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Duelist>의 촬영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명세 감독이 다시 새 영화 <M>의 촬영을 시작했다. 소설가 한민우와 그의 첫사랑 미미를 중심으로 한 꿈과 현실의 미로와 같은 영화다. 지난해 11월11일 촬영을 시작하여 석달째 되는 41회차 장면, 신 79∼83.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분명하다. 2월5일과 6일 <씨네21>은 세트가 세상이 되는 남양주종합촬영소 제2세트장에 있었다. 이명세의 <M>이 만들어지는 그 현장의 비밀을 전한다.
#프롤로그- <M>의 정점! 신 79∼83
신 79∼83의 콘티 상단에 이명세 감독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빛의 절정판, 눈물의 절정판, 연기의 절정판/ 가장 슬프고 무섭고 아름다워야만 한다/ 가장 슬프고 무섭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Computer Graphic적인 Fantasy는 피한다/ 빛과 감정들로 이루어진 환타지가 되어야만 한다/ 감정의, 꿈의 총집합/ 쫓아가는 카메라가 아닌, 사람의 느낌을 가진, 감정을 가진 카메라가 되어야 한다/ 민우와 미미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감정이다.” 이 장면이 영화의 후반부이자 정점이라는 걸 쓰여진 그 말을 통해 느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그 구상의 언어가 노동으로 그리고 영화로 바뀌어 카메라에 담기는 현장이다. 2월5일과 6일 이틀 내내 남양주종합촬영소 2세트장 안에서는 쉴새없이 강풍이 불고 번개가 내리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헤어지기 싫어 부둥켜안은 채 슬퍼하고, 그러다 꿈 인 듯 생시인 듯 누군가는 떠나가고 남은 사람은 조용히 눈을 뜬다.
# <M>의 외피-유령으로 돌아온 첫사랑의 그림자
“모르죠. 우리도 가끔씩 이거 현재야 과거야 묻게 돼요. 첫 장면이 뭐가 될지는 아직 몰라요.” 이명세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송혜숙 선생(서울예대 연극학과 교수였고 이명세 감독의 스승이기도 했다)도 그렇게 귀띔한다. 조용한 탐문이라도 하듯 세트장을 돌며 이런저런 스탭들에게 말을 걸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하다.
대강의 플롯이야 안다. 한민우(강동원)라는 30대 초반의 유명 소설가가 있다. 그에게는 은혜(공효진)라는 착하고 애교있는 애인도 있다. 민우는 최근 소설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현실과 일상이 힘겹다. 게다가 그는 요즘 꿈과 현실이 애매해지는 경험을 자주 겪는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자주 든다. 그때 그는 술집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난다. 그에게 11년 만에 다시 첫사랑 미미(이연희)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민우는 그녀가 미미인지를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미미와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면서 은혜의 눈에 민우는 자꾸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민우는 결국 미미가 자신의 첫사랑이었음을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민우는 미미의 존재에 대해 다시 알고 싶어지고 혹은 그녀의 존재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써나간다. 유령으로 귀환한 첫사랑의 존재와 그녀에 대한 흐릿한 기억의 복원.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저승과 이승의 거리가 한줄 위에 겹쳐진다.
# 콘티-이명세의 뇌구조를 그림으로, 사진으로, 글로!
공간과 시간이 중첩되어 진행되는 <M>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건 좀 힘든 일이지만, 대신 콘티를 들여다보니 영화의 성격은 대강 알게 된다. 신넘버 대신 컷넘버를 통해 잘게 나뉘어져 있는 콘티에는 설명하는 말도 많을 뿐 아니라 인쇄된 사진이나 그림도 많다. 꿈에 히치콕이 나타나 <M>이라고 쓰여져 있는 책을 준 것이 이 영화의 큰 계기가 됐다고 이명세 감독은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책뿐만 아니라 영감도 받은 것 같다. 콘티에는 <싸이코> <오명>의 숏들이 인쇄되어 있어서 은연중에 그 영화들과의 관계를 묻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치콕의 영화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도 있고, 사진작가 듀안 마이클의 사진도 여러 장이다. 글과 그림과 사진 등으로 빽빽한 흔치 않은 콘티는 이 영화만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이미지 참조물을 통해 배우 및 스탭들과 함께 영화의 느낌을 공유하려는 방책이기도 하다. “성냥갑에 콘티를 몰래 그려놓고 혼자 본다는 말도 들었다”(공효진)는 그 풍문이 무색할 지경이다. <M>은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 한데 겹쳐 있는 세계다. 거기에서 이런 콘티가 느낌을 잃지 않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5일 날 가장 먼저 찍은 숏. 아침이 왔고 침대에서 민우가 조용히 눈을 뜨면 방 안으로 은혜가 걸어들어오며 묻는다. “좋은 꿈꿨어? 잘 잔 얼굴이네?” 모든 비현실적 풍랑이 걷히는 장면이다. 영화 속 풍랑은 이미 지나간 뒤지만, 그러나 그걸 찍는 건 지금부터다.
# CG와 세트 - 세트 비율 90%,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빛을 잘 이용하되 심플한 디자인으로 간 거다. 원래는 더 길쭉하고 더 심플한, 천장도 있는 그런 공간을 생각했는데, 그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지난 촬영에 썼던 것들을 재활용하면서 효율을 높이는 쪽을 택했다. 아크릴로 뭘 할 수 있나 생각하다가 기왕이면 휘어보자 생각한 거고, 휘자고 결정하고 나니까 이런 개념이 잡힌 거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게 되어 있는 그런 방이다. 사람들이 거기를 들락거림으로써 뭔가가 연상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든 거다.” 민우와 은혜가 신혼여행을 간 호텔 세트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설명이다. 그리 비싸지 않은 아크릴 재료들을 이용해 곡선의 겹친 벽을 설치했고, 그 안에는 여러 대의 형광등이 들어 있다. 양편으로 공간들이 트여 있어 좌우 어느 쪽으로나 들락날락 출입이 가능하다. 현장 편집기사의 작업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찍은 장면 중에는 이 공간의 그런 구조를 이용하여 민우와 은혜와 미미가 한 공간에서 숨바꼭질하듯 서로 모습을 교차하는 장면들도 있다. 거기에는 거울도 한몫한다. 이 공간에는 민우도, 은혜도, 미미도 함께 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 작은 백사장과 의자와 파라솔, 그리고 그 너머에는 아직 블루 매트뿐이다. 하지만, CG를 통해 그 블루 매트에는 근사한 해안가가 그려질 예정이다. CG로는 다소 부족할 수 있는 파도 포말의 디테일을 위해서 물대포도 항시 대기 중이다. CG 작업을 맡은 데몰리션의 김성태 대리는 “일단 천장을 그려 넣어야 하고, 곡선이나 재질 때문에 물체 및 사람들의 반사가 많은 편이라 그것도 작업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영화와 조명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빛의 강약을 갖고 표현하는 게 많다. 밝은 것 같으면서도 괴기스럽고, 한쪽은 어두운데 다른 쪽은 밝고, 색채 대비도 강하다”고 설명한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경제적인 세트”를 자신했던 이명세 감독은 직접 <M>의 프로덕션디자인을 지휘했다. 세트 비율은 애초 70∼80%에서 90%로 높아졌고, 영화 속 장면 중 지하철이나 시골 학교의 외경 등을 제외하곤 민우의 아파트, 거리 ABC 등 영화 속 주요 공간 모두가 세트다. 스탭들은 남양주종합촬영소 주차장을 도심 한복판으로 바꿔놓은 것이나, 폭이 좁은 세트장을 대각선으로 이용하여 8월의 강남 거리로 바꿔놓은 것들을 베스트로 꼽는다. 세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란 두말할 것 없이 이명세식 컬러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형사…>의 느낌이 많이 배어 있다. 하지만, 형사가 붉은색과 노란색 계열을 많이 썼다면, 이 영화는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그린 톤을 많이 쓰고 이례적으로 차가운 톤도 강하게 쓴다”고 말한다. 때때로 그 색들은 한숏 안에서조차 한쪽이 탈색되고 다른 한쪽이 강조되는 변화무쌍함도 선보인다. 여기에 이명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정한 카메라의 원칙은 “숏 하나하나에 긴장을 유지하면서 물 흐르듯 가자는 것”(홍경표)이다.
# 비주얼 - 빛나는 어둠 또는 빛의 액션
종종 세트장에 있다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영화의 어떤 자명한 태생이란 빛이 꺼진 자리에 남는 건 어둠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명세 감독은 이 영화의 주안점에 관해 “빛나는 어둠” 그리고 “빛의 액션”이라고 강조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명확지 않았다. 어법상으로는 말이 안 되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부는 그날에 민우와 미미가 호텔 방 안에서 서로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 상상적 장면은 빛나는 어둠이라는 표현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명세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빛의 만찬”이라고도 표현한다.
카메라 두대는 호텔 창문 건너편 바깥 바닷가쪽에서 대기 중이다. 강풍기가 돌아가면 두어명의 스탭이 끈으로 지탱하고 있던 파라솔을 잡아당긴다. 파라솔이 뒤집어지고 모래바람이 일고(사실은 모래가루가 아니라 콩가루다), 창문 너머로는 이제 곧 떠나려는 미미와 그걸 견딜 수 없어 거실을 돌아다니며 화를 내고 있는 민우의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 한대는 롱숏을 유지하고, 나머지 한대는 풀숏보다 조금 넓은 사이즈에서 시작하여 민우 역을 맡은 강동원의 연기 리듬에 맞춰 줌인·줌아웃을 반복한다. 마침내 미미 역의 이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두 사람이 끌어안는 격정적인 순간 큰 번개가 내려꽂힌다. 그리고 나면 더블 액션, 다시 방 안에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
번개와 바람이 즉 기후가, 끌어안은 두 인물의 마지막 헤어짐의 감정을 대변한다. 두 사람의 모습은 어둠 속 실루엣으로 놓여 있다. 번개가 치는 순간에만 그들의 모습이 확연하다. 호텔 외부 바닷가쪽에 설치된 라이팅 스트라이크 조명기와 호텔 내부에 설치된 스트로브 조명기가 연속적인 플래시 효과를 낼 때 그들 모습은 빛과 어둠의 반복 안에 놓여 있다. 번쩍거리는 찰나마다 그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빛과 어둠의 쏜살같은 교차. 민우와 미미는 어둠-빛-어둠-빛이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서서히 프레임 양편으로 멀어져간다.
적어도 이 장면에서라면, 이명세 감독이 의도한 빛나는 어둠 또는 빛의 액션의 실체는 플래시 효과다. 어둠 속에 꽂히는 번개 그것이 주는 효과다. 이건 일종의 ‘명멸’이라고 바꿔 부를 만한데, <M>이 추구하는 빛의 액션이란 빛의 명멸이라는 말로 대체가 가능하다. 조명기가 플래시 효과를 내고 빛이 명멸하는 걸 이용해서 <M>은 그 나머지 명멸하는 모든 것들의 느낌까지 포착하고 싶어한다. 민우와 미미는 이제 곧 헤어질 것이다. 둘의 사랑은 지속적이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다. 혹은 둘의 관계는 있었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들의 교차로 완성되는 세계의 깜박거림 또는 둘 모두의 공존 상태. 완성된 영화를 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겠지만 시각적인 과잉 장치로 남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한다면, 적어도 <M>의 빛의 명멸이 꿈꾸는 것은 감정의 명멸과 관계의 명멸까지 표현해내는 것이다. 이게 <M>의 빛나는 어둠과 빛의 액션에 관한 비밀이다.
# 에필로그-그가 꿈꾸는 영화
“나는 컬러 꿈을 꾼다. 그런데 어렸을 때 애들은 흑백 꿈을 꾼다고 하더라. 그래서 꿈은 컬러냐 흑백이냐를 놓고 동네 중학생 형을 찾아가서 물었다. 그랬더니 그 형이 꿈은 흑백이라고 말하는 통에 나만 거짓말쟁이가 된 거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본 것만 믿는 거다.” 이명세 감독은 <형사…>에 이어 다시 한번 자신의 시각장을 확장하고 있다. 이번 영화는 그의 말에 따르면 훨씬 더 열려 있는 영화다. “삼각관계로 가도 되고, 공포영화로 가도 되고, 멜로 구도로 가도 되고, 이른바 예술영화가 될 수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다 열려 있다. 이 떠다니는 유령 같은 이미지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으는 게 중요하다. 목표는 분명히 있고, 그걸 구현하고 표현하는 것의 느낌이 있으니 어떤 이미지를 잡을지, 어떤 연기나 색깔 등을 잡을지 계속 고민하는 거다.” <M>은 그렇게 그가 지금 꿈꾸는 영화다.
“좋은 꿈꿨어? 잘 잔 얼굴이네?” 모든 빛과 감정과 관계가 명멸하는 시간이 지난 뒤, 은혜가 침대에 앉으며 민우에게 말하면 민우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바닷가쪽 창문을 바라보고 카메라는 그들을 유유히 지나쳐 그 시선을 따라 미끄러져간다. 영화 속 그때 바다는 고요할 테지만, 그건 이 현장의 격렬한 풍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