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후반, 예고없이 불쑥 나타난 쿠바의 노 감독 마누엘 페레즈 파레데스는 “기적같이 도착했다”면서도 연한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는 여유를 잊지 않았다. 쿠바판 <토지>같은 <마우리시오의 일기>도 일종의 기적이다. 1984년 이후 22년만의 신작을 만드는데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자본이 필요했고, 투자자의 간섭없이 쿠바 배우들만으로 지극히 쿠바적인 사연을 담아냈다. 무엇보다 80년대 이후 쿠바 안팎에 휘몰아친 격변이 혁명세대에게 얼마나 난감한 것이었는지 그 속내를 큰 저항감없이 풀어내고 있다. 성공한 혁명세대의 후일담 영화인 셈인데, 시대의 부침 자체보다 그 가운데 놓인 인물들의 심정에 초점을 맞춰놓으니 그들의 당혹감이 오히려 더 실감난다.
“1959년 쿠바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던 19살 젊은이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보는 19살 젊은이의 심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게 가능하다고 여겼던 세대와 모든 게 실패한 듯한 심정이 된 세대 사이에 흐르는 갈등이랄까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공 마우리시오는 체 게바라와 무장투쟁에 함께 했던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 영웅이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무릅쓰고, 모스크바로 유학보낸 유일한 혈육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핀란드에 정착해버리는 파란을 겪는다. 마우리시오와 같은 세대인 감독은 붕괴된 미래보다 과거를 더 바라보는 주인공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각본을 쓰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촬영하면서 깨닫게 됐다. 마우리시오에게는 연인과 딸 등 4명의 여자가 맴도는 데 이들 모두 삶의 변화에 훨씬 잘 적응한다는 거다. 여자들은 좀더 실용적이고, 마우리시오는 좀더 이상적이다.”
쿠바 혁명 당시 어떤 기여를 했느냐는 물음에 쿠바영화예술협회에서 예술컨설턴트을 해온 감독이 현명한 답을 내놓는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다. 나의 인생도, 쿠바영화도 쿠바혁명의 부침과 함께 해왔다. 그 정점과 저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