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작된다. 세신이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시작하는 영화의 속도는 놀랍기만 하다. 이 초반 장면은 방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훌륭한 장면이다. 이어지는 장면, 괴물에게 납치된 현서의 가족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이 위급 상황을 무마하려는 미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서를 구출하겠다는 계획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을 묘사하는 코믹한 장면은 전형적인 괴물영화의 특징을 변질시킨다. 영안실 장면을 보자. 딸을 잃은 슬픔에 바닥을 구르며 오열하는 아버지, 삼촌 뒤로 메가폰을 들고 등장하는 사내. 그는 대사를 뱉기도 전에 바닥에 깔려 있던 박스를 밟고 넘어진다. 이 장면은 가족멜로, 정치 블랙코미디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적 요소를 섞어놓은 초장르적인 영화, 또 다른 <괴물>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이러한 난리 법석 속에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괴물>을 감상하려면 감독이 창조해낸 이 난리 법석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괴물을 보자. 형용할 수 없는 창조물. 서투른 고질라와 같은 괴물은 화면의 저 끝에서 번데기 형상으로 출현해 벽을 뛰어다니고, 한강 다리에 매달려 있다 미끄러져 떨어지고, 가끔씩은 미친 개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며 난장판을 만든다.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이 변화무쌍하고 무법자 같은 괴물을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과 미장센의 호흡을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며 등장하는 괴물의 존재와 맞춰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연출 기법은 가끔씩 비현실적인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서가 괴물이 자는 동안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을 보자. 괴물은 자신의 꼬리를 이용해 공중에서 그녀를 잡아 바닥에 다시 살며시 내려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봉준호 감독의 데쿠파쥬(편집기법)는 약간은 호흡이 긴 화면과 짧고 거친 화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그의 편집 방법은 관객에게 괴물의 등장과 사건 전개에 번갈아가며 호흡을 맞출 수 있게 한다. 잘 처리된 그래픽… 끈적끈적한, 근육질의 육식동물… 이 괴물은 먹이를 잡기 위해 동정을 살피는 순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과장된 움직임 속에서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지나침’이라 특징지울 수도 있는 괴물에 대한 묘사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섞여 있는 (가족멜로, 정치 블랙코미디, 익살극) 그의 영화의 호흡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그의 영화의 기질이 자신이 창조해낸 이 생명체와 닮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괴물의 존재는 다른 괴물영화와 같이 비인간적인 인간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또 다른 네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드라마적 요소로서의 사용. 어찌되었던 간에 <괴물>은 괴물의 출현으로 영화의 흐름이 결정되는 액션물이다.
둘째, 정치적 의미의 괴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셋째, 코믹적 요소로서의 사용. 괴물의 출현으로 인해 벌어지는 난장판과 다양한 스피드 변화로 인해 빚어지는 코믹적 장면들. 예를 들어 박씨 가족이 벌이는 전투장면은 처절하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넷째, 멜로드라마적 요소로서의 사용. 괴물은 어느 면에서는 어머니가 부재하는 박씨 가족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대체하고 있다. 괴물의 출산장면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이러한 네 가지 메타포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사용을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괴물의 사용은 영화의 첫 번째 공격장면에서 아주 간단하게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괴물은 상징화되고,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는 어떤 존재이기 이전에 그의 출현이라는 사건 자체로 충분히 설명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강변에서 과자를 먹고 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벌어진 뜬금없는 괴물의 출현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불균질한 모드, 설명할 수 없는 마술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그의 미장센을 설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뜬금없는 괴물의 출현, 이 생명체의 나타남 그 자체로서 그는 영화의 모든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