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행복이여 안녕, <행복> 촬영 현장 방문기
2007-09-18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장면 번호는 시나리오 기준)

#.69 “나 이렇게 안 살았거든.”

-2006년 10월11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은희와 영수의 집 오픈세트

나는 지금 ‘행복의 나라’로 간다. <행복> 촬영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입속으로 말해보았다. 그래도 기분은 들뜨지 않았다. 도착하면 바로 마주칠 장면이 주인공 영수(황정민)와 은희(임수정)의 사랑에 처음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다가와 표지판을 올려다보니 장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검은 줄로 지워져 있다. 아마도 댐을 짓는 과정에서 수몰됐나보다. 호수 밑에 잠든 마을에서도 한때 사람들은 사랑했을 것이다. 이날 촬영장소는 요양소를 나온 은희와 영수가 살림을 차린 집의 오픈세트. 기존 가옥을 개조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나무를 옆구리에 낀 뾰족탑 교회가 예뻐서 영화미술팀의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본래 있던 교회라 한다. 저 집은 아니겠거니 보아넘긴 야트막한 집 마당에 스탭들이 보인다. 현실이 영화보다 영화적이라는 말은 두루 들어맞는다.

마당 귀퉁이에 앉아 있는 허진호 감독의 얼굴이 밝고 느긋하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제작했던 오가원 PD가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형구 감독이 이끄는 촬영팀은 카메라와 함께 부엌에 들어앉았고, 생기 넘치는 정영민 조명감독은 부쩍 짧아진 해와 눈싸움 중이다. 촬영할 69신은, 시장을 보고 돌아온 영수가 그새 빗속에서 영수 먹일 약초를 캐느라 흠뻑 젖은 은희를 보고 벌컥 짜증을 내는 장면이다. 허진호 감독은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긴 연출자다. 컷마다 감정과 의견을 표명하고 상대배우의 그것에 귀기울여 상황을 창조하는 데에 익숙지 않은 배우라면, 쉬 지칠 수 있다. 이날도 황정민과 허진호 감독은 의견이 분분하다. “가만, 이 컷의 끝이 어디지?” “왜 영수를 은희가 마루에서 데리고 들어오지?” 질문이 질문을 받는 대화가 계속된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황정민의 팔에 닿을락 말락 댄 채 이따금 임수정이 나직이 다독인다. “은희도 영수가 걱정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말을 주고받다 보면 싸우게 되는 거지.” 에너지 넘치는 황정민이 다섯 마디쯤 제안을 던지면, 느릿한 허진호 감독이 한 마디쯤 받아내고, 신중한 임수정이 조근조근 종합하거나 은희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보아하니 이것이 <행복> 트리오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착한 의결 절차인 모양이다.

나란히 앉은 황정민과 임수정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 같다. 황정민의 몸은 한 자세에 갇히길 거부한다. 현장용 의자 위에서 기다란 팔다리를 이리저리 뻗으며 휘파람을 불고 연신 다리를 떨어댄다. 걸어다니는 아이포드가 따로 없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부터 <동물의 왕국> 테마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레퍼토리가 흘러나온다. 황정민의 에너지가 일으키는 유쾌한 소용돌이가 범접하지 못하는 현장의 유일한 장소는 임수정의 고요한 얼굴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현장에서 활달했다는 소문으로 미루어볼 때 임수정은 지금 카메라가 돌건 돌지 않건 은희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무엇 하나 닮은 데 없는 이 두 사람은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포옹한다. 물기를 말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 임수정은 계속 머리를 적시고 한기를 참아야 한다. 그녀가 안심시킨다. “아픈 역이잖아요. 병나도 괜찮아요.” 감기라도 와주면 고마워할 기세다. 한편 황정민은 병원장면을 위해 CT와 초음파를 찍는다는 조감독의 말에 반색을 한다. “진짜 간호사가 해줘요? 그럼 실제 내 간 상태 좀 봐야겠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살금살금 다가간다. 젖은 옷과 약초를 발견한 영수가 성을 낸다. “넌 애가 멍청한 거니? 궁상맞은 거니?” 보이지 않는 무엇이 쩍 갈라진다. 반갑게 마중 나왔던 은희의 숨이 막힌다. “영수씨 말조심해.” 혼자 있고 싶다는 그녀에게 영수가 못을 박는다. “… 나 이렇게 안 살았거든?” 모니터 앞으로 돌아온 은희는 힘들어한다. “영수씨한테 ‘말조심해’라는 말도 대놓고 잘 못하겠어요.” 아마도 그녀가 힘든 진짜 이유는, 은희를 염려하는 영수의 마음 밑바닥에서 환멸이 미동하기 시작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62 “왜 뽀뽀를 하고 있는데도 뽀뽀가 하고 싶지?”

-2006년 10월11일 은희와 영수의 집 오픈세트

밤 촬영을 위해 현장을 정리하는 동안 휴식이 주어졌다. 어둠과 더불어 솜옷이 아쉬운 싸늘한 공기가 산으로부터 스멀스멀 내려온다. 은희와 영수의 감정처럼, 계절도 바야흐로 가느다란 선 위에서 흔들리는 중이다. “정민 오빠랑 저랑 어울려요?” 임수정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얼결에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다. 저녁 식사 시간을 틈타 은희와 영수의 집안에 살짝 들어가보았다. 고물고물한 살림살이들이 어깨를 비비며 놓여 있다. 벽에 붙은 원 그래프 생활계획표는 건강을 위해 할 일을 지시하고, 자개 박힌 오밀조밀한 약장 옆에 네칸짜리 약장, 바구니에는 은희와 영수의 이름표가 다닥다닥 붙은 약통이 그득하다. 이불, 베개, 머리 묶는 방울까지 은희가 일일이 재봉질한 살림들을 구경하다가, 방금 은희를 다그치던 영수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어느 날부터인가 숨이 막혔을 것이다. 자신을 끝없이 ‘나쁜 놈’으로 느끼게 하는 그녀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까닭과 버리게 되는 까닭은 종종 일치한다.

저만치 황정민이 칫솔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지나간다. 그러고보니 62신은 입맞춤 장면이다. 테이크 사이사이 담배를 못 피우니 황정민의 고역이 이만저만 아닐 터다. 준비가 끝난 스탭들을 둘러보며 황정민이 일침을 놓는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니? 이거 베드신 아니야!” 낮에 촬영한 신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2신은 살림을 차린 직후의 두 연인이 따뜻한 키스를 나누는 밤이다. 입술을 뗀 뒤 은희는 묻는다. “왜 뽀뽀를 하고 있는데도 뽀뽀가 하고 싶지?” 아무리 퍼내도 바닥에 닿지 않는 그 심정을 영수는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황정민이 그 대사가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느낌이죠.” 이정화 스크립터의 대답에 황정민이 짐짓 콧방귀를 킁 뀐다. “별 시답지 않은 느낌도 있네.”

웃음을 틈타 임수정에게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정했다. 두 배우는 딱 들어맞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영수와 은희는 사는 법이 다른 사람들이고,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편이 정답인 것 같다고. 임수정이 수긍하며 덧붙인다. “은희는 사랑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 애착하는 거예요. 제대로 된 사랑을 한번쯤 경험해보려는 거죠. 첫 번째 사랑은 아니더라도 내 인생의 첫사랑 같은, 미칠 것 같은 사랑이 누구나 있잖아요.”

허진호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자 두 배우는 (역시 은희가 만든 게 분명한) 커플 잠옷을 입고 이부자리에 눕는다. 지미집 크레인에 올라탄 카메라는 천천히 하강하며 다가간다. “은희야, 넌 내가 그렇게 좋으니?” “응. 영수씨는?” 남자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딴소리를 한다. “이런 게 있긴 있구나.” “이런 게 있어요. 영수씨.” 배우들이 모니터 앞으로 돌아오자 시나리오 대사는 “그런 게 있긴 있구나”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소한 듯해도, ‘이런 게’라는 표현은 영수를 감정에 참여시키는 반면 ‘그런 게’는 영수를 바깥으로 밀어낸다. 허진호 감독은 후자를 택한다. 황정민이 영수의 곤혹감을 전한다. “‘영수씨는?’ 이라고 물어볼 때 고개를 돌리고 싶었어.” 감독마저 피하고 싶은 질문 맞다고 동의하자 임수정과 여성 스탭들은 서운한 눈치다. 결국 고개는 돌리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모니터를 바라보던 허진호 감독이 은희가 더 적극적으로 입을 맞췄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임수정의 음성이 고무공처럼 튀어오른다. “어머 싫어요! 감독님.” 그건 도발적으로 보일까봐 겁내는 여배우의 투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여자 은희의 자존심 상한 비명이다.

#.51 “저, 옮는 병 아니에요”

-2006년 11월2일 경기도 양평군 봉상리 숲길

염치없게도 촬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상에 앉았다. 면구스러운 마음에 먹는 둥 마는 둥 일어서는데, 또 저만치서 칫솔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황정민이 보인다. 오늘도 키스하는 날이다. 읍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영수와 은희가 첫 키스를 나누는 51번신은 일찌감치 찍어두었지만 다시 촬영한다.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입을 맞추는 연출이 어색하다고 판단한 허진호 감독이 동선을 바꾸기로 했다고 오가원 PD가 전한다.

훤칠한 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산책로는 천장 높은 성당처럼 경건하다. 비탈 위쪽에 자리잡은 카메라가 아래쪽에서 걸어 올라오는 은희와 영수의 움직임을 가늠한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날 자리를 비운 김형구 감독 대신 카메라를 잡은 최현기 촬영감독이 트랙은 깔 필요없다고 판단한다. 촬영팀이 “해 나옵니다!” 예보를 하더니, 곧이어 동시녹음팀에서 “바람 옵니다!” 속보를 전한다. 소풍이 제격인 날씨에 천진한 기분이 된 몇몇 스탭은 은행잎을 모자에 꽂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이파리들도 소품으로 쓰고 싶은 허진호 감독이 재촉한다. “잎 떨어진다! 빨리 찍자.” 낙엽을 더 우대한다고 배우들이 샘내는 눈치다.

“난요, 남녀가 깜깜한 극장에서 영화 보면 남들 몰래 손도 잡고 그런 줄 알았어요.” 역시 은희가 먼저 낚시를 던진다. 영수가 받는다. “아니, 뭐 그래서 나보고 지금 손을 잡아달라는 거예요, 뭐예요.” 황정민의 영수는 시나리오 속 영수보다 넉살이 좋다. 웃다가 숨이 차 바위에 걸터앉은 은희의 손을 영수가 잡는다. 시선이 얽힌 찰나 은희의 한마디가 망설임을 끝낸다. “영수씨. 나 옮는 병 아니에요.” 테이크를 끝내고 모니터 앞에 모인 배우들이 토닥거린다. 임수정은 뒷짐 진 황정민의 아저씨다운 걸음걸이를 타박한다. 황정민은 영수가 혹시 안 옮는다는 다짐에 정말 안심이 되어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다. 첫 번째는 키스의 타이밍이 자연스럽고, 두 번째는 낙엽의 연기가 일품이고, 세 번째는 동시녹음 마이크 줄이 보였고…. 테이크들의 장단점을 달아보는 감독의 머릿속 천칭이 분주하다. 애석하게도 영화는, 최선의 요소만 떼내어 조합할 수 없는 얄궂은 물건이다.

#. 54 “우리 같이 살래요?”

-2006년 11월2일 경기도 양평군 봉상리 희망의 집

내일 촬영할 54신의 동선을 잡는 작업만 하면 오늘 일정은 마무리된다. 54신은 은희가 영수에게 요양소를 떠나 같이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장면이다. 산책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희망의 집’은, 생활 습관을 바꾸고 식이요법을 행하려는 환자들을 위한 사설요양기관이다. 소로를 따라 올라가자, 운동기구와 평상이 놓인 널찍한 마당이 검소한 단층 건물 몇채에 둘러싸여 있다. 영화미술팀의 작업이 더해진 공간이지만 어느 곳에 손길이 닿았는지 가려내긴 어렵다. “부족한 이들이 서로 의지하는 따뜻한 안식처입니다”라는 알림글이 눈에 띈다. 공중전화 옆에는 “통화는 짧고 다정하게”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다정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치료로 간주하는 곳다운 지침이다. 둘러보고 나니 향락주의자 영수가 어떻게 은희에게 이끌릴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도 다소 수그러든다. <마의 산>의 한 구절대로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의 힘을 갖는다. 공간의 힘은 온갖 관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자연상태로 옮겨놓으며 망각작용을 한다.”

54신의 관건은 은희가 동거하자는 프러포즈를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다. 낙점 받은 장소는 환자들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이뤄지는 휴게실. 허진호 감독이 특유의 지시를 한다. “자, 은희랑 영수! (상황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나 보자.” 노래꾼 황정민은 자연스레 구석의 기타를 집어들더니 소파에 걸터앉아 캔사스의 <바람 속의 먼지>를 흥얼거린다. 그러나 음악 저작권료의 압박을 인식한 황정민은 이내 곡목을 바꾼다.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이만 보면.” 지나가다 영수의 목소리를 들은 은희가 들어온다. 곁에 앉아 함께 리듬을 타던 그녀는 노래 중간에 불쑥 묻는다. “같이 살래요?” 기타가 멈춘다. 허진호 감독은 소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두 사람을 골똘히 올려다본다. 휴게실을 휘 둘러보던 감독이 탁구대를 발견한다. “탁구 한번 쳐보자.” 똑딱똑딱 공이 오가는 사이에 대화를 주고받으란다. 정영민 감독이 “사운드가 재미있겠다”고 거든다. 이번에도 “같이 살래요?”라는 은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탁구공은 또르르 바닥에 구른다. 구경하긴 재미있지만 테이크가 많이 소모될 것 같다. 움직임이 과해서 신의 집중력이 떨어질 위험도 있다. 경우의 수를 머리에 굴리며 허진호 감독이 탁구채를 잡는다. 정영민 조명감독이 상대로 나선다. 어느새 구경꾼들을 의식한 두 사람은 스코어에 집착한다.

마당으로 나간 배우들도 둘만의 숙의에 들어간다. 황정민이 원칙을 밝힌다. “아무튼 뭔가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가야 할 것 같아. 밭을 매든, 걸레질을 하든.” 무거운 한마디를 꺼내야 하는 당사자 임수정은 시나리오대로 둘이 처음 밤을 보낸 방 안에서 찍고 싶다. 그녀가 연인에게 지지를 청한다. “방 안에서?” 호기롭게 끄덕인 영수는 은희의 어깨를 감싸고 사람들 없는 쪽으로 이끌며 모의를 계속한다. 오늘 둘은 완전히 의기투합하는 눈치. 하긴 그들은 방금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껴안은 연인들이다. 사랑과 행복이 한치 어긋남가없이 포개지는 드문 시간 아닌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수정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그녀가 없는 사이 영수가 저지른 ‘바람둥이 행각’이라도 제보했는지 토라진 임수정의 넋두리가 터진다. “이런, 눈만 떼면! 하여간 현장을 떠나면 안 된다니까? 지금도 그러는데 나중에 옛날 애인 집에 가 있으면 오죽하겠어?”

#.105 “나 여태껏 영화 하면서 이런 신 처음 찍어”

-11월20일 은희와 영수의 집 오픈세트

각오는 했다. 그래도 자꾸 눈을 돌리고 싶다. <행복>에서 가장 긴 장면 중 하나인 105신은 진실이 행복을 파괴하는 순간이다. 두 배우가 감정적으로 무방비하게 벌거벗는 장면이라 사진기자는 동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병세가 호전된 영수는 미래를 곁눈질하게 되고 그가 속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미필적 고의로 옛 애인 수연(공효진)과 시간을 보낸 영수는, 술기운을 빌려 은희를 떨쳐내려 한다. “나 여태껏 이런 장면 처음 찍어.” 격정으로 인물을 뒤흔들고 무너뜨려본 적 없는 허진호 감독도 어깨가 굳었다. 마당에 놓인 온갖 난방기들은 부르르 전율하며 뜨거운 김을 토해내다가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면 일제히 숨죽이기를 반복한다. 세트 안에서는 배우들이 더운 숨을 몰아쉬고 있다. 영수의 언성이 높아지면 은희는 차갑게 가라앉고 영수가 침묵하면 은희가 파르르 떤다. 카메라만이 용케도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느릿느릿 고개를 쳐든다. 105신의 시점은 은희와 영수가 버려진 빈집에 보금자리를 꾸민 지 1년 뒤다. 62신에 비하면 부쩍 살림살이에 길이 들었으나 거기엔 어떤 광채가 사라지고 없다. 영수가 입을 뗀다. “난 걔랑 있는 게 너랑 있는 거보다 훨씬 더 편해. 그러니까 네가 먼저 얘기 좀 해줘. 나 그런 얘기 못하는 거 알잖아.” 은희의 반응은 분노보다 공포에 가깝다. 그녀는 맹수를 피하는 어린 짐승처럼 방으로 도망친다. “내 감정은 뒤따라가기 힘들 것 같은데.” 황정민이 난처해한다. 임수정은 짧은 시간 동안 아득한 공포에서 분노, 거기서 다시 애원과 좌절로 진행하는 감정의 전환을 소화해야 한다. “개새끼 니가 사람이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진심도 아닌데 숱한 연인들이 자동인형처럼 내뱉어온 상투어, 다름 아닌 내가 이 말을 하고 있음이 더 비통한 대사다. 남자가 신음한다. “안 돼.” 산소가 부족한 무너진 갱도에서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생존자를 목 조르는 손이 떠오른다.

필름 400자가 다 돌아갔다. 취재수첩의 글씨가 점점 뻣뻣해진다. 허진호 감독은 더 냉혹한 해석의 테이크도 갖고 싶어했다. 은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개새끼’라고 말하고 나서 솟는 감정이 있겠지?”라는 질문이, 영수에게는 면도날에 베는 것처럼 해보라는 주문이 주어진다. 황정민이 난색을 표한다. “그렇게 차갑다는 단어만 주시지 말고 설명이 필요해요. 배우들은 우리 영화에서 여기가 제일 폭발적 장면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관객이 영수의 과오를 목격하면서도 그를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가진 황정민으로서는 고비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좋은 배우의 신비함은 까다로운 주문에도 불구하고 연기하는 동안 통제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컷’ 사인이 떨어지고 나서 ‘규범’에 맞는 것이 선택될 뿐이다. 임수정의 몸에서 물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통곡의 벽처럼 기나긴 밤이다. 그동안 다른 제목 후보를 논의해온 마케팅 팀은 결국 다시 <행복>으로 돌아왔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그들은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달리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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