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단할 것은 없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라이드는 거창한 모험의 세계라기보다는 제멋대로 나대는 무뢰한들의 잔치에 가까웠다. 럼주병을 양손에 쥔 채 돼지우리에 자빠져 자거나, 술에 취해 난장판으로 싸움을 벌이고,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해적들의 전시장. 하지만 어쩌면 핵심은 그것이었다. 해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발산하는 무정부주의적인 일탈성을 마음껏 유희하고 소비하는 것. <캐리비안의 해적>은 그러한 라이드의 본바탕 위에 캐릭터와 이야기를 설계했다. 지극히 단순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고전적인 해적영화의 항로를 크게 이탈하는 선택이었다. 과거 해적영화 속, 주인공의 자리에 오른 해적들은 사실상 해적의 옷을 걸친 고결한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해적질 뒤에는 언제나 든든한 대의가 버티고 있었다. 불의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으로 해적의 삶을 선택하거나, 혹은 나라를 위해 적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역할을 자임하거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존재들이었다. 이른바, “해적 성인들”(piratic saints)이라는 지극히 반어적인 명칭은 그래서 등장했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해적영화를 배반함으로써 제대로 된 해적을, 비열하고 뻔뻔하며 제멋대로인 해적을 부활시켰다. 그 선봉장은 두말할 필요없이 잭 스패로우 캐릭터다. 항구에서 입국세를 받는 관리의 푼돈이나 슬쩍하고, 감방 열쇠를 문 개를 향해 애타게 뼈다귀를 흔들어대는 치졸함은 기본이요,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온갖 파렴치한 거짓말을 꾸며내고 타인을 팔아넘기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그에겐 법, 도덕, 명예에 대한 최소한의 강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니 뎁이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를 모델로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적은 18세기의 록스타”라는 설정에서 탄생한 잭 스패로우는 단정한 유니폼을 갖춰 입는 대신 너덜대는 빈티지 패션에 드레드 머리를 하고, 눈가에는 짙은 마스카라를 바른 채 지극히 모던한 반영웅의 자리에 섰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터무니없이 과장됐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듯한”이라 표현한 비척대는 걸음걸이와 제스처는 조니 뎁이 “바다 위에서 엄청난 더위와 습도를 그대로 견뎌내야 했을 해적”에 이입하려 했던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그처럼 전대미문의, 심지어 게이스럽기까지 한 해적이 책상머리 앞의 관료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졌을 리 없다. 애당초 “버트 랭커스터처럼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던 디즈니 간부들은 조니 뎁의 모습을 보자마자 넋이 나갈 듯 기겁했고, 전화통을 붙들고 귀청이 떨어져라 불평을 털어놓았다. “대체 왜 웃기게 걷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게이야, 아니면 술에 취한 거야?” 조니 뎁은 지극히 잭 스패로우스러운 태도로 응수했다. “날 못 믿겠으면 해고하면 될 것 아뇨.”
“해적 성인”이 성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떨구었다면, 악당 캐릭터들은 평면적인 악랄함의 가면을 벗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1, 2편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해골, 돌연변이와 같은 괴기스러운 외모와 불멸의 힘으로 일견 전통적인 악역에 종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설계하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사실 고통을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고통을 받는 존재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이하 <캐리비안의 해적1>)의 바르보사 선장과 선원들은 저주를 받아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참혹한 상황에 절규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이하 <캐리비안의 해적2>)의 데비 존스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찢겨나간 심장을 상자에 봉인한 비운의 사나이이고, 그의 부하들은 닥쳐올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물이 될 것을 선택한 나약한 군상이다.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악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옭아맨 저주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지키기 위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그래서 <캐리비안의 해적>의 악당 캐릭터들은 실상 ‘악당’이 아니다. 잭 스패로우의 반대 진영에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쪽 진영과 저쪽 진영을 가르는 선 또한 지극히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북쪽을 가리키지 않는, 손에 쥔 자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나침반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기본적인 역학을 상징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당연하게 규칙을 어기는 자들의 이야기”라는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말처럼, <캐리비안의 해적>의 캐릭터들은 정해진 항로가 아닌, 그때그때 자신의 욕망이 추동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저분하고 교활한 해적들에 비해 비교적 결백해 보이는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도 결국 필요를 위해 적과 손을 잡거나 생존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인다. 2편의 마지막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생명을 구한 잭 스패로우를 속여 희생양을 삼을 때, 잭은 그녀에게 “해적감이군”(pirate)이라고 이야기한다. 욕망이라는 유일한 법을 섬기는 인물들. 그들은 모두 해적이거나, 해적이 되어간다. 그래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짜릿함은, 블록버스터에 빠짐없이 동반되는 매끄러운 특수효과와 시각적 향연 외에도, 관계의 다이내믹함에서 비롯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상황. 끊임없이 역전되는 관계의 유동성은 2편에서 정점에 달한다. 거대한 물레바퀴 위에서 검을 맞부딪히는 잭 스패로우, 윌 터너, 제임스 노링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비 존스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한배를 탔던 세 사람은 망자의 함의 열쇠를 놓고 번갈아가며 칼끝을 겨눈다. 크라켄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잭 스패로우, 아버지를 데비 존스의 휘하에서 해방시키려는 윌 터너, 몰락한 자신의 지위를 복원하려는 제임스 노링턴.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각각 검이 향하는 곳을 바꾸며 위태로운 춤을 추듯 바퀴를 굴리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곡예에 가까운 묘기이자, 주동과 반동 진영이 끊임없이 서로를 바꿔치는 갈등 관계의 절정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작가가 <슈렉>의 작가 콤비 테드 엘리엇과 테드 로시오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슈렉이 등장하자마자 동화책을 발기발기 찢어 밑을 닦는 것처럼, 잭 스패로우는 침몰 직전의 조각배에서 물을 퍼내며 등장한다. “해적영화라기보다는 해적영화에 관한 영화”를 의도했다는, 노골적인 장르 비틀기로 막을 연 두 작가는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모험 영화의 클리셰들을 하나둘 위반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예컨대 <보물섬>부터 <컷스로트 아일랜드>까지, 기존의 해적영화들이 보물찾기에 주력했다면 <캐리비안의 해적1>은 거꾸로 보물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해적들의 여정을 제시한다. <캐리비안의 해적2>는 식인종 부락에서의 요란한 탈출극과 같이 전체 서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오락거리를 산만하게 펼쳐놓으며 영화 전체를 만화에 가까운 농담으로 만든다. 얼결에 꼬치구이가 돼버린 잭 스패로우나 뼈 우리에 갇힌 채 경주를 벌이는 블랙펄 선원들의 모습은 블록버스터가 가져다주는 장중한 규모의 쾌락이 아닌, 슬랩스틱코미디와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변칙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캐리비안의 해적1>의 첫 시사회가 디즈니랜드에서 열리던 날, 키라 나이틀리는 올랜도 블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을 거야.” 확실히, 6억5천만달러의 흥행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잭 스패로우는 명백한 유행 아이콘이 됐다. 블랙펄 선장이 되기 전 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책들이 출판되었으며, 피겨가 만들어졌고, 게임이 출시됐다. 속편 제작이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올랐고,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2편과 3편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캐리비안의 해적2>는 평론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역사상 최단기간 박스오피스 수입 1억달러를 달성하며 최종적으로는 1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3부작에 마침표를 찍을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이하 <캐리비안의 해적3>)는 바다 괴물 크라켄의 배 속에서 살아 돌아온 잭 스패로우와 일행을 유럽 대륙이 아닌 낯선 세상, 싱가포르로 이끈다. 해적의 존재 자체를 쓸어내고 해상 권력을 장악하려는 동인도회사에 맞서 전세계 해적들이 집결하고, 두 진영간의 전쟁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주윤발이 동양의 해적왕 사오 펭으로 등장하고, 키스 리처드가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가 되어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무대는 더욱 커졌고 활극의 강도도 더욱 세졌지만, 결국 <캐리비안의 해적3>는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역시나 “배신과 배신이 거듭되는 스토리”가 될 것이다. 물론, 시리즈 3편의 전망이 마냥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2편과 3편을 몰아 찍는 제작방식 탓에 <캐리비안의 해적3>는 시나리오가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이 시작됐고, 배우들은 2편과 3편을 번갈아가며 찍느라 겪어야 했던 혼란스러움을 불만스레 토로하기도 했다. 바다의 변덕으로 자고 일어나면 배와 세트가 부서져 있는 일이 허다했고, 아예 카리브해에 폭풍이 불어 촬영이 중단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음은 물론이다.
악천후와 함께 항해를 시작한 캐리비안호는 기대 이상의 순풍을 거쳐 이제 막 3부작의 끝이라는 목적지에 정박하려는 참이다. 세상의 끝을 경유한 이들의 항해가 순조로운 것이 될지 여부는 아직 명확히 가늠해보기 힘들지만, “윙크를 보내는 해적영화”(pirate movie with a wink, 제리 브룩하이머)가 21세기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 특유의 눈짓을 잊지 않는 한, 대중은 캐리비안호의 귀환을 반길 것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출렁이는 파도 위의 해적선, 무책임 선장 잭 스패로우와 한병의 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