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스카의 실수들] 로버트 알트먼, 엔니오 모리코네 외
2007-03-13
글 : 박혜명

장수하셨기에 망정이지…

30년간 5전5패, 평생공로상 받은 해 가을 81살로 영면한 로버트 알트먼

지난해에 로버트 알트먼이 오스카 시상식 개최일보다 일찍 세상을 떴다면 아카데미 회원들은 ‘할리우드 안에 있는 할리우드 밖의 감독’ 알트먼에게 트로피 안길 타이밍을 놓쳐 겸연쩍어했을지도 모른다. 알트먼은 <야전병원 매쉬>(1970)를 시작으로 <내쉬빌>(1975), <플레이어>(1992), <숏컷>(1993), <고스포드 파크>(2001) 등 5회에 걸쳐 오스카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가 받은 유일한 오스카상은 2006년 (역시나!) 공로상. 할리우드와 미국 중산층을 향한 적나라한 풍자드라마 <숏컷>과 <플레이어>가 영화제 환심을 샀을 리는 만무하고, 알트먼이 오스카에 가장 근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아마도 <야전병원 매쉬>일 것이다. 당시로선 무명인 도널드 서덜런드, 엘리엇 굴드 등을 기용해 미국 내에서만 73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파격적인 형식과 비판적인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이슈화되어 이 영화는 작품, 편집, 여우조연 부문을 포함해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수상은 각본상에 그쳤다. 아카데미는, 독일 군대를 ‘쳐부순’ 패튼 장군 전기물 <패튼 대전차 군단>에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을 몰아주었다. 주인공 조지 C. 스콧은 “나는 오스카가 싫다. 상을 준다 해도 안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도 수상자가 되었다. 스콧이 거부한 트로피는 패튼 장군 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저 운이 나빴던 걸까

3회 감독상 후보 지명에 작품상 한번 받은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같은 영화를 더이상 만들지 않는 리들리 스콧은 (고인이 된 큐브릭과 알트먼을 제외하고) 린치보다 몇만 광년 오스카에 가까운 감독이다. 그는 <델마와 루이스>(1991)로 처음 오스카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된 뒤 근 10년 만에 <글래디에이터>(2000)와 <블랙 호크 다운>(2001)으로 연달아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리고 세번 모두 감독상 수상에 실패했다. <글래디에이터> 때는 감독상을 <트래픽>의 스티븐 소더버그에게 내주고 작품상만 가져왔고 <블랙 호크 다운> 때는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완벽에 가까운 집착과 강박으로 만든 세련된 스타일의 전쟁물 <블랙 호크 다운>이 론 하워드의 휴먼드라마 <뷰티풀 마인드>에 밀려나던 그해에 감독상 후보에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데이비드 린치와 <고스포드 파크>의 로버트 알트먼이 함께하고 있었다. 감독상은 론 하워드가 수상했다.

무관의 제왕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중 가장 파격적이었던 스탠리 큐브릭

아카데미가 후보 리스트로 불러모았던 역대 영화인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감독. 큐브릭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시계태엽 오렌지>(1971), <배리 린든>(1975) 이렇게 네편으로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영화들은 매번 작품상 후보로도 지목되었다.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언뜻 놀랍겠지만 오스카의 보수성은 후보 지명이 아니라 수상 결과를 발표할 때 발휘되는 법. 린치나 알트먼처럼 큐브릭 역시 감독은커녕 작가나 제작자 이름으로도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다. 심지어 아카데미의 오래된 면피식 ‘공로상’과도 상관없이 큐브릭은 1999년 세상을 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공로상도 없이! 일각에서는 그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 시각효과디자인에 참여했다가 이 영화가 시각효과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1969년 오스카 수상자 목록에 ‘시각효과디자인 부문 수상자: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한줄을 남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감독의 혁신적인 비주얼 미학을 떠올리면, 이는 재치있는 기록이기도 하고 어이없는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큐브릭 본인에게야 이도저도 아무 상관없었을 테지만.

좀더 기다리면 공로상 하나쯤?

유럽의 평가와 완전히 다른 평가받은 데이비드 린치

할리우드 내에서 완전한 이방인 궤에 속하는 데이비드 린치는 유럽에서의 높은 평가로 예술적 지위를 얻게 되었으나, 그의 초기작 <엘리펀트 맨>(1980)을 무려 8개 부문 후보로 올린 것은 아카데미였다. 아마도 아카데미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새로운 비주얼과 이야기에 설득당했거나, 당시 저예산 예술영화 제작에 몸을 던지기로 한 멜 브룩스의 오스카 캠페인에 혹했으리라. <엘리펀트 맨>을 그해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해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의상디자인상, 음악상 그리고 존 허트의 남우주연상까지 후보로 지명했다. 이로써 1981년 오스카에서 로버트 레드퍼드의 <보통 사람들>은 <분노의 주먹>뿐 아니라 <엘리펀트 맨>하고도 경쟁을 벌였던 셈이다. 아카데미의 호의는 이해로 끝났다. 린치는 6년 뒤 <블루 벨벳>(1986)으로 다시 한번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것이 <블루 벨벳>의 유일한 후보 지명이었고,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카일 맥라클란의 매혹적인 연기는 외면당했다. 2001년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감독상 후보 지명 하나에 그쳤다. 덧붙이자면 몇년 안에 린치도 공로상 내지 명예상을 받게 될 것이다, 에 한표.

<시네마 천국>이 후보에도 못 올랐다고?

아카데미에서 예상 외의 푸대접받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앞으로는 누군가가 아카데미에서 명예상인지 탈버그상인지 공로상인지를 받는다고 하면 그의 노미네이션과 수상 전적을 조사해보자. 아마도 몇 십년간 내리 물만 먹은 경우가 태반일 테니 말이다. 올해 아카데미 명예상 수상자인 엔니오 모리코네도 예외일 수 없다. 다섯 번 후보 지명에 수상 전적 제로. 히치콕, 알트먼과 타이를 이루는 기록이고 큐브릭보다 나쁜 전적이나 오툴보다는 낫다. 이제 명예상을 받았으니 추후 수상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 것인가? 모리코네는 <천국의 나날들>(1978), <미션>(1986), <언터처블>(1987), <벅시>(1991), <말레나>(2000)로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 그 유명한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시네마 천국>(1988) 등은 노미네이트조차 되지 않았다. 모리코네 베스트 앨범이 너무 자주 나와서 착각을 일으켰나보다. 후보에 10번쯤 오르고 상은 3번쯤 탄 줄 알았건만. 기록을 보면 <옛날…>의 음악은 <로슈포르의 연인들> <피니언의 무지개> <화니 걸> 등에 밀려 노미네이트도 안된 것이었고 그해 음악상 수상작은 <올리버!>였다. <원스…> 때는 <강> <내츄럴> <인디아나 존스> 등이 후보에 올라 <인도로 가는 길>이 음악상을 수상했다. 미국에서 170분 디렉터스 컷으로 개봉한 <시네마 천국> 대신 1990년 오스카 시상식에는 <7월4일생>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꿈의 구장> 등이 후보에 올랐고 트로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가져갔다. <인디아나 존스>와 <인어공주>의 메인 테마가 뛰어나긴 하지만 <원스…>와 <시네마 천국>을 완전히 무시해도 될 만큼 다른 후보들이 쟁쟁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시상식 때, 젊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 이어 <바벨>로 두 번째 음악상을 수상한 무대에서 모리코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명예상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그는 소감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어였다. 예상 못한 악센트에 객석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느라 애를 먹고, 별도의 통역사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뒤늦게 안 이스트우드가 나서서 음율없는 이방어를 영어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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