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7 납량 공포 특선] 검은 장갑의 살인마가 돌아왔다
2007-07-05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부천영화제에서 회고전 갖는 이탈리아 호러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에 대한 장르 팬들의 관심은 최근 몇년 동안 다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가 찍은 두편의 <마스터즈 오브 호러> 에피소드는 완성도나 취향과는 상관없이, 그가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선 장르 도구들을 휘둘러대며 맹렬히 활동하는 현역임을 입증했다. 이번 칸영화제에서는 새로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아르젠토 최고 히트작인 <서스페리아>를 공개했고, 20여년 넘게 미완성으로 방치되어 있었던 <세 어머니>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눈물의 어머니>가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활동 소식만 들어보면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슬럼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슬럼프라. 도대체 다들 쉽게 말하는 아르젠토의 슬럼프란 정체가 뭘까?

기간을 따진다면 아르젠토의 슬럼프 기간은 다들 그의 마지막 걸작이라 부르는 1987년작 <오페라>를 찍은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가리킨다. 그의 첫 미국영화인 93년작 <트라우마> 이후로 잡는 사람들도 있긴 할 거다. 하긴 그 뒤로 아르젠토는 <딥 레드>나 <서스페리아>처럼 장르 팬들의 화끈한 사랑을 받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오페라>라는 정점 이후 다리오 아르젠토라는 검은 장갑을 낀 학살자가 에너지와 영감을 잃고 추락하기만 했다는 증거가 될까?

지난 10여년간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다

선입견을 접고 90년대 이후 그가 만든 작품들을 보면 엉뚱한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슬럼프 기간이라고 알려진 이 시기만큼 아르젠토가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했던 적은 없다. <오페라의 유령>은 그의 첫 사극 공포였다. <카드 플레이어>에서는 학살장면들을 극도로 억제하고 살인범과 형사의 지능대결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 역시 그에겐 새로웠다. <스탕달 신드롬>에서도 학살보다 연쇄강간범과 맞서는 경찰의 내면을 초현실적으로 그리는 데 집중했는데, 이런 식의 심리묘사나 캐릭터 스터디 역시 아르젠토에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온 아르젠토 영화들 중 그나마 팬들의 호평을 들었던 건 가장 전통적인 지알로였던 <슬립리스>였다.

슬픈 일이다. 늘 극히 좁은 장르의 영역 안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만 되풀이하던 한 예술가가 뭔가 다른 영역에 도전하려 10년 넘게 시도했는데 제대로 성공한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것 말이다. 더 슬픈 것은 그가 조금만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면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실패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오페라의 유령>과 <카드 플레이어>는 부인할 수 없는 실패작이었지만 <스탕달 신드롬>은 다리오 아르젠토의 현란한 스타일이 겁에 질린 여자를 번뜩이는 칼로 찔러 죽이는 검은 장갑의 살인마 이외의 소재에도 이식될 수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과 장르 팬들이 ‘그것도 매력이려니’하고 대충 용납해왔던 그의 치명적인 단점들이 그 가능성을 밟아 죽였다. 그는 배우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 심리의 정확한 묘사에 관심이 없으며 스토리와 대사는 건성이다. 물론 이탈리아 영화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길들여진 엉성한 더빙도 문제다.

<서스페리아>
<페노미나>

지금까지 다리오 아르젠토가 만들었던 영화들은 도대체 뭔가? 그것들은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을 뜻하는 피투성이 추리물인 ‘지알로’ 장르에 속해 있다. 그중에서도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들은 더 좁고 특수한 영역이다. 아마 아르젠토 영화들을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탈리아에 사는 영어권 외국인이 우연히 살인현장을 목격한다. 경찰에 신고하고 잊어버리려 하지만 그가 목격한 현장은 뭔가 좀 기형적인 면이 있어서 계속 그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결국 호기심이 당긴 그는 어설픈 탐정이 되어 수사를 하는데,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검은 장갑을 낀 살인마에게 한명씩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러다 결국 주인공은 막판에 그 기형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주로 여성인) 범인을 밝힌다. 물론 아르젠토가 늘 이런 이야기만 만들었다는 건 아니다. <세 어머니> 3부작이나 <페노미나>처럼 초자연적인 요소가 본격적으로 개입된 작품들도 있고 <테네브레>처럼 음흉하게 호러 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캐릭터 내에 투영하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수정 깃털의 새>와 <딥 레드>는 이런 공식을 거의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고 나머지 요소들도 그의 다른 영화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아르젠토 영화가 반복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그나마 형식적으로 사용하는 스토리보다는 찰나의 충격에 더 집착하기 때문이다. 아르젠토의 팬들이 영화를 보고 기억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살인장면들이다. 아르젠토의 살인장면들은 어처구니없이 강렬하고 종종 거의 찬란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따분하고 지겨우며 짜증날 정도로 장황하게 늘어진다. 정확한 인용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움베르토 에코는 포르노와 일반 영화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섹스신 중간에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이동장면들이 많이 나오면 포르노라고 말한 적 있는데, 그 정의는 아르젠토에도 은근슬쩍 잘 맞아떨어진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들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들을 위한 학살 포르노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기어린 꿈

그럼에도 우리가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들을 8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수많은 슬래셔영화들보다 더 높이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젠토의 팬들은 그의 피투성이 아이디어를 칭찬하지만 살인의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도 특별히 못할 건 없다. 오히려 살인장면의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늘 검은 장갑을 낀 얼굴 없는 살인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의 영화들에 비해 <13일의 금요일>이 더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의 영화들은 관객이 잔인무도한 폭력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덜 자극적이 되어가고 있다. <서스페리아>는 개봉 당시만 해도 열성 호러 팬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영화였지만 요새 이 영화를 정말로 무섭게 보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오페라>
<딥 레드>

그러나 여전히 아르젠토의 영화는 시선을 끈다. 지루한 추리과정과 환상적인 학살 모두를 비추는 무언가가 그의 영화에는 존재한다. 아르젠토의 영화는 기승전결이 있는 온전한 이야기보다는 광기어린 꿈에 가깝다. 이야기꾼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따분한 이야기와 그 사이사이 터져나오는 발작적인 폭력은 우리가 본 이야기가 원래 이야기의 왜곡된 그림자에 불과하며 비교적 멀끔하게 종결된 이야기 뒤에는 이성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젠토의 영화는 완벽한 자기 완결성을 갖추지 않은 반쯤 깨어진 상태에서 가장 아름답다.

슬프게도 그건 아르젠토가 온전한 의미의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며 예술가 아르젠토가 아르젠토 영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10여년 동안 아르젠토가 온갖 종류의 내러티브 실험을 시도했던 것도 예술가로서 통제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그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옛 영역으로 돌아온 것도 필연적인 좌절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아르젠토가 아무리 최근 몇년 동안 슬럼프의 지옥을 걸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영화들은 호러 팬들에 의해 감상되고 있으며 전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여고괴담>에서 자기를 괴롭혔던 학교 선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학교유령은 저승에서 아르젠토의 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던 게 분명하다. <스승의 은혜>에 나왔던 참혹한 학살장면들 역시 아르젠토의 영화들(특히 <오페라>)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장화, 홍련>이 이탈리아에서 개봉되었을 때, 거의 모든 이탈리아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우리의 다리오’와 비교했던 것도 그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신경질적인 꽃무늬 벽지에 둘러싸인 겁에 질린 소녀들의 이미지가 <서스페리아>의 영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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