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고통스럽게 추구해온 목표로, 전제주의 사회에서 추구할 때 더더욱 비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안정을 이룬 조선이지만, 혼란하고 불안한 시국을 맞고 있다. 조선 역사상의 유명한 폭군이면서 희로의 변덕이 잦았던 연산군 시대에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피폐하여 거리로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왕의 남자> 중 장생과 공길 두 사람은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 시기의 유랑하는 거리 광대패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는커녕 오히려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광대패 수장을 죽이고 한양으로 도망친 그들은 거리에서 한판 놀이를 벌이다 궁중으로 잡혀가게 되고, 나중에 왕의 남자가 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은 서로 약속한다. 내생에서 다시 만나 한판 놀자고. 희망을 내세에 둔다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지금 생에 대한 절망을 뜻한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고 그저 한낱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음 생에 다시 한판 놀자고? 이 비극을 다시 반복하자고? 내가 보기엔, 이 말은 훨씬 더 자유와는 결별하게 되는 의미일 뿐이다.
영화 전체를 보면, <왕의 남자>의 인물들간의 감정은 다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동성애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난 줄곧 이 영화가 성별 구분없는 좀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여기며,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엔 <왕의 남자>가 연애적 감정을 그리는 건 아닌 듯하다. 영화 속에 드러난 감정들은 결코 애정의 뜻만은 아니다. 영화는 조금도 사랑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종일관 영화 전편에 가득 차 있다. 동양적인 함축성이 영화에서 아주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만약에 모두들 영화에서 교태기 있는 실눈과 백옥 같은 피부의 공길에 더 많이 주목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이 ‘왕’이란 인물을 주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왕’이야말로 영화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고, 혹자는 연산군 부분이 영화에서 비교적 더 뛰어난 면이라고 얘기한다. 영화에서 감독은 일종의 비애와 연민의 태도로 폭군 연산군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운명을 거스를 힘이 없이 태어난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한 국왕이었던 연산군과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큘라는 운명상 서로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영화는 연산군이란 인물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 깊이감 있게 모친을 잃은 그의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
연산군의 포악함의 근원은 불행한 어린 시절인데 이 유년 시절의 감춰진 고통은 그를 최후의 반역자로 만드는 데까지 영향을 끼친다. 즉 선조에 대한 반역, 관료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까지 몰아간다. 유년기에 모친을 잃었던 일은 연산군을 인격적 기형을 가진 성인으로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이미 그의 비극적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만약 그의 포악무도함의 책임자를 찾으라면, 그를 왕가에 잘못 태어나게 했던 운명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운명을 타고난 연산군의 녹수에 대한 기이한 애정은 정확히 그의 모친 상실로부터 기원한다. 또한 공길에 대한 총애도 많은 부분 유년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에서 기인하며, 그의 인생에서 결핍된 어떤 한 시기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사람의 주목을 끄는 점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이야기, 슬프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담긴 플롯이 관중의 심금을 울리는 데 있다. 영화 전체에 산뜻하고 신선하면서도, 전통적 음율의 문화적 함의가 용솟음치는 기운이 드러나고 있다. 역사의 한 부분에 몇몇 허구적 인물을 추가해 이처럼 정교하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찍었고, 독특한 섬세함, 독특한 감정 등은 그야말로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