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듯 이야기와 조우하지 못하는 이미지, 무서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과도한 사운드와 충격요법… 여름마다 극장가를 찾아오는, 그야말로 ‘호러블’한 공포영화의 무한반복에 질리셨다고요. 시골집 평상 위에서 두런두런 나누던 온갖 괴담이며,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성실한 기본기로 완성한 덕분에 브라운관에서 우리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던 <환상특급>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차라리 그립다고요. 1942년 경성의 신식병원 안생병원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의 기이한 이야기를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엮어낸, 익숙하고도 낯선 공포영화 <기담>을 소개합니다. 생면부지의 시체에 끌려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젊은 의학도, 사탕을 탐하듯 새아버지를 탐하다가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맞닥뜨리는 어린 소녀, 일본 유학 길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귀국한 비밀 많은 의사 부부가 간직한 각기 다른 사연이 이곳에 있습니다.
죽마고우이자 선후배, 두 사촌형제가 호흡 맞춰
<기담>의 감독은 정가형제, 라고 되어 있다. 정식, 정범식 두 감독은 사촌지간. 영화란 결국,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의 결과물이기에 한배에서 태어난 친형제든, 평생가약을 맺은 부부든, 생사고락을 함께한 죽마고우든, 공동연출을 맡은 이상 둘 사이의 갈등과 다툼이 한번 이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자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다섯살 터울의 형과 아우는 자못 완강하게 그러한 오해를 거부한다. 큰집과 작은집, 결혼 전의 고모들까지 한 지붕 밑에서 모여살았고, 12명의 사촌형제들과 방학마다 할아버지 댁에 모여서 한달 내내 함께하는 생활을 고등학생 때까지 지속했다는 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에게 들려주고 의견을 교환하며 놀았다. 먼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영화와 연극, 음악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정범식 감독과, 형과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나왔고 이후 박찬욱 감독의 연출부로 현장경험을 쌓았던 정식 감독은 평생을 친형제이자, 죽마고우였고, 돈독한 선후배로 살아왔다. 그야말로 정씨 집안의 독특한 가풍이 오늘날의 두 사람을 만든 셈인데, 여기에 두 감독보다 어린 또 다른 정가형제 배우 정우식이 의대실습생으로 <기담>에 출연했다. 코미디영화 감독이 아니냐는 오해를 무릅쓰면서 그런 명칭을 고집한, 필연적인 이유는 있었던 셈이다.
연출료를 정확하게 이등분하여 나눠가졌고, 앞으로도 연출료만 2인분으로 주어진다면 공동연출을 계속하고 싶다는 두 사람은 ‘둘이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말하다. 36시간 연속촬영시에는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가며 정신을 잃어도 영화는 계속 찍을 수 있었고, 주어진 여건을 돌파해나가는 ‘쾌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대질심문으로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현장에서 스탭 및 배우와 이야기할 때는 매번 둘 중 한명이 나서서 한 가지씩 안건을 처리했다고. 두명의 감독을 둔 제작진의 일반적인 혼란도 최소화됐으리라 짐작해본다. 현장에서 테이크의 OK 여부를 결정하거나, 편집실에서 컷포인트를 잡을 때도 둘이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걸로 족했다니, 둘 사이의 불화에 대한 지레짐작은 거둬도 좋겠다.
지난 8월1일 개봉하기까지, 영화 <기담>이 품은 4년간의 ‘기담’도 빼놓을 수 없다. <병원기담>이 <기담>으로 바뀌었고, 친형제 감독에서 사촌형제 감독으로 옮겨갔으며, 시대를 넘나드는 재기발랄한 공포물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엮이는 기품어린 공포물로 탈바꿈했다. <기담>의 제작사인 영화사 도로시가 씨네와이즈라는 이름이었을 무렵, 장소정 대표는 형제지간인 박진성, 박진석 감독의 <병원기담>을 제작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캐스팅까지 마친 뒤에도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감독이 떠난 뒤 장소정 대표는 우연히 만나 모니터링차 시나리오를 건네준 대학 동기 정범식 감독을 떠올렸다. 서로 죽이 잘 맞고, 함께 있을 때 시너지를 내며, 종종 함께 다니던 정식·정범식 형제는 자연스럽게 공동연출 제의를 받았고, 번갈아가면서 데뷔 제의를 고사하던 두 사람은 드디어 의기투합을 결심했다. 원래의 캐스팅에서, 김태우만을 제외한 모든 배우를 새로 섭외했고, <병원기담>에서 세 가지 이야기의 소재만을 취한 <기담>의 시나리오는 고전영화의 양식미와 기본기를 철저히 계산한, 어찌 보면 원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됐다. 촬영을 10일 남기고 제작을 포기했다가, 며칠 만에 다시 모두를 불러모아 촬영을 시작했고 28억원 남짓한 빠듯한 제작비, 3달에 걸친 촬영기간을 지켜야 했다.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았고, 그럼에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적도 많았다는 이야기다.
아날로그적 고집으로 고전의 형식미 살려내
일본 유학파 엘리트였던 정범식 감독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삼국지며, 김삿갓 이야기부터 일제시대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자란 두 사람은 고지식한 아날로그 숭배자들이다. 그 흔한 DI를 거부하고, 오로지 필름작업을 고집하면서 ENR 현상 등을 가미한 것은 물론,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1937년 기록영상은 실제 16mm필름과 1940년대 카메라를 이용해 찍고, 필름 표면마다 직접 상처를 내고 먼지를 묻혀서 옛날 영화의 느낌을 만들어냈다. 일반 35mm로 찍어서 DI를 통해 간단한 효과를 거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고 제안하는 스탭들이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시간을 넘나드는 영화의 성격 덕분에 유난히 플래시백이 많고 신 넘김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컷을 넘기더군요’라는 콘티작가의 의견에 “(미안하지만) 음. 그건 다른 영화에서 써먹고, 우린 그냥 이렇게 할래”라고 대답하길 수차례, 콘티작가가 삐쳐버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데뷔감독의 쓸데없는 고집이 아닌, 소신있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어느 정도 의견 조율 기간이 필요했던 것은 물론이다.
옴니버스와 액자구조를 조금씩 차용한 영화의 구조를 생각할 때, 편집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며 조금씩 달라진 지점이 있었을 것 같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본의 아니게 길어진 프리 프로덕션 기간 내내 촘촘한 준비를 거듭하는 동안 일반적인 회상장면에서 쉽게 애용되는 그 흔한 화이트아웃조차 “징역 10년에 처하기 전에는 그렇게 안 한다”는 각오로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모든 컷의 사이즈와 무빙과 연결을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애초의 콘티와 다른 방식의 편집을 시도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오더라”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도 혼자 살아남아 1979년을 맞이한 정남(진구)의 현재를 에필로그로 보냈다가 다시 앞으로 끌어온 것도,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겹치는 부분을 좀더 친절하게 편집했다가 결국 이를 최소화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쯤되면 익숙하되 기묘한 귀기가 곳곳에 서린, 관객보다 영화가 먼저 호들갑떨지 않고 차분히 기본을 다져나간 영화 <기담>이 갖춘 모든 미덕이 우연의 결과가 아님이 명백해진다. 영화에서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교통사고 장면에선 모두 움찔하며 옷깃을 잡는 손이며, 사고장면을 가리고 지나가는 전차 속 군중의 웅성거림 등 예스럽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연출됐고, 교통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녀가 정체불명의 괴력을 발휘하며 응급실 의사들을 의아하게 만들 때는 덜컹거리는 소리나 신음소리보다는 당황한 의사들의 굵은 땀방울을 앞세웠다. 과잉의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부족한 환경에서 무리하게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느니 또 다른 영화적인 방법을 고민했다. CG도 특수촬영도 열악했던 시대, 그러나 온갖 시적인 방식으로 상상을 스크린에 펼쳐냈던 고전영화의 교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영화들은 드라마의 정보와 정서가 전달될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전영화의 형식미와 양식미를 지키고 싶었다”는 이들에게 확신을 준 것은, 어릴 적부터 함께 봤던 온갖 훌륭한 영화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나 미조구치 겐지 등 옛날 일본영화가 끌린다는 이들의 영화가 <시민 케인>의 정교한 구조와 옛 일본영화의 소박하고 거친 아름다움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좀더 무섭고, 좀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우려와 조언이 없었을 리 없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 시체안치실을 지키는 장면에서 시체가 움직이는 장면을 넣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 두 감독은 결국 시체안치실로 끌려들어간 정남이 하룻밤 사이에 겪게 되는 일생을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을 생각해냈다. 기담의 성격이 명확한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서, 원혼이 얽힌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 번째 이야기의 스릴러적인 성격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설정을 추가했다. 부인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말하는 동원의 내레이션이 처음부터 등장하여 마지막 반전을 약하게 만든다는 주위의 만류가 있었지만, “극중에 위험요소를 관객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서스펜스가 성립한다”는 ‘대선배’ 히치콕의 가르침을 믿었던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관객에게 단지 ‘앗, 그림자가 없었던 거야?’라는 10초짜리 깜짝쇼를 위해 전체적인 이야기의 톤을 포기할 순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밑으로 자살한 여고생의 시체가 발견되는 영화의 프롤로그는 제작진 모두가 맘에 들어하는 장면. 예정대로 촬영을 시작했다면, 실제 강을 배경으로 썰매 지치는 아이들까지 동원해서 그럴듯하게 찍을 수 있었겠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제약 덕분에 봄을 알리는 꽃잎이 떨어진 무게로 굳건한 얼음장이 무겁게 갈라지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성실한 고민과 패기가 빚어낸 데뷔작
1979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간직한 안생병원이 철거되는 영화의 마지막. 제국주의의 막판 안간힘의 와중에도 그저 안온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젊은 모습 그대로 작은 촛불을 손에 든 채 뒤돌아 멀어진다. 무너져내리는 건물의 모습에서 끝맺을 수도 있었지만, 영문도 모른 채 비극을 맞이하고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의 눈빛은 두 감독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범식 감독은 이성복 시인의 <정든 유곽에서>에 대한 시평 중, ‘한국의 근현대사 속, 출구없는 무덤에 갇힌 불쌍한 영혼을 표현했다’는 표현을 들어 <기담>에 담고자 했던 또 다른 마음을 얼핏 드러낸다. 그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각종 자료를 살피는 동안 접했던 당시의 영화나 사진 속 평범한 민초의 모습은 의외로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고, 얼마나 큰 비극 속에 있는지 모르고 순응하는 그 모습이 묘하게 애틋했다고 말한다. 영어 제목을 두고 고민했다는 <마지막 숨> <묘비명> <순응자> 등을 통해, <기담>의 또 다른 주제를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영화의 비극은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였던 1942년에 벌어지고, 유일한 생존자로 이후 30여년을 외롭게 살아낸 정남이 더욱 외로운 심정으로 지난 생을 돌아보는 것은 1979년 10월26일의 일이다.
정가형제는 주연배우 진구의 아버지인 진영호 촬영감독이 “꼼꼼한 미장센을 구사하는 두 감독이 누아르를 찍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며 기뻐한다. 빛과 어둠, 이야기와 이미지 등 영화가 본디부터 지닌 질료에 매혹된 이들은 마땅히 고민해야 할 지점을 성실하게 고민했고, 유연한 타협이 필요한 지점에서 더 나은 대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의 데뷔작에서, 미처 갖추지 못한 두세 가지보다 공들여 마련한 예닐곱 가지가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극단이 공존하는 1942년의 평범한 삶의 풍경을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것이며, 시대적 특성을 한껏 이용하여 맞춤하게 제작된 병원세트에 보통 사람들의 숨결이 미치지 않는 것, 영화 전체를 갈무리해야 할 마지막 에피소드의 완성도가 부진하게 다가오는 것 등 엄격한 기준으로 바라볼 때, <기담>을 바랄 나위 없는 걸작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는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고집스러움과 현실적인 자신감을 갖춘 데뷔감독들의 패기는 <기담> 그 이후에 대한 기대를 돋운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텍스트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씩씩한 취향이야말로, 대중영화가 놓칠 수 없는 단 하나의 미덕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