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본 멜로영화들] <러브레터>부터 <내일의 기억>까지
2007-05-11
글 : 이다혜

<러브레터>
이 모든 것은 <러브레터>에서 시작됐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니, 어둠의 세계니 하는 것들이 발달하기 전, 한국과 일본은 서로의 문화를 탐하기 위해 음성적이고도 음성적인 통로를 거치거나 ‘직접 현지에서’ 비싼 값을 내고 공수하는 수밖에 없던 때, 한국 대학가를 뒤흔든 멜로영화가 있었으니 그 제목은 <러브레터>다. 순정만화적인 감성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신비하게 닮은 두 여자(알고 보니 일인이역이지만), 마지막의 눈물 쏟아내는 반전. 주인공이 일인이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화면으로, 용케 대학에서 상영회도 연 작품이다. 눈물의 순애보로서 일본영화가 처음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뒤, 일본영화 수입 개방 조치가 내려지고 한동안 일본영화의 흥행성적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설의 <러브레터>도, 막상 극장 개봉에서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영화를 포함한 일본소설 등 일본 문화 전반이 지금처럼 ‘일상적’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도쿄맑음>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아라키 노부요시 역의 다케나카 나오토는 <쉘 위 댄스> <으랏차차 스모부> 같은 코믹물과 <완전한 사육> 시리즈 같은 변태적 느낌이 나는 에로에로한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를 소화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도쿄맑음>의 내용은 그의 작품 중 예외적인 편에 속한다. 젊은 사진작가 시마즈(다케나카 나오토)와 여린 감성의 아내 요코(나카야마 미호)가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하게 살지만 그 삶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영화는 은밀하게 암시한다. 사진을 찍는 남편과 그의 눈에 비친 아내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곧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을 포착한 영화로,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바윗돌을 피아노 삼아 손가락을 놀리는 요코의 이미지 등은 서늘한 아름다움을 준다. 옆집 남자아이에게 여자 옷을 입히려 하고 귀에 모기가 날아다닌다고 발작하는 요코의 모습에서 시마즈가 불안을 느끼는 대목들이 바스러질 것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보는 내내 눈물이 흐른다기보다 영화가 끝난 뒤의 여운이 깊은 작품.

<냉정과 열정 사이>
일본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그 성공이 일본소설과 연계되기 시작한 지점에 있는 작품. 원작 소설은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가 번갈아가면서 연재했던 글을 두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미 헤어진 지 오래된 남녀가 각자의 삶을 살며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마침내…,로 이어지는 이야기.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의 몇년 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책의 성공과 함께 에쿠니 가오리는 한국에서 연애소설의 여왕으로 등극했으며 영화 역시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의 볼거리 중 하나는 이야기가 벌어지는 이탈리아의 풍경. 피렌체와 밀라노가 내내 배경으로 깔리기 때문에, 영화 속 장소들은 이후 배낭여행객 사이에서 일종의 ‘성지’로 등극하기도 했다.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대성당에서 서른 번째 생일에 만나기로 한 낭만적인 약속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결국은 잊지 못한 그때 그 사랑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지만 그 정도가 과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친구로, 어정쩡한 거리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사랑과 이별의 시간을 보여준다. 특별한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 두려운 것도 세상의 눈도 아랑곳 않는 관계,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붕괴해버리는 관계. 일본 밴드 쿠루리의 담담한 노래와, 쓰마부키 사토시의 풋풋하고 귀여운 얼굴, 이케와키 지즈루의 드센 오사카 사투리와 외곬수적인 연기 등 이 영화를 특별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에 눈물을 떨구는 데는 아마 한 가지 이유뿐일 것이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가보았던 곳이고, 겪어보았던 감성인 것이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최초의 사랑이 스스로 배반당해 결국 꺾이는 순간의 고통을, 더없이 잘 그린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장맛비와 함께 죽은 아내가 찾아오다. 모든 것이 몹시도 푸르른 세상. 젊은 아빠 타쿠미(나카무라 시도)와 어린 아들 유지(다케이 아카시)가 사는 숲가 작은 집에 도착한다. 봄바람이 습기를 품자 타쿠미는 일기예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유지는 ‘데루테루 보우즈’(맑은 날씨를 기원하는 인형)를 거꾸로 매단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기우제를 드린다. 1년 전 병으로 숨진 타쿠미의 아내 미오(다케우치 유코)의 약속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시 비의 계절이 돌아오면 둘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러 올 거야.” 그리고 미오는 정말 돌아온다. 문간에 버려진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미오에게 남편과 아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고교 시절 짝꿍에서 부부가 되기까지 더딘 사랑의 사연을 타쿠미가 미오에게 조금씩 들려주는 동안 두 사람은 열일곱의 그날처럼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모른 채 이 세상으로 돌아와 다시 예전의 사랑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일본과 한국은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내일의 기억>
불치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멜로의 단골 소재다. <아이리스>는 세계적인 지성으로 알려진 문인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내일의 기억> 역시 그렇다. 몸이 죽어가는 것보다도 슬픈, 정신이 죽어가는 병, 알츠하이머. 내일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알아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공포와 눈물을 불러온다.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에키(와타나베 겐). 일에서만은 완벽함을 추구하며 때론 엄격하고 때론 자상한 상사로 회사에서도 인기가 높다. 외동딸을 둔 그는 집에서는 더없이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건망증인 줄만 알았었는데 증세가 심각해지면서 길을 잃고, 사람들 이름 마저 잊어가게 된 것. 쏟아지는 기억들을 붙잡고 싶은 사에키는 결국 회사도 그만둔 채 아내와 단둘이 지내며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