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봅시다]
[알고 봅시다] 재치 만점 이미지의 주인공은 패셔니스타
2007-05-03
글 : 정재혁

시간이 멈춘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 숀 엘리스 감독의 영화 <캐쉬백>은 주인공 벤의 내면을 빌려 시간을 정지한다. 흐름이 끊긴 이미지는 순간의 힘을 타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주인공의 시선은 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한다. 동명의 단편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캐쉬백>은 패션 사진작가 출신 감독의 작품. 영화는 정지된 이미지를 유영하며 한편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cash back)’ 주인공과 시간을 조작해 영화를 완성한 감독. 숀 엘리스는 누구일까.

숀과 사진

숀 엘리스

“새롭고, 모던한 룩(look).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대담한 이미지.” 잡지 <레인지 파인더>의 주디스 벨이 숀 엘리스의 사진에 대해 남긴 평이다. 11살 무렵부터 흑백사진 작업을 시작한 엘리스는 “셔터 스피드, 조리개, 정확한 노출”보다 자신의 감정, 즉흥성에 기인한 사진 찍기를 즐긴다. <I.D.> <더 페이스> <아레나> <보그> 등의 패션잡지에 사진을 실으며, 2005년에는 영국의 주간지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가 선정한 ‘영국 톱10 사진작가’에 뽑혔다. 그의 사진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빛의 사용. “라이트 미터를 사용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느낌을 연출한다”는 그는 영화적인 연출로도 유명하다. “의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스토리일까.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이런 상상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패션잡지 <더 페이스>를 발판으로 활동했으며, 리바이스, 휴고 보스, 디오르, 랜드로버 등의 광고 사진으로도 성공했다.

숀의 ‘365’

패션사진으로 입지를 굳힌 숀 엘리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인물 사진을 많이 찍었다. 동시에 활동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1999년에 발표한 사진집 <365>에는 그가 파리, 뉴욕, 타이, 뉴올리언스 등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 사진의 모델들은 엘튼 존, 케이트 모스, 밀라 요보비치, 알렉산더 매퀸, 브라이언 페리, 팀 버튼, 기타노 다케시, 트렌트 렌저, 카일리 미노그, 에릭 바나, 스탈라 매커트니, 에어 등이다. 1년의 365일을 의미하는 사진집은 그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진뿐 아니라 연출과 무대를 벗어난 일상적인 사진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그는 데이비드 린치와 함께 잡지 <하퍼스 바자>에서 패션 이미지 작업을 했으며, 1998년에는 여성 4인조 그룹 올 세인츠의 뮤직비디오 <네버 에버>를 연출해, 브릿어워드에서 상을 수상했다.

또 한편의 <캐쉬백>

<캐쉬백> 중에서

장편 <캐쉬백>은 단편 <캐쉬백>을 품에 안고 있다. 18분의 단편이 101분의 장편 속에 고스란히 담긴 모양새다. 벤이 여자친구 수지를 떠올리는 장면이 중간에 삽인된 점을 제외하면 장편은 단편의 앞과 뒤를 완벽하게 감싼다. 2004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던 단편 <캐쉬백>은 숀 엘리스 감독이 영국의 대형 마트인 세인즈베리를 빌려 4일간 완성한 작품. 모두 밤시간에만 촬영했다. 영화는 마트에서 일하는 주인공 벤이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시간을 멈추는 이야기. 개성있고 재치 넘치는 연출은 각종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12개의 상을 수상했고, 엘리스는 “이 이야기의 시장이 있다”고 판단해 장편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찍기보다는 단편을 늘리기로” 결정한 그의 구상에 따라 장편은 결국 벤이 마트에서 일하게 된 이유와 그 이후의 일들을 설명하는 형태로 완성됐다.

숀과 영화

숀 엘리스의 데뷔작은 2001년 단편 <레프트 턴>이다. 1980년대 호러영화를 주로 즐겨봤다는 그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을 보며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공포영화의) 무슨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순간을 포착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에이리언>으로 맺어진 리들리 스콧과의 인연은 좀더 발전해 그가 연출한 두편의 단편 <레프터 턴>과 <캐쉬백>은 모두 리들리 스콧의 제작사인 RSA을 통해 만들어졌다.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사진 속에서도 보인다. 엑스칼리버를 컨셉으로 그가 <더 페이스>에 실은 사진은 영화 <엑스칼리버>의 갑옷을 소품으로 빌려서 촬영한 작품.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조명 구상에만 이틀을 보냈다. “단지 팝(pop)한 감독은 사절”이지만, “사람들이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숀 엘리스, 그는 최근 또 다른 장편영화 <브로큰>의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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