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스카의 실수들] 마틴 스코시즈, 앨프리드 히치콕
2007-03-13
글 : 박혜명

마침내 마틴 스코시즈는 감독상을 수상했다. <분노의 주먹>(1980)에서부터 <에비에이터>(2005)까지 25년 동안 다섯번 감독상 후보자로만 머물렀던 스코시즈는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자신의 최고 흥행작 <디파티드>로 결국 감독상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디파티드>는 작품상도 수상했다. 흥부 박이 터지듯 터진 상복이라. 진심으로 후련해하며 열렬히 축하해주고 싶지만, 아, 상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 스코시즈의 감독상 트로피는 <디파티드>가 아니라 모두가 그의 걸작이라 입을 모을 수 있는 과거 어느 작품에 주어졌어야 했다. 게다가 작품상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바벨>을 외면한 결과라 조금 더 허탈하다. 이로서 지난 2월28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일흔아홉 번째 아카데미시상식은 다소 지루하게 마무리지어졌다. 남녀주조연상에 헬렌 미렌, 제니퍼 허드슨, 포레스트 휘태커 등 각종 매체가 수상 예측한 후보들을 (피터 오툴의 8번째 낙방은 몹시 가슴아프지만!) 오차 없이 무대로 올리는 한편, 긴 과거 스스로 쌓아온 오판들을 한 순간에 돌이키고자 시상식 마지막 대목에서 웃지도 못할 뒷북을 치고 만 것이다. 귀여움과 센스가 넘쳤던 엘렌 드제네러스의 사회, <스파이더 맨>의 프로듀서 로라 지스킨이 영상을 적극 활용해 신선하게 연출한 무대와 식 진행 같은 건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어제오늘 일도 아닌 오스카의 과실들이 불멸의 테마가 될 것이다. 스코시즈의 감독상 수상을 계기로 유사한 경우들을 추려보았다.

최고의 감독에게 돌아간 최악의 선택

6전7기 끝에 <디파티드>로 감독상, 작품상 받은 마틴 스코시즈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상(뿐 아니라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기쁘다. 그러나 <디파티드>가 감독상뿐 아니라 작품상까지 수상한 것은 얼른 납득할 수가 없다. <LA타임스>는 “30년 뒤에 <디파티드>를 다시 본다면 그것을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고전으로 여길 수 있을까?”라고 물었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오스카 수상결과 예측 기사를 내보낼 때 “<디파티드>는 감독상 정도면 충분한 영화”로 의의를 제한했다. 홍콩 영화계의 회생 신호탄 <무간도>를 굵직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리메이크한 스코시즈의 <디파티드>가 <분노의 주먹>(1980)으로부터 25년 유예된 감독상을 작품상까지 몰아 보상해주기에 적절한 기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삶에 대한 인간의 영욕과 그 구원/파멸의 주제를 시적이면서도 장르적인 영화 문법 안에 완벽하게 구현했던 스코시즈의 작가적 재능은 <분노의 주먹>(1980) 또는 <좋은 친구들>(1990) 때 인정받았어야 마땅하다. 어떤 이들은 로버트 레드퍼드의 잔잔한 심리드라마 <보통 사람들>(1980)과 케빈 코스트너의 순심이 깃든 멜로드라마 <늑대와 춤을>(1990)이 각각 스코시즈를 누르고 감독상·작품상을 받은 것에 대해 ‘오스카 사상 최악의 선택’으로 꼽는 것도 주저않는다. <BBC>는 간단히 이렇게 되물었다. “다시 한번 봐라. 스코시즈와 코스트너. 누가 더 나은 감독인지 못 집어내겠단 말인가?” 아카데미 회원들은 스코시즈가 <갱스 오브 뉴욕>(2002)을 내놓았을 때 10개 부문에 후보 지명을 하고 트로피는 한개도 내주지 않았다. <에비에이터>(2002) 때 촬영, 편집, 미술, 의상디자인, 여우조연 부문이 수상하는 걸 보고 자신은 빈손으로 돌아갔던 스코시즈는 <디파티드>를 처음부터 흥행만을 목표로 만들었다. 프로듀서 그래엄 킹도 “우리 중 누구도 이 영화가 오스카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카 캠페인도 거의 벌이지 않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4년 전 <갱스 오브 뉴욕>이 트로피 0개의 수모를 겪어야 했던 이유는 미라맥스의 유난스러운 오스카 캠페인이 반감을 산 까닭이라는 해석이 대세인데, 그와 대구라도 맞추려는 듯 <디파티드>의 오스카 수상은 얌전한 캠페인 덕분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런 어이없는 분석이 진지하게 나돌 정도니, <디파티드>의 감독상·작품상 수상은 앞으로도 몇년간 오스카 최악의 선택으로 길이 기억될 듯하다.

장르영화의 장인에 대한 전통적 홀대

다섯번 감독상 후보, 결국 평생공로상 앨프리드 히치콕

조너선 쿤츠 UCLA 영화사학 교수는 “<디파티드>는 <분노의 주먹>만큼 역사가 길이 평가할 영화는 아니”라면서 “그래서 어떤 상들은 평생공로상을 대체하는 듯한 분위기”라고 냉소를 덧붙였다. 이는 할리우드가 낳은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트뤼포, 스필버그, 타란티노를 포함해 동시대와 후대의 무수한 감독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온 히치콕은 <레베카>(1940), <구명 보트>(1944), <스펠바운드>(1945), <이창>(1954), <싸이코>(1960)까지 다섯번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어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위로하듯 오스카가 내민 것은 1968년 어빙 G. 탈버그상, 지금의 평생공로상이다. 1940∼50년대의 미국 장르영화가 자국 내 평단으로부터 저평가받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관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오스카가 당대의 팝콘 무비들을 오롯이 대접해줄 리 만무하긴 하다. 존 포드의 걸작 서부극 <수색자>(1956) 같은 경우 이듬해 초 오스카에 단 한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되지 못했고 그해 작품상은 <80일간의 세계일주>가 탔다. 히치콕의 <오명>(1946)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는 조연상이나 각본상, 미술상, 편집상 등에 후보 지명된 것이 아카데미로부터 입은 관용의 전부였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초기 걸작들이 오스카 문턱을 못 건넌 것도 당연하다. <LA타임스>는 오스카가 전통적으로 홀대해온 장르영화를 옹호하며 영화역사가 데이비드 톰슨의 말을 인용했다. “장르영화는 작품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 훌륭해진다. 그 분야에서는 할리우드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서부극으로든 누아르로든 스크루볼코미디로든 훌륭한 장인이 만든 빌어먹을 이야기 하나만 해도, 그것이 애써 노력해 만든 거창한 이야기보다 오래 남을 수 있다. <카사블랑카>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늑대와 춤을>보다 더 좋은 영화인 까닭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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