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명세 인터뷰, 리얼리스트만이 꿈꿀 수 있다
2007-02-2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위치한 숙소 춘사관 그리고 408호. 세트 촬영이 유달리 많아 춘사관 생활도 그만큼 길어진 이명세 감독. 그가 마치 집에 온 손님이라도 접대하듯 와인 한병과 팬들이 보내준 고마운 떡을 함께 내놓는다. 곧잘 과거와 현재의 에피소드를 넘나들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영화 지론과 거기에 기초한 또 한편의 작품 <M>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약간의 기분 좋은 술기운 덕인지 그의 너털웃음과 열변은 자주 이어진다. 밤은 새벽이 되고 와인 한병이 조용히 바닥을 보일 때까지 대화도 이어졌다.

-참조 영화나 사진이 가득 그려져 있는 콘티가 인상적이다.
=꼭 그렇게 만들자는 게 아니라 그런 느낌들을 참조하고 발전시켜보자는 거다. 고착화만 되지 않는다면 스탭들에게 내 생각을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더 용이한 것 같다.

-히치콕 영화인 <오명>이나 <싸이코>의 그림들도 있던데. 또 <현기증>에서는 나선형이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나. 오늘 본 호텔 세트는 나선형 비슷하던데.
=글쎄 말이다. 비슷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뭔가 고급스런 호텔을 꾸미기 위해서 그냥은 재미없을 것 같아 벽을 좀 휘어놓은 것이다. <현기증>을 떠나서 그런 곡선의 느낌을 한눈에 보여주는 어떤 장면도 쓰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다음 세트장면은 주인공 한민우의 아파트인데 그건 어떤 모양새인가.
=개념적으로는 타워팰리스를 모델로 삼았는데, 마땅히 마음에 드는 게 딱 있는 건 아니어서 이런저런 느낌들을 조합해서 짓고 있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이제 막 다시 지어지고 있는 리노베이션 상태로 되어 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미로의 공간이어야 하고, 빛과 어둠의 공간이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공간들의 총집합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처음 생각했던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예산상의 문제도 있고. 어떻게든 재활용을 하자는 주의다.

-오늘 촬영분은 아니었지만, 현장 편집기사가 작업할 때 옆에서 보니 한숏 안에서 컬러가 확연히 바뀌는 장면도 있던데.
=밤과 낮, 꿈과 현실이 막 중첩되는 거다. 현재와 과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써놓은 시나리오 부수는 게 힘든 거다. 시나리오는 부수기 위한 텍스트니까. 내일 것도 열어놓은 상태다.

-그전의 영화들에 비해 몽환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쪽으로 가게 되나. 홍경표 촬영감독 말로는 그런 면에서 <형사 Duelist> 때보다 한층 더 밀어붙였다고 하던데.
=풀어내는 드라마의 구조가 미스터리다. 이건 첫사랑을 찾아가는 거니까. 그 과정 속의 표현들이 몽환적인 거다. 그 열쇠가 꿈인 거고. 그래서 그 자체가 몽환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어떤 판타지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추구하는 건 일상의 판타지다. 가령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겨울 배경으로 <첫사랑> 시나리오를 쓸 때였는데, 아버지 기침 소리가 자꾸 연상이 돼서, 이상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왜 자꾸 생각나나 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만졌는데 만지고 보니 달빛이었다. 계속 겨울을 생각하다보니까 달빛을 눈으로 착각했던 거다, 그제야 지금이 여름 아닌가 생각났다. 나는 이런 게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일상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거다. (사진을 찍고 있던 스틸작가에게 갑자기) 야, **야, 불 한번 꺼봐. 봐라, 단지 불 하나 껐을 뿐인데, 대상들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나. 장대높이뛰기도 장대가 땅에 닿아야 가능한 거고, 몽상도 현실에 닿아야 몽상인 거다. 하긴 이런 일은 있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 일인데, 돌아가신 유영길 기사님이 현장에 와서 보고는 이거 못 찍을 것 같다고 그러시더라. 유 기사님이 시나리오 보고 생각한 건 옛날 서울 변두리 단칸방 같은 거였는데, 집이 막 노랗고 이러니까 이상했던 거다. 자기는 책임을 못 지겠다고, 이 감독이 책임지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찍고 나니까 괜찮은 것 같거든. 사실 난 어떤 건 굉장히 리얼하게 가는 편이다. 그 리얼한 것과 조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유 기사님이 애들 시켜서 이것저것 다 노랗게 칠해놓았더라. 그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고. (웃음) 내가 생각했던 쇠재떨이 소품까지 전부 다 노란색으로 말이다. 어쨌든 나는 진정한 리얼리스트만이 꿈을 꿀 수 있고, 진짜 몽상가는 현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술먹어서 그런가? 열변을 막 토하게 되네. (웃음)

-공효진이 “감독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이 책 저 책 많이 알려주고, 좋은 말 다 해주고 하지만 답은 안 해주면서,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하고 되묻기만 했다고 하던데. (웃음)
=나는 영화란 무엇인가 물었던 것과 똑같이 사랑은 무엇인가 물어왔다. 그건 말하는 순간 찢어진다. 말하는 순간 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지 전체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코끼리 몸 만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또 그게 다 틀린 거냐, 그건 아니라고 본다. 다 조합되는 거다. 이런 게 코끼리다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코끼리를 어떻게 느끼고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거다. 코끼리를 느끼게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코끼리 발자국만 찍을 수도 있는 거다.

-남양주종합촬영소 주차장에서 찍어 서울 도심 한복판처럼 만들어낸 장면을 스탭들이 베스트로 많이 꼽더라. 영화상으로도 미미가 결국 유령으로 밝혀지는 장면이라고 하던데.
=알전구 몇개, 형광등 몇개, 차 20여대로 만들었다. 우리가 강남 도심은 찍을 수 없지 않나. 하지만 도심의 느낌이 나면 되지 않나. 도시라고 하는 그 느낌, 그 개념을 설정하고 찍은 거다. 뭐, 괜찮았나보다. 물론 몇몇 부분은 CG가 도와줘야 할 거다.

-미미는 유령이지 않나. 유령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르게 고안된 장면들이 있나.
=이 영화는 꿈이 중요하다. 민우와 미미 둘은 사실 꿈속에서 만난다. 언젠가 내가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소설가 최인호 선생하고 꿈이란 과연 무엇인가 토론한 적이 있다. 꿈이란 산 자와 죽은 자의 통로라고 그때 꿈속에서 결정내렸다. 그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다. 나는 늘 어려서부터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살았다. 왜 그런 의문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내 명제 중 하나였다. 자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상상하며 막 울고 그랬다. 그러면 형한테 막 맞았지. 청승맞게 자다 운다고. (웃음) 그러면 나는 형은 엄마가 죽으면 안 슬프냐고 그랬다더라. 산 자로서, 유한한 존재로서 결국은 남기고 표현해보려는 것, 내게 영화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거다. 내가 생각하고 궁금했던 걸 영화라는 매체로 하는 거다.

-음악은 이번에 어떤 느낌으로 할 생각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안개>라는 대중음악은 확실히 나올 거다. 정훈희의 <안개>.

-오늘 와서 보니 <형사 Duelist> 현장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는 것 같다.
=흥행에 대한 부담을 버려서 그런가보다. (웃음) 사실 부담감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그걸 버렸다. 흥행, 그거 누가 알겠나. 열심히 찍는 거지. 그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영화 속에 쓰일 강동원의 내레이션을 시인 채호기 선생에게 맡긴다고 들었다.
=(프로듀서가 100% 결정된 건 아니라고 하자) 아니, 내가 100% 하라고 강요하고 있고, 그렇게 할 거야. 내가 개념을 정해주고 마치 한편의 시처럼 이 영화 전체의 내레이션을 담당하기로 했다. 몇몇 내 느낌들이 있어서 그렇다. 그 친구라면 충분히 그걸 한편의 시로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또 그게 묶여서 시집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편집실에 와서 같이 살아야지 뭐. 같이 술먹고 놀면서 다 보게 할 거다.

-편집은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하나.
=이번에는 많이 열어놨으니까 보고 다듬는 시간도 많이 걸릴 거다. 이 영화는 편집할 때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쓰는 게 될 것 같다. 하면서 많이 또 바뀔 거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보다는 이해가 더 쉽고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이명세 영화에서 인물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기후는 그 감정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아, 그거! 번개! 가만히 보니까 이번에는 내가 번개로 가기로 한 것 같다. 비는 내 전매특허니까 딱 한 장면만 쓰고(웃음), 나머지 장면에서는 비도 없고 눈도 안 내린다. 이번에는 빛이다. 빛으로 해보려고 한다.

-지금 한 60% 찍었다. 앞으로 어떤 장면들이 남았나.
=큰 부분인 민우의 아파트가 하나 남았고, 그거 찍으면 거의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거의 90% 정도 되는 거다. 그러고나면 중간 중간에 들어갈 브리지신들 한 10% 정도 남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해주고도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아직은 당신이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사실이다. 심상 정보만 갖고는 다 알 수 없다. 라이브를 봐야지 라이브를! 지금 목표는 최대한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자는 것, 좋은 작품을 만들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거 오늘 중요한 걸 너무 많이 말해준 거 아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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