 읽었던 은수에 대한 생각. “삶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 같아요. <봄날은 간다>가 그래요. 누구나 겪을 법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영화적이죠.”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모를 한 여자의 연기는, 이영애에게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과 달리 많은 게 열려 있는 이 영화에서, 그저 걸어다니고 먹고 이야기하는 것, 이영애는 그 속에 표정을 담아야 했다. 어떤 표정을 담아야 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 결국 그녀가 얻은 답은 ‘은수는 복잡하다’는 것. 원래 복잡한데다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다변적’인 캐릭터라는 게 이영애가 찾은 답이었다.
문제를 푸는 사이사이, 강원도의 자연은 그녀에게 좋은 휴식이 됐다. 바다가 보이는 은수의 작은 아파트에서 이영애는, 은수가 그랬을 것처럼 바다를 보았고, 틈만 나면 근처의 산사를 찾아 마음을 쉬었다. ‘자연의 소리’를 취재하는 한 PD를 따라, 살아 있는 소리, 살아 있는 풍경을 대하며 그녀는 잠시 봄날 끝자락의 미열을 식혔던 걸까. 사랑을 묻자, 조용히 나이 서른을 이야기한다.
“20대 사랑이 다르고 30대 사랑이 달라요. 20대 때는 열정이라면 지금은 책임과 인내, 배려죠.” 서른 나이에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의 이미지를 제것으로 누리고 있는 이영애. 스스로 “운이 좋았다”라고, “배우에게도 바이오리듬이 있다면 그 리듬이 나는 참 좋았다”라고 겸손히 말하는 그녀에게 봄날은 아직도 긴 길 위를 천천히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