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타수가 바뀌었다. 한상준 전(前) 수석프로그래머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위촉 된 건 지난 2월이다. 누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했다. “그러니까 한상준이 어떤 분이죠?”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분은, 뭐랄까. 학자시지.” 그간 파행과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영화제의 키를 잡을 조타수로서는 못 미더워 보인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학자의 머리로 위도와 경도를 따지고 바람의 방향을 계산하며 영화제를 산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거란 기대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상준 집행위원장의 지휘로 개막을 선언한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시작이 전년에 비하면 매섭도록 화창하다는 거다. 예매율도 좋은데다 언론의 포화는 사라졌다. 솔로몬, 아니 한상준의 지혜가 어느 정도 빛을 발한 걸까. 사실 “대중성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대중성에 부합하는 비주류영화들을 소개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한편으로는 조금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약간 속좁지만 위험하고 음험하게 신나는 것들의 축제를 그대로 지키면서도, 약간 속없지만 밝고 명쾌하게 신나는 것들의 축제로까지 연장하겠다는 포부였으니 말이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끝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개막 이틀 전의 조타수실로 들어섰다. 창문이 아주 넓다. 비가 오기 직전의 보라색에 가까운 하늘이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김없이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건 뭐, 변함없는 부천의 전통이다. 비가 오는 날의 좋은 점이라면 시야가 넓다는 거 아니겠나.
-어김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어제와 오늘 왔으면 더 불안했을 텐데 안 오니까 더 불안하긴 하다. (편집자: 이튿날부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웃음) 그래도 예매가 잘되고 있다.
-확실히 예매율이 지난해보다 좋다. 프로그래밍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젊은 관객이 기다려온 감독들의 신작이 꽤 있다.
=2월에 집행위원장으로 위촉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보니 스스로 프로그래밍에 참여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처음엔 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로서 전체를 책임지고 가려 했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생각이 곧 들더라. 중앙일보 등 조직생활을 오래하면서 느낀 건데, 위에서 지레 걱정하고 큰일을 맡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한 작품 중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긴 했다. 그래도 완전히 그들에게 책임을 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웃음)
-어떻게 생각을 바꿨나.
=원래는 영화전공이라서 영화예술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4월부터는 아예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리더십 바이러스>처럼 경영과 조직에 관련된 서적들. (웃음) 칸영화제 전까지 그런 책들을 꾸준히 읽었더니 집행위원장으로서의 거시적인 방향이 생기더라. 지금 예매율을 보니 내가 손을 뗀 4월 이후에 프로그래머들이 고른 영화들 중에서 매진작이 많이 나온다. 젊은 사람들이 젊은 감각으로 고른 영화들이 어필하는구나 싶더라.
-그나저나 리더십 관련 책들이 진짜로 도움이 되나.
=그중 80% 이상은 상식으로 다 아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부하직원에게 칭찬 많이 해서 동기부여를 해라. 근데 전혀 생각 못했던 깨달음을 주는 책도 있다. 어떤 책은 조직 안에서 방향이나 생각이 같은, 이른바 ‘이너 서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너 서클은 조직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상식적인 생각이잖아. 그러나 한 가지 목표에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상 그런 리더십의 세계와는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맞다. (웃음) 근데 강제적으로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화였던 것 같다. 당장 책임감에서 오는 변화 아니겠나. 오히려 재미있다.
-어떤 면에서는 지난 3년간 처음으로 ‘정상화된 영화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언론이나 관객의 반감도 상당히 줄은 느낌이다.
=지난해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영화제에 대한 안티적 목소리가 높았는데 올해는 거의 없다. 사실 지난해에는 영화제에 대한 반감들이 사라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서 기쁘다. 이제 진짜 문제는 부천영화제의 미래를 고민하는 게 아닌가 싶다. 중앙일보 출판국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나는 정면에서 대립하는 걸 잘 못한다. 부천시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유연성있게 생각하면 대립을 피할 수 있다. 지자체와의 문제는 한국의 모든 영화제들마다 겪을 법한 것들이다. 게다가 부천영화제를 마니아를 위한 영화제로 할 것이냐 일반인에게 더 어필할 것이냐는 문제도 대립의 이슈 중 하나였고….
-김홍준 전 위원장의 해촉 사태가 벌어졌던 이유 중 하나도 부천을 마니아 영화제로 만들 것인가 혹은 어느 정도 부천시를 대표하는 대중적 영화제로 키울 것인가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우려도 있다. 판타스틱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의 정서가 옅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지난해에 브뤼셀영화제에 갔다. 8일 동안 하루 종일 공포영화만 보다보니 머리가 도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어려워하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같은 영화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부천은 브뤼셀보다 크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제에서 호러만 열흘간 틀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영화제를 모두 마니아를 위해서 채우는 건 무리다. 사실 올해도 2/3 이상은 장르영화 아닌가. 그 정도만 충실하게 해서 간다면 나머지 1/3은 장르 폭을 넓혀도 좋을 거다. ‘판타스틱’은 분명히 유지하고 가는 거다.
-부천시의 간섭은 어떤가. 언론들이 관과 영화제의 대립을 굉장히 부각시켰었는데.
=아니. 지난해에도 프로그램에 대한 간섭은 없었다. 실제적인 대립은 이벤트 예산운용 같은 부분들이었다. 올해는 많이들 만족해한다. 물론 지자체가 지원하고 간여하는 행사인 만큼 영화제 사무국과의 갈등 요소는 언제나 있지 않나.
-이를테면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부천지역 인쇄소에 일감을 맡길지 서울지역에 맡길지를 결정하는 문제 같은 거다. 내 원칙은 확고하다. 포스터 인쇄나 배너처럼 디자인 퀄리티가 중요한 것은 서울지역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부천지역에서 해도 충분한 메리트가 있는 경우에는 부천지역 회사에 맡긴다. 업체 선정에는 언제나 갈등요소가 있는데, 부천은 9회 때 그것들이 모조리 폭발한 셈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서로 조심하게 된 장점도 있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 일이다. 정상화된 부천영화제를 두고 그리는 큰 그림은 뭔가.
=세계적인 영화제 질서 안에서 부천영화제 위상을 봐야 한다는 거다. 부천은 부천필하모니나 PISAF 등 일찍부터 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도시라 영화제에 대한 욕구도 강한 편이다. 나도 그 욕구가 있다. 국제적인 위상, 높이고 싶다. 그런 욕심을 갖고 보다보니 부천의 잠재력이 상당히 커 보인다. 부천은 유바리나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를 벤치마킹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부천은 유바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부천은 수도권에서 가장 큰 영화제고, 서울 가까이에 있는 관계로 여러 가지 메리트를 지니고 있는 장소다. 이제는 유바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스웨덴 예테보리영화제를 모델로 삼고 싶다.
-예테보리영화제는 어떤 것인가.
=예산 규모에서는 부천보다 약간 적지만 국제적인 위상은 훨씬 높은, 판타스틱영화제는 아니고 일반 영화제다. 프로그램쪽을 벤치마킹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운영과 해외 게스트 초청 실력을 따르고 싶은 거다. 단기적으로는 거기서 좀 보고 배우면서 보강을 하고, 장기적으로는 베를린영화제를 벤치마킹할 생각이다.
-대개 1세대 영화광 중 한명으로 불리지 않나. 그러고보면 계속 언급한 중앙일보 출판국 출신들의 영화계 활동이 대단하다.
=내가 84년에 입사했는데 88년 올림픽 때문에 기자들을 두번인가 뽑아서 허문영, 이영기, 한창호, 임재철 같은 후배들이 잔뜩 들어왔다. 그때가 마침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때였다. 당시 임재철이 목요일인가 영화토론회도 진행했다. 그러던 친구들이 다들 나와서 번듯하게 영화계에 자리잡은 거지. 지난 20년 동안 영화가 문화적, 산업적으로 크게 성장했지 않나. 거기서 받은 해택이 큰 세대다.
-문화적으로 풀리던 시절이라면, 아마도 90년대 초….
=그것보다는 조금 앞 세대다. 절망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세대라고나 할까. (웃음) 강한섭, 전양준, 정성일 등 당시 영화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폐인이라고들 했다. (웃음) 영화로 도피한 사람들이니까 영화를 한다고 미래에 뭔가 잘될 것이란 기대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많이 왔다. 흔히 우리를 영화광 1세대라고들 부르는데, 그 다음 세대는 1세대가 좀 얄밉다더라. 내 세대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고 있다고.
-절망적으로 폐인처럼 영화를 한 세대라 막강한 걸까.
=그런 것도 있나보다. (웃음)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다들 용산 미8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부대 앞에서 아는 카투사가 에스코트를 해주면 극장 진입은 가능했다. 하지만 극장 앞에서는 미군에게 부탁해서 표를 사야만 한다. 근데 다들 나한테만 그 일을 시켰다. 내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이유로. (웃음) 우리는 영화 좋아하는 한국 학생들인데 표 좀 사주세요, 하고 구걸을 했지. 그렇게 영화를 본 세대라 머릿속에 더 잘 박혀들어간 거 아닐까. (웃음)
-프랑스, 특히 누벨바그 작가에 대한 애정은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에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도 번역하지 않았나.
=2004년 6월에 을유문화사에서 의뢰가 왔다. <장 뤽 고다르-소비사회의 영화와 이데올로기>도 번역했는데 트뤼포도 번역할 생각이 없냐고. 마침 그때 다른 직업이 없었다. 중앙대 강의도 계약기간이 끝난 참이었고, 그런데 불어판 서문을 번역하다보니 너무 글이 좋아서 꼭 하고 싶어졌다. 을유문화사에 전화했더니 ‘어려우신가보군요’라고 지례짐작하기에, 내가 말했다. 아뇨. 제가 꼭 해야만 하겠습니다. (웃음) 그러고는 후회했다. 번역에 1년6개월이 걸렸으니까.
-연출하신 단편영화 <M/T 교수의 외출>도 누벨바그 감독 고다르의 <알파빌>에 대한 오마주였다.
=안 그래도 올해 프랑스 SF특별전에서 <알파빌>을 상영하는데 끼워서 특별상영하려다가 관뒀다. 영화 포맷이 달라서 상영하는 스탭들이 짜증낼까봐. (웃음)
-<M/T 교수의 외출>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
=오랫동안 생각하던 걸 했다, 가 아니다. (웃음) 당시 중대 대학원에서 연구교수를 하고 있었다. 이충직, 주진숙 교수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내준 시나리오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충직 선생이 시나리오나 하나 써보라더라. 허허 웃어넘기고 집에 가다가, 아니. 진짜로 시나리오를 써가면 얼마나 놀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주말에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이충직 선생에게 넘겼다. 그랬더니, 그분이 원래 그런 분인데(웃음), 갑자기 옆방의 학생들을 다 모으더니 같이 영화를 만들라더라. 그래서 내 돈 200만원을 들여서 학생들하고 만든 거다. 이후에는 또 이현승 감독이 HD 5인5색 영화 <아미그달라>에 참여하라더라. 규모가 상당한 영화를 9회로 촬영하고 나니, 후시작업 들어가기 전에 5일 연속 영화 만드는 꿈만 꿨다. 아하. 이런 게 영화 만드는 매력이구나! 인생도 길지 않은데 이거 안 하면 어떻게 살아? (웃음)
-시나리오 쓴 게 좀 더 있나. 어떤 내용들인가.
=아유. 그걸 어떻게. (웃음) 대중적인 걸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사적인 이야기는 몇개 쓴 게 있긴 하지만. 장르라고 해서 완전히 장르에 빠져드는 건 잘 못하겠다. <M/T 교수의 외출>도 내 현실과 어떻게든 연결되더라. 그거 주제가 전통적인 영화문화의 죽음이다. 2010년에는 전통적인 영화관이 없어지고 패스트푸드점처럼 변한다는 이야기다. 근데 그런 시대가 2010년이 되기 전인데도 벌써 왔잖아. 그 점에서는 놀라운 영화다. (웃음)
-(웃음) 어떻게 보면 충동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예술가적인 면. 그게 나도 있다. 근데 내가 사회에 적응을 너무 잘한다. 일찍 사회 나가서 직업도 잘 가졌잖아. 고통스럽게 다니긴 했지만 중앙일보도 10년 넘게 근무했고. 황규덕 감독한테 얼마 전에 그랬다. 나는 너무 적응력이 좋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수성이 있는데도 예술가는 못 됐다고. (웃음)
-지금은 충동과 책임감을 조절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빛을 발하는 시기라고 할 수도 있을까.
=영화제. 책임감이 먼저다. 충동적인 면은 딱 막고 있다. 이성과 날카로운 판단이 필요한 일이니까. 지금 인터뷰는 신나서 하는 거니까 확 풀어줘도 된다. 내가 말하는 것에 스스로 휘말려들기도 하고, 내가 한 말에 스스로 반하기도 하고. (웃음). 집행위원장을 하면서는 왠지 그런 면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좀 답답하기도 한데, 하지만 지금 맡은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완벽하게 자기 조절을 하고 산다. 옛날에는 잘 못했는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