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에로라는 수식어는 거의 살인무기다
2007-04-11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17번째 개인전 가진 배우 출신 미술가 강리나

은퇴한 여배우란 수식어는 추억보다 상상을 부추긴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필름 속에 영원히 간직될지라도, 현실에 안착한 그녀의 모습은 아침방송의 토크쇼가 아닌 이상 담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강리나는 지난 1996년 영화계를 떠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근황을 알려왔다는 점에서 상상의 영역이 좁은 배우다. 전공을 살려 미술가로 전업한 그녀는 전시회를 열 때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이번 만남 역시 지난 4월3일에 막을 내린 그녀의 전시회가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아사달의 정원>이란 주제로 열린 이번 전시회는 미술가 강리나에겐 17번째 개인전. ‘벌써?’라는 생각에 17번이라는 횟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벌써 17번째가 맞다. 아직도 내가 배우를 하는 줄 아는 분들이 많을 거다. 길 가다 만나는 분들은 왜 그리 오랫동안 쉬고 있냐고 그러더라. (웃음)”

1987년 <슈퍼홍길동>으로 데뷔한 강리나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외모를 가진 배우였다. 당시로서는 큰 167cm의 키와 쏘아붙일 듯 강렬한 큰 눈을 가진 여배우는 외모 덕분에 성인영화의 섹시한 히로인들을 맡아 연기했다. 그토록 강한 느낌의 외모를 가진 여배우에겐 남자에게 버림받는 애달픈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보다도 남자들의 머리 위에서 호탕하게 웃는 카리스마의 여왕이 어울렸을 것이다. 과거의 모습만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전시회장의 문을 열고 나타난 그녀 역시 생각보다 매우 커 보였다. 전시회장을 돌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그녀는 잠시 뒤에야 손에 쥔 사탕을 뿌려놓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제야 지난 10년간 눈매에 그려왔을 부드러운 여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17번째 개인전을 여는 소감은 어떠한지.
= 끔찍한 생각도 든다. 벌써 17번씩이나 전시회장의 문을 넘나들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이사를 17번이나 했다는 거지. 특히 설치미술전을 할 때는 돌이나 철조각을 크레인으로 옮겨야 한다. 그걸 또 전국적으로 순회전을 했다고 하면… 인생 자체가 이사다. 손 좀 보라. 이렇게 변했다. (웃음)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아사달의 정원>이다. 예전에도 원(圓)사상을 배경으로 전시회를 했는데,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우리의 정서와 정신, 그리고 나의 정체성을 찾다보니까 동양사상의 개념부터 문을 두들기게 되더라. 이번 전시회는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아사달을 찾아서 떠나는 마음의 여정을 담은 거다. 아사달의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백제의 한 석공의 이름이다. 아사달의 애인이 아사녀다. 내가 아사녀라고 생각할 때, 아사달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웃음) 그러다보니 예전과 달리 꽃이나 나비도 그리게 됐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나도 변한 것 같다. (웃음)

-어떻게 변한 것 같은가.
=서른다섯살까지만 해도 20대처럼 살았다. 지금도 나는 항상 30대 같다. 아직도 20대의 마음이 있다고 하면 너무하겠지만 그래도 꿈은 갖고 산다. 항상 불타오르는 불씨가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건 예전에는 가시밭길이라도 밟고 나가는 용맹스러움이 있었는데, 그런 게 점점 꺼져간다는 거다. 사람이 정신은 계속 나아가는데, 육체는 따라가지 못할 때는 지칠 수가 있다. 오죽하면 내가 아사달을 찾겠는가? (웃음)

-그동안의 기사를 찾아보니 “결혼도 하지 않고 미술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란 문장이 많더라.
=정말 재밌는 문장이다. (웃음) 내가 이젠 결혼은 포기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요즘에는 다들 결혼도 늦게 하고 이혼하고서도 다시 2, 3번씩 결혼하는데 너는 왜 못 가냐고 하더라. 그런데 제짝 만나는 게 쉬운 게 아니지 않나? 두 사람이 좋아서 결혼하는 것도 좋지만, 양가도 이해를 시켜야 하는 거고. 그러다보니 쉽지가 않은 문제다.

-미술가로 전업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영화배우로서의 질문을 꺼리는 건 아닌지.
=그런 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미술을 하면서 경력사항에 배우이력을 써오지 않은 적은 있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오해를 해서 한줄 정도는 쓴다. 몇년부터 몇년까지 몇편 출연, 대종상 신인상 수상, 이 정도. 사실 미술가로서는 전혀 들어갈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미술도 했기 때문에 그건 넣고 배우이력을 넣지 않으면 사람들이 배우를 했다는 걸 숨기고 싶어하는 걸로 오해를 하더라.

-영화배우 출신 미술가란 수식어가 유리한 건 없나.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미술쪽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 (웃음) 한번은 어느 그룹에 속해서 그룹전시회를 하게 되었는데, 나만 인터뷰가 나갔다. 그때 선배들이 말하길 세속에 물든 애들이랑 할 수 없다고 하더라. 나를 탈퇴시키면서 물어본 게 “너는 한국의 정신에 대해서 아느냐?”란 질문이었다. 쫓아 내려면 그냥 쫓아내면 되지 그런 건 왜 물어보냐고. 또 내가 한때 엔터테인먼트에 종사했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통해 협찬을 받으려고 함께하자 하는 일이 많다. 같이 그림을 그리자는 이야기는 안 한다. 그런 것 때문에 영화를 했다는 게 불리한 입장이기도 하다.

-1996년 <알바트로스>에 출연한 뒤로 연기를 그만두었다. 배우 시절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군대를 다녀온 느낌이다. 싸우러 나가는 것처럼 일을 했던 것 같다. 아침마다 훈련소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충무로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으니까. 또 영화를 했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 인생은 어차피 연기지 않나. 지금도 못하지만, 예전에는 정말 말을 못했는데, 그나마 연기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연기를 했었다는 사실이 꿈같기도 하다. 나도 한때는 배우라는 건 안성기나 황신혜 같은 사람만 하는 줄 알았으니까.

-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청바지 모델을 했었다. ‘서지오 발렌타인’이라는 브랜드였는데, 알려나 모르겠다. 잡지모델을 하면서 톰보이 모델도 했고 금성, 코카콜라 모델도 하면서 이것저것 많이 찍었다. 그러면서 영화쪽 눈에 띈 거지.

-첫 작품이 <슈퍼홍길동>으로 나와 있다. 강리나의 데뷔작이라고 하기에는 낯선 영화다.
=그게 첫 영화 맞다. (웃음) 사실 그때는 영화를 찍는다는 기분보다도 그냥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심형래씨랑 영화 3편을 같이 했다. <우뢰매8>과 <우뢰매3>도 있다. (웃음) 그러다가 <서울무지개>로 공식적인 주연배우로 데뷔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도발적인 외모를 가진 배우였다.
=지금은 그냥 그랬나보다 한다. 당시에는 영화에 필요한 장면이니까, 샤워신이나 베드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또 요즘처럼 야하지도 않다. 그래도 옛날에는 그걸 가지고 충격적이란 이야기들을 했던 거다. 그때는 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면 그조차도 제대로 읽지 못할 때였다. 또 그때는 ‘섹시’란 단어를 쓰면 얼굴이 빨개지고, 열꽃이 필 때였다. 그런 시대에서 내가 좀 도발적이긴 했다. 마광수 교수님이 한마디 한 것 때문에 더불어서 더 특이한 여자가 된 것도 있고.

-마광수 교수가 어떤 이야기를 했기에.
=교수님이 쓰신 <즐거운 사라>의 사라가 강리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책을 보면 사라란 여자가 H대를 다니고, 키가 167cm에 부모는 외국에 있고 오빠랑 남동생이랑 같이 사는 걸로 나온다. 실제의 나와 매우 흡사했던 거지. 그때 누가 교수님께 전화를 해서 사라가 혹시 강리나가 아니냐고 물었다더라. 그때 교수님께서는 “어, 그래 그건 영화로 하면 강리나가 맞지” 하고 대답했는데, 사람들은 이게 강리나구나 하고 오해한 거다. 원래는 연기력이 출중한 신인배우로 통했는데, 그분 말 한마디 때문에 완전히 야한 여자가 된 거지. (웃음)

-그 이후로 맡은 배역들도 그런 영향이 컸던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변금련> 때문인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멜로는 아예 멜로, 에로틱한 건 아예 에로틱, 사회성은 아예 재미없는 사회성으로 나뉘었다.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에로틱한 건 더 에로틱하게 찍으려 한 거지. 그러다보니 성인영화도 이게 비디오영화인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인지 헷갈려하던 시기였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한테 에로배우라고 했는데. 이 수식어도 잘못된 거다. 당시에 갑자기 16mm 비디오영화들이 생기면서 다 한데 묶여버린 거다.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배우들이 다 같이 겪었던 일이다.

-그런 시선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상처를 겪는 일이 많았겠다.
=아직도 그런 분들이 많다. 그 당시 배우들은 영화에 충실하기 위해서 옷도 벗고, 물에도 뛰어들었던 건데, 결국 몸 파는 여자로 인식돼버린 거다. 마치 주홍글씨가 찍힌 것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 에로라는 수식어가 주는 상처는 거의 살인무기다.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면서 끝까지 사람을 괴롭힌다. 언론에서도 이런 수식어 하나에 신경을 써서 붙여주는 세심함이 필요할 것 같다.

-배우 활동을 그만두었던 이유도 그런 상처 때문이었나.
=하나의 이유이긴 했다. 하지만 진짜로 접은 이유는 배우 생활을 하던 내내 내가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 매니저를 하던 오빠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보호하는 일은 정말 잘하는데, 경영적인 부분은 정말 못하는 거다. 나는 오빠를 믿고 있었는데, 돈은 돈대로 나가는 그런 상황이 정말 싫었다. 또 가끔씩 그림을 그리던 조그만 작업실도 없애라고 하니까 화가 났었다. 연기자로서 마음을 못 두는 상황에서 마음의 안식처로 갖고 있던 작업실이었는데, 그런 걸 없애라고 하니까. 그때 그림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연기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림은 오로지 나를 찾는 길이지 않나. 그래서 어느 순간 그만두어야 하는 정점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바트로스>에 출연하면서 그 정점을 만난 거였지.

-<알바트로스>를 촬영하면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가.
=그동안 나는 항상 주인공만 했고, 인터뷰도 나 혼자 다 했었다. 그런데 <알바트로스> 때는 차인표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머지는 왕따가 되더라. 그제야 이제는 내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또 차인표가 워낙 좋은 사람이더라. 착하고, 예의 바르고 훌륭한 배우다. 그런 좋은 사람과 함께 영화를 찍은 건 다시는 없을지 모르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고, 그런 만큼 더더욱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웃음)

-하지만 10년씩이나 한 연기를 한번에 버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주위에서 말리지는 않았나.
=집에서 제일 말렸다. 금전적인 어려움이 있으니까. (웃음) 배우들이 뭘 하나 찍으면 목돈이 들어오는데, 어느 순간 그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타격이 크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내 의도였다. (웃음) 아예 가난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지. 그러면서 이쪽이 아닌 저쪽 하늘로 날아보는 것을 상상했다. 당시에는 그림 그리던 친구들이 내가 배우인 점을 이용하려던 게 있었는데, 그들한테 내가 정말 순수하게 미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다시 연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가.
=현재 제작자 대표를 맡고 있는 친구들은 내가 영화 안 하기를 잘했다고 말한다. (웃음) 나라는 사람을 잘 아니까 그러는 거다. 현재는 연기는 아니고, 제작이나 기획쪽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는 작품이 있다. 아이템도 있고, 어떻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연기는 편하게 생각하고 싶다. 지금은 이쪽에서 불을 댕겼지 않나. 이걸 해결 못하면 다른 걸 하기도 힘들다. 미술에서 승부를 본 뒤에 나이 먹은 역할을 맡아 컴백을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이쪽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제작하는 영화의 카메오 출연 정도는 생각하고 있지만. (웃음)

-배우보다는 지금이 더 행복한 건 맞는 건가.
=마음이 더 편한 건 사실이다. 배우란 직업은 나와 소통하기 힘들었다. 연기에 대한 철학이나 공부한 것도 없이 덤벼든 건 정말 잘못했던 것 같다. 이건 자신감이 있고 없고의 문제다. 예를 들어 옆에서 이건 작품도 아니라고 그래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면 그 사람은 프로인 거다. 나는 연기를 하는 동안, 주위에서 그것도 연기냐고 그러면 아예 접어버리고 금방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밀고 갈 수 있다.

-영화배우 유준상이나 감우성도 한때 미술을 전공했다. 그들처럼 미술을 했던 배우들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 친구들도 나중에는 미술로 돌아오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자기가 갈 수 있는 방향에서 열심히 하면 된다. 나는 내가 고집해서 남아 있는 거고, 이쪽으로 올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것뿐이다. 어차피 우리는 바다다. 우리는 서로 색깔이 다르다고 하지만, 어차피 똑같은 바다를 이루는 물방울들이다. 어디에 있든 이 바닥에서는 함께 있는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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