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토크]
[메신저토크] 시대착오는 자막이 전담하고 있네요 ①
2007-05-24
글 : 이동진 (영화평론가)
글 : 김혜리
이동진 “소피아 코폴라의 재능과 잘 안맞는 것 같아요” vs 김혜리 “역사와 인물의 해석에 관한 책임에 관심이 없어요.”

아깝다 줄리언 무어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모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베르사유의 장모님의 말(이하 장모): 이번주는 공교롭게 둘 다 영화를 많이 못 봤네요. 우선 <마리 앙투아네트>는 꽤 기대했던 영화였어요.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라면 동아시아 여성들은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로 익숙한 스토리죠. 저와 많은 여자친구들은 프랑스 대혁명을 <베르사유의 장미>로, 볼셰비키혁명은 역시 같은 만화가가 그린 <올훼스의 창>으로 처음 알게 됐을걸요?

아깝다 줄리언 무어님의 말(이하 무어): 두 작품 모두 제목만 많이 들어봤어요. -.-

장모:대학에서 혁명사 수업을 듣고 난 뒤에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혁명의 이미지는 만화의 기억이에요.

무어:마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소설 <태백산맥>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과 유사하네요.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런 기대에 부응했나요?

장모:사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전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을 약간 미심쩍게 봤기 때문에 베르사유와 앙투아네트를 스크린으로 본다는 기대가 더 컸어요. 다만 칸에서 이 영화가 야유를 사고 프랑스 평단이 몹시 싫어했다는 소문에 “흠 그렇다면 혹시 재미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

무어:저는 소피아 코폴라의 전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처녀 자살 소동> 모두 괜찮았어요. 솔직히, 이번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의 재능의 색깔과 잘 안 맞는 영화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전 코폴라의 재능이 작고 미묘한 감정을 세심하게 그려낼 수 있는 데 있다고 보는데 이 영화는 그 재능에 이야기 자체가 맞지 않은 느낌이 있어요. 누구나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품을 끌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보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에서조차 작고 미묘한 감정에 집중한 거죠. 영화가 잘 풀리지 않은 결정적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장모:말씀대로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순간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독숏이었어요. 국경을 넘으며 완전히 발가벗은 소녀의 롱숏과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궁전의 꽃무늬 벽 앞에 스며들듯 멍하게 서 있는 정면숏이 그랬죠. 낯선 장소에 떨어진 이방인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통하긴 하죠.

무어:여주인공이 갓 결혼한 새댁이라는 점도 같아요. ^^

장모:헉, 새댁! 그건 미처 생각 못했네요.

무어:몇몇 롱숏들이 제겐 인상적이었어요. 베르사유 궁전의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든지, 발코니에 혼자 서 있을 때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롱숏으로 화려한 궁전 속 한 여인의 외로움을 강조한다든지.

장모: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대로 이입되는 감정은 소녀 앙투아네트의 환멸뿐이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사실이나 참신한 관점은 없었으니까요.

무어:코폴라의 영화에서 고독이라는 감정의 특징은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소통되지 않는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외로운 것이죠. <처녀 자살 소동>에선 무려 7명이나 되는 가족이 있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선 주위에서 북적대는 숱한 일본인-타인이 있죠. 그리고 이 영화에선 한 가련한 오스트리아 여인을 둘러싼 프랑스인들 속의 고독이고요.

장모:허영의 세계가 나오는 영화에 자주 대두되는 해석이지만 베르사유=할리우드로 보는 시각도 있을 거예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는 미국 인디영화계의 ‘공주’고 많은 유명 인사들의 친구잖아요.

무어: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모티브도 사실 그와 많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코폴라의 정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히 10대 시절인 것 같아요.

장모:(여기서 그럼 초대소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을 모셔서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애초의 제 짐작은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시대착오 기법의 사극이 아닐까였어요. 말하자면 이보다 더 달콤하고 과장스런 작품을 기대한 거죠. 그런데 이 작품은 그렇진 않더군요. 화면 밖 음악만 미국 청춘영화에 쓸 법한 음악들이고. 사실 시대착오는 자막이 전담했죠. -_-

무어:맞아요, 번역 이야길 안 할 수 없네요. “좀 당혹스럽네요” 정도 되는 대사를 “대략난감”이라고 하고 “혐오스럽군”을 “완전 쏠려”라고 바꾸는 식의 이 영화 번역은….

장모:그걸 또 일일이 받아적은 거죠? 지적하려고. ^0^

무어:그럼요. ^^ 받아쓴 거 많은데, 몇개 더 맛보시려우?

장모:좋아요.

무어:“아임 이그조스티드”(I’m exhausted)라는 루이 16세의 말을 “겁나 피곤해요”라고 하는 것도 그렇죠. “이젠 다 엉기는군. 다들 날 개무시해”는 또 어떻고요…. 전 “헤어가 세련되시다”는 번역도 참 부담스러웠슴다. 물론 그런 속어를 써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게 이 영화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는 거죠. 만일 5년쯤 지나서 이 영화를 그 번역본으로 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장모:영화의 원래 영어 대사가 슬랭이었다면 적절한 선택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으니까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로베스 피에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영화라면 한글자막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놀라서 벌떡 일어날지도….

무어:아까 잠시 하려던 말을 이어보면, 소피아 코폴라의 감성은 확실히 10대 시절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코폴라의 성장과정에 팝음악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에 100원 걸겠어요.^_^ 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예를 들어 빌 머레이가 일본 가라오케에서 록시 뮤직의 <모어 댄 디스>를 무심히 부르는 장면. 그게 영화의 핵심 이미지 같기도 해요. 그런데 이번 영화의 음악은 좀 실망스러웠어요, 코폴라의 10대 시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80년대 음악들로 주로 구성이 되어있죠. 수지 앤드 더 밴시즈 같은 펑크밴드에서 바우와우와우 같은 뉴웨이브 밴드까지 말이에요. 뉴 오더 음악도 있고요.

장모:바우와우와우의 <아이 원트 캔디>가 나왔죠?

무어:그 노래는 흡사 뮤직비디오처럼 연출된 시퀀스에 쓰였죠. 그런데 이런 음악으로 아마도 코폴라는 시대극에 현대적 감성과 청춘영화적 느낌을 불어넣으려 했겠지만 제대로 화면과 안 붙는다는 느낌이었어요. 똑같이 시대극에 록음악을 넣어도 <기사 윌리엄>은 선곡이 ‘딱!’이라는 느낌인데 말이죠.

장모:<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적 해석의 책임은 물론 인물의 해석에 관한 책임에도 관심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역사적 비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 못 받은 여자의 멜로도 아니고 10대 영화로 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미국 10대 영화로 치면 아이들이 차를 몰고 강둑이나 바닷가에 해돋이를 보러 갈 만한 대목에, 밤새 파티를 한 앙투아네트와 친구들은 베르사유 호숫가에 앉아 있어요. 앙투아네트가 쇼핑하는 장면도 <클루리스>의 한신을 연상시키죠.

무어:전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상당히 당혹스러워할 것 같아요. 마치 앙투아네트에 대한 다섯 시간짜리 영화에서 앞의 두 시간만 보고나온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장모:그런 맥락에서 마음 걸리는 장면이 시민들이 베르사유로 진격한 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가 발코니에 나가서 군중과 대면하는 장면이에요. 만약 코폴라가 정말 베르사유라는 자폐적 ‘도시’에서 불행한 10대를 보내고 철들자마자 처형된 여자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면, 현실이 문을 두드리는 사운드를 들려주는 정도에서 끝나야 형식적으로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무어:영화가 끝을 맺는 방식이 너무나 애매하다는 느낌이에요. 그 시대와 그 인물을 해석해내는 코폴라의 시선 자체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장모:배우 중에는 앙투아네트를 훈육하는 노아이유 부인으로 분한 주디 데이비스가 관객 눈에 친숙할 텐데요. 정말 그런 신경질적인 얼굴이 아침마다 깨운다면 누구라도 우울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휴 그랜트의 눈꺼풀이 그렇듯, 배우의 신체 일부가 단독으로 연기를 할 때가 있잖아요? 데이비스의 긴장된 목울대는 정말 그것 자체로 연기예요, 신경을 곤두세우면 거의 새총으로도 쓸 수 있을걸요? ^_^

무어:하하. <처녀 자살 소동>에서 조시 하트넷이 커스틴 던스트에게 여우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여우’ 같은 매력의 ‘여우’(女優)인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서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케이크를 먹으면서 도발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은 던스트에 대한 코폴라의 인상을 그대로 보여주죠.

장모: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렇게 엄청난 생크림 디저트를 먹고도 그렇게 꽉 끼는 보정속옷을 입었다는 건 불가사의예요.-_-#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이 영화를 ‘코스튬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이 주저되네요. 옷은 많고 아름다운데 그것이 스펙터클이 아니라 일종의 마비효과와 권태감을 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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